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이럴 때는 내 몸에 약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이 참 편했다.
나는 어느새 돌아와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플뢰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죄송합니다. 상단주님이 아가씨를 찾으셔서 대신 가서 말씀드리느라.….”
"네 실수는 묻지 않을게. 대신 지금부터 저택에 아주 비밀스러운 손님이 머무를 거야. 밖으로 세어 나가지 않게 조심해 주렴."
쓰러진 마리아를 게스트룸에 보내자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저택에 갑작스러운 손님을 두게 되었으니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지.
'결국, 이 소원을 빌게 되는구나.'
엄마에게 너무 미안한 소원인지라 애써 미루고 미뤘으나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낭떠러지 앞에 간신히 서 있는 기분을 가까스로 떨쳐 내며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위태로운 표정을 다잡고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긴장감에 부푼 가슴을 가라앉히고는 노크를 했다.
“엄마, 저예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들어오렴.”
허락의 말에 나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쉬고 계셨는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찻잔과 디저트가 보여 입가에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저씨가 찾아와 줘서 저렇게 챙겨 줬나 보네.'
아저씨가 없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소소한 생각에 미소를 짓다가 잡생각을 지우고서는 엄마의 앞에 앉았다.
“우리 아가가 무슨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날 찾아왔을까?”
“중요하게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요.”
나는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히도 나오는 목소리는 떨림이 없이 평온하였다.
“그래, 얘기해 보렴.”
엄마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내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저, 네 번째 소원을 쓰고 싶어요.”
“소원이라. 그래, 벌써 5년 만의 소원이구나. 이번에는 또 어떤 일을 벌일지 궁금해지는걸.”
엄마의 말에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내 말을 들은 엄마는 확실히 화를 낼 테지만 그럼에도 해야 했다.
“사실은 엄마가 알면 기가 막힐일을 하고 있어요.”
“기가 막힐 일이라면?"
“…저 에버하르트를 만난 뒤 따로 라몬트 숙부님을 찾아 만났어요.”
엄마의 눈빛에는 놀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얼추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기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두 숙부를 만나고서 확실하게 알았어요. 친엄마의 죽음에 얽힌 누명을요.”
요”
“그래. 망설이지 말고 마저 이야기해 보렴.”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나는 찡하고 아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엄마를 따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버하르트는 분에 넘치는 대가를 바랐고, 저는 그것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라몬트를 만나 보았고, 그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다 생각했어요.”
“반란을 돕겠다고 마음먹은 것이구나.”
엄마는 조용히 찻잔을 가져가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그 사이로 엄마의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엄마가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고 해도 반란에 얽힌 이상 저 반응이 정상이겠지.’
내 앞에선 두려움마저 감추는 그녀의 모습에 죄송한 마음이 앞섰지만 그럼에도 소원의 내용은 바꿀 수 없었다.
“사실 모든 일을 해결하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워낙 중대한 사안이니 지금 밝혀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근래 마탑과 연금탑이 활동을 자제한다던데 이와 관련이 있나 보구나.”
“잘 해결되면 협약을 새로 맺을 것 같아요.”
“그래. 너희들이 벌써 다 컸다는 게 실감이 나네.”
엄마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뿌듯해 보이기도 했고,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무얼 도와주길 원하는 거니?”
"아니요.”
엄마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지나갔다.
그렇기에 오롯이 내 욕심을 담아서 말했다.
“제가 하는 일이 잘못되어 문책당하게 되어도 저를 감싸 주지 마세요. 망설임 없이 저를 버리고 상단의 안위를 선택해 주세요."
*
"괜찮아?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언제 대화를 마치고 나왔더라.
나는 문 앞에 서 있다가 멍한 시선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라그나르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보자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지어졌다.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찾으러 왔는데.”
라그나르의 옆에서 악셀리우스역시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긴장이 풀리니 표정 관리를 하기가 어려웠다.
“있죠, 아저씨.”
“그래, 다프네.”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는지 악셀리우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엄마를 챙겨 주세요."
“다프네?”
“이건 아저씨와 저만의 약속이에.
요. 알겠죠?”
“다프네.”
악셀리우스가 몇 번이고 말을 이어 가려고 했으나 나는 지친 기색으로 그저 미소를 지었다.
악셀리우스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이 위험에 엄마를 얽히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나는 엄마의 괴로운 표정을 떠올리며 웃었다.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세요. 들어가서 위로 좀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래. 그러도록 하마.”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만일의 일을 대비해서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전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이다.
내 말에 악셀리우스는 슬픈 미소로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노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악셀리우스가 엄마를 감싸 주는 것이 보이다 이내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나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화냈어.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소원을 빌 수 있냐면서.”
“허락해 주셨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들어줄 수 없다면서 화를 내시고 날 내쫓아 버렸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실 거야.”
자신의 독한 면까지 닮을 필요는 없었다며 말리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게 네 욕심이냐면서 화를 내셨어. 어쨌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살아남는 것이 내 욕심이라면 들어주시겠지.”
엄마는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려 가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라그나르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나를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아주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콩콩뛰는 심장 소리에 불안하게 날뛰던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다프네, 네가 가정하는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알고 있어."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라그나르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고작 원하는 대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들 흔들려서는 안 되겠지.
그 누구 앞에서도 힘든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으나 라그나르의 앞에서는 조금 쯤 풀어지고 싶었다.
“고마워, 라라.”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거야."
라그나르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선명한 보랏빛 눈 안에 담긴 내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라그나르는 곧은 시선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얼마든지 나를 이용해 줘.”
* * *
엄마와의 냉전도 벌써 일주일째다.
엄마는 나와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대화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얼마나 섭섭한지, 그리고 또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알 수 있었기에 나는 오늘도 한숨을 쉴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반란군의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마탑과 연금탑의 지원이 있는지라 부족한 병사는 어느 정도 채워지는 것 같은데.'
에버하르트의 군대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주도권을 잡기에는 힘들어 보이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고위 귀족의 힘이 없다면 황제가 되어도 황권을 제대로 다잡을 수 있을까.'
허수아비 황제가 되는 것은 사양인데 말이지.
복잡한 마음을 애써 정리한 나는 어느새 도착한 방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앗, 오늘도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마리아를 향해 어이없는 시선을 아끼지 않았다.
“혹시 네 처지를 잊은 건가 싶을 정도로 해맑게 웃고 있구나.”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환히 웃고 있는 모습에 우습게도 잠시 걱정을 내려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안함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으나 티를 내지 않고는 준비해 온 식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와. 오늘도 맛있겠다."
일주일이나 지났음에도 답답해하는 구석 하나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 박수라도쳐 주고 싶은 정도였다.
'다행히 물자 공급도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고, 탑과의 협조도 잘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아직 방심하기는 이르나 일이 술술 풀려 마음이 조금 놓여서 그런 것일까.
나는 변덕을 부려 마리아와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갇혀 있는데 답답하지도 않니?"
평소라면 식사를 두고서 자리를 떠났을 내가 마주 보고 앉으니 마리아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는 하나도 안 답답해요!"
"마리아, 너라면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서 얼마든지 탈출을 했을 것 같았는데.”
내 말에 마리아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실 줄 몰랐어요.”
“칭찬으로 들렸다니 너도 참.”
대단하다면 대단한 아이였다.
내가 턱을 괴고서 피식 웃자 마리아가 수줍은 듯 자신의 속내를 천천히 꺼내었다.
“사실은 지금껏 살면서 자유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늘 보살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왠지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어요.”
“갇힌 느낌?”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마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정해진 틀 안에 갇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치 사랑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으음, 강요받는 느낌이 맞겠네요.”
"그래서? 불행하다 느껴졌니? 그게 고민이었어?”
아늑한 환경에서 사랑받는 인생이 불행이라 한다면 진짜 불쌍한 사람들의 불행은 어디서 호소해야 한단 말인가.
내 말을 들은 마리아의 표정이 흐려졌다.
마리아는 손을 마주 모은 채 꼼지락거리면서 조금 전보다 부끄러워했다.
“솔직히 불행한 인생은 아니었어요.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었죠.”
마리아는 지난날들을 떠올리는지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모두의 사랑을 받고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인생이 아니에요.”
“그럼?”
내 물음에 마리아는 고민 하나 없이 바로 답을 하였다.
“그걸 찾고 싶어서 가출해 버렸지 뭐예요.”
“가출이라.”
마리아의 속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까.
왜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의 표정에는 거짓말이 섞여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스왈드에 와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마냥 저를 보살펴 주는 세상에서 벗어나 제가 직접 세상을 직면할 기회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요.”
마리아는 부끄럽다는 듯 뺨을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던전에 가고 싶다 가볍게 나섰던 것은 후회하고 있어요.
아직도 자다가 떠오르면 부끄러워서 이불을 뻥뻥 찬다니까요!"
애써 활기차게 이야기를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뺨이 얼마나 창피한 기억을 떠올려주는지 알고 있었다.
참으로 솔직한 모습이었다.
"너도 참 대단한 아이구나."
칭찬이 아니었음에도 마리아는 뭐가 좋은지 그저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멈추자 어색하게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혹시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