제122화.
“다프네는 부재중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 같으니 돌아가 주게.”
나 때문에 엄마가 모욕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급히 놀렸는데 의외로 렉시우스를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악셀리우스였다.
악셀리우스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을 해도 화가 난 렉시우스에게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감히 이 나를 헛걸음하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지. 여행길에서 돌아왔단 소리를 들었으니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라!"
한껏 격양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화가 담겨 있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이번에야 말로 그 건방진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 테니까!”
렉시우스의 외침에 악셀리우스의미간이 와그작 찌푸려졌다.
불쾌함을 훤히 드러낸 그의 표정에도 렉시우스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내가 중재하는 편이 나아 보았다.
"공자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내가 급한 숨을 고르며 목소리를 내뱉으니 이내 형형한 눈빛과 마주쳤다.
"드디어 등장하셨군! 네가 폐하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바람에 내가 전장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알고 있나?"
“예상만 하였지 소식은 처음 듣는군요.”
내 말에 렉시우스는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말했다고?
하! 그렇게도 나를 전장으로 쫓아내고 싶었나 보지? 내가 죽기를 바랐나?”
“오해입니다. 저는 죽기를 바랄 정도로 공작님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내 직설적인 말에 렉시우스가 불쾌한지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인제 와서 입바른 소리를 해도 우습지 않습니까.”
“그래서.”
“폐하께서 제 패기를 칭찬하셨습니다. 제 딴에는 이 시험을 정정당당하게 겨루고 싶어 공작님의 칭찬을 얹은 것인데….”
“하!"
기가 막힌다는 웃음소리에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 충성심을 보여 드리는 것이 공작님의 화를 돋울 것까지 생각 못 한 제 책임이 크네요."
"내 의지가 아닌 네 의지로 출전하게 되어 기분이 나쁠 뿐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렉시우스는 급히 말을 얹었다.
그에 나는 이해한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제 말에서 비롯된 것이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이것을 드릴게요.”
나는 가방 속에 있던 반지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지?”
“순간이동 아티팩트입니다. 혹시 모를 위급한 상황에서 쓰세요."
“지금 나보고 전쟁터에서 도망이라도 치라는 건가?""
렉시우스는 반지를 받지 않은 채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 되어 화를 내었다.
짐짓 자존심을 세우며 강경하게 거부하는 모습에 나는 입가에 지은 웃음을 지운 채 냉정한 표정을 짓고 답했다.
“하지만 죽게 된다면 공작님의 인생은 거기서 끝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감히!”
“목숨보다 자존심이 중하시다면 그걸 선택하시면 되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공작님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답니다."
'네가 죽으면 카롤리나가 공작위를 받게 돼서 곤란하니 절대로 죽지 말라고.' 나는 렉시우스의 손에 억지로 아티팩트를 쥐여 주고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 * *
다음 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주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
"반가워요. 공녀님.”
“오래간만이야."
카롤리나는 머리 위에 깊이 눌러 쓴 모자를 벗고는 응접실에 자리를 잡았다.
“정말로 오라버니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게 될 줄은 몰랐어. 너란 애는 정말….”
"대단하지요?”
나는 웃으며 카롤리나의 찻잔에 따스한 홍차를 따라 주었다.
“차를 마시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인 것 같네요."
"고마워.”
카롤리나는 따뜻한 찻잔을 손에 쥐고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머금었다.
창백하게 바래 있던 카롤리나의 얼굴에 생기가 조금씩 돋았고,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내었다.
“그, 초대장은…?"
"당연히 가져왔죠.”
나는 하얀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웃었다.
카롤리나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보더니 이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내가 연금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니. 마치 꿈만 같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잖아요.”
“하지만… 마음이 조금 무겁네.
오라버니를 전쟁터로 내쫓고서 받아 낸 물건 같아서."
카롤리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마 이곳에 오기 훨씬 이전부터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사건을 일으킨 것은 저인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이 죽을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테니."
"너는 늘 불가능한 일을 자신하는데… 꼭 이루어지는 것이 참 신기해.”
카롤리나는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그래서 궁금해졌어. 도대체 너는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니?”
카롤리나의 표정은 지금껏 보았던 어떤 표정보다 심각하였다.
"단순히 상단의 유치를 위해 벌인 일은 아니지?"
“흐음.”
“굳이 오라버니를 전쟁터까지 내 쫓지 않아도… 너라면 며칠 정도는 시간을 벌 것 같았으니까. 혹시 내 착각인 걸까?"
카롤리나의 말에 나는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확실히 내가 사건을 조금 크게 키우긴 했지.
'의외로 예리하네. 지금 반응을 살펴봐도 괜찮은 걸까?'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하는 이야기인 만큼 카롤리나가 먼저 접근했을 때 말을 꺼내는 것이 좋겠지.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살랑거리는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저의 최종 목표가 무엇일지 궁금하세요?”
“이 정도까지 왔으면 아무래도한 배를 타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도 도와주고 싶고.”
카롤리나는 부끄러운 듯 재빠르게 의견을 덧붙였다.
그 모습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지금부터 나누는 이야기는 어디.
에도 발설하지 않는다고 약조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드릴 수 있어요.”
나는 카롤리나의 앞에 녹음 기능이 있는 아티팩트를 꺼내 들며 말했다.
“만약 약조를 어기면 아티팩트의 마법에 제약이 묶여서 평생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드릴게요.”
카롤리나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아티팩트를 작동시켰고, 카롤리나의 입에서도 비밀을 지키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공녀님. 이번 결전에서 현 황제는 패하게 될 거예요. 애석하게도 반란군은 알려진 것과 다르게 풍부한 물자를 갖고 있거든요.”
“…너 설마?"
결연한 표정도 잠시 내 말에 카롤리나의 얼굴은 곧바로 잿빛으로 물들었다.
충격을 받아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고 떨리는 것을 보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선하게 미소를 지었다.
흔들리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 주어야 했으니까.
“소소하지만 반역에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
확실하고 직설적인 말에 카롤리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잔을 떨어트렸다.
“현 황제는 꽤나 잔인한 품성을 지니셨죠. 예를 들어 보자면 즉위하기 전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글렌 공작가를 견제한답시고 외국상단으로 납품 상단을 바꾼 것이라든지?”
“그, 그건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공녀님이 그의 황비가 된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제 눈에는 앞날이 훤히 보이는데. 공작가의 위상은 더더욱 떨어지지 않을까요?"
깨져 버린 찻잔과 흩어진 찻물, 그리고 창백한 카롤리나의 표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괜찮다는 듯 그녀의 떨리는 손 위에 내 손을 얹고서 말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아실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죽했으면 제가 글렌 공작님의 손에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쥐여 주었겠어요?"
"......."
카롤리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 나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가려고 했다.
밖에서 들린 큰 소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카롤리나의 방문 자체가 비밀이기에 플뢰르에게 주변에 아무도 없게 하라 말했으니 찾아올 사람은 없을 터였다.
카롤리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사안이 사안이니 두려울 법도 하지..'
나는 카롤리나가 쓰고 왔던 모자와 외투를 그녀에게 챙겨 주고는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애석하게도 플뢰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플뢰르 대신 문 앞에 주저앉아 있는 검은색 머리칼의 여린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분명히 오늘이 클레멘스로 돌아가는 날인 줄 알고 있는데.”
나는 문 앞에 앉은 채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마리아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아낄 수가 없었다.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리 봐도 이 안에서 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네.”
한 나라의 대단하신 공녀님께서 이렇게 몰래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내가 입가를 비틀며 웃자 마리아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마리아.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저는 몰래 엿들은 생각은 없었어요! 저택에 방문하니 하녀가 이곳으로 안내해 주어서!”
하녀야 카롤리나의 방문을 모르니 당연히 마리아를 손님이라 생각하고 이곳으로 안내한 것이겠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뒤를 힐긋 돌아보았다.
어느새 모자와 외투로 자신을 꽁꽁 감춘 카롤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잠시 기다려.”
나는 마리아를 향해 날카롭게 말한 뒤 카롤리나에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종을 흔들었다.
그 소리에 근처에 있던 플뢰르가 황급히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카롤리 나에게 말했다.
“뒷문에 마차가 있을 거예요. 추후 편지를 드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이곳에서의 일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카롤리나는 마리아에게 한 번 시선을 던졌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나는 카롤리나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문은 소리 없이 조용히 닫혔고, 마리아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
를 직접 카롤리나가 앉아 있던 소파에 앉혔다.
"오늘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인데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걸까?"
“그… 제가.”
마리아는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다가 이내 내 차가운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푹 숙였다.
"고, 고민 상담을 하고 싶어서요.”
“고민 상담? 내게?"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며 팔짱을 끼고는 짜증이 난 표정 마리아가 우울한 목소리로 솔직히 말했다.
“선배는 저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 것 같았어요.”
'일이 귀찮게 됐어.' 나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그녀의 턱을 잡고서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렇게 찾아온 것 자체가 민폐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몰래 엿들은 사실도 말이야."
“제, 제가 몰래 엿들은 것은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반… 그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내 정신 좀 봐.
손님인데 차 한잔도 대접 안 하다니.”
“저, 저는 괜찮은데.”
나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고는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리아의 시선을 피해 작은 물약하나를 꺼내 찻주전자에 몰래 넣고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탄 뒤에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시렴.”
“그, 이건….”
“네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진정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차란다.”
“그….”
마리아가 찻잔을 받아 든 채 망설이자 나는 차를 새로 따라 그녀앞에서 보란 듯이 한 모금 마셨다.
“됐니?”
“의심해서 죄송해요.”
마리아는 머쓱한 표정으로 어색히 웃다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 참 맛있네요! 그러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찻잔을 떨구더니 천천히 소파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