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갇혀 있는 내내 요구한 것 하나 없었기에, 그리고 빠져나갈 생각도 보이지 않았기에 과연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말해 보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마리아는 긴장에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일주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랄마리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을 주절거렸다.
“솔직히 갇혀 있는 동안 너무 좋았어요! 베네디토의 게스트룸은 정말로 뛰어났다고요! 식사도 완벽했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마리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일상이 얼마나 행복 했는지 나열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갇혀 있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기분인걸요! 평생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로!”
"안돼"
단호한 내 대답에 마리아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불쌍한 척해도 안 돼."
“너무해요. 전 정말로 아쉬워하고 있는 건데.”
"내가 네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마리아를 향해 한심한 시선을 던졌다.
“정신 좀 차리라고 하고 싶어.”
"너무해요.”
마리아의 토라진 얼굴에선 귀족의 오만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그 나이의 평범한 소녀처럼 순진하기만 했다.
아니, 귀족 사회를 모르고 자란 평민 아이도 저렇게 순수하진 못할 것이다.
“네 가족이 찾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나 보네."
“사실 정령을 통해 편지를 보냈어요. 당분간 찾지 말아 달라고 말이죠.”
“대단하구나. 예상대로 몰래 연락도 할 수 있으면서 빠져나가지는 않았다니 놀라운걸.”
“여기가 좋은걸요.”
“정말 청순한 뇌야.”
"네?"
다행히도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몰래 편지도 보낼 수 있으면서 도망치진 않았다니 정말로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 없다는 것 같은데,
'저택을 조금 돌아다니게 해 줄까.'
어차피 곧 이루어질 전장에 마리아가 나설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고,저택을 빠져나가지만 않는다면 감시하에 방을 나서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줄까 생각하는 찰나.
“그래서 말인데요. 이게 진짜 본론인데요. 혹시 제가 선배님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요?”
“뭐?”
“반란에 제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몰래 정보를 나른다.
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이걸 위해서 얌전히 있었던 모양이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집어치 우렴.”
“하지만 저 분명히 도움이 될 텐데요!”
“아무리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도 널 끌어들일 일은 없을 거야.”
이런 쓸데없는 말을 계속한다면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이만 돌아갈 것을 짐작했는지 마리아가 황급히 내 손목을 붙잡았다.
“돕게 해 주세요! 저 진짜 잘할 게요! 완전 잘할게요!"
“안 된다고 했어.”
“저도 선배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단 말이에요!"
“떼쓰지 마. 그건 다른 곳에 가서 증명해도 충분하니까.”
나는 마리아를 떨쳐 내려고 했으나 그녀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마리아의 억척스러운 손길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소파에 쓰러지듯 털썩 앉고 말았다.
마리아가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서로 얼굴을 바싹 마주 대고 있자니 어쩐지 조금 전과 자세가 반대가 되었다는 생각에 묘해졌다.
그리고 마리아가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갑자기 열리는 문에 우리는 동시에 문밖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라그나르가 가만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친해졌네.”
라그나르의 단조로운 어조에 마리아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죠?"
“아니야.”
다 마리아가 놔주지 않은 탓이라 말하려고 하는데 라그나르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소란스러워 들어온 거였는데 내가 방해한 모양이야."
그 말과 함께 라그나르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언뜻 내뱉는 목소리가 짜증에 가득 찬 것 같았는데.
나는 멍한 눈으로 닫혀 버린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라그나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어이없는 감정을 추스르면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갈 시간인지라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마리아의 상태가 조금 전과 달랐다.
분홍빛으로 상기된 볼과 열기가 담긴 눈빛은 나와 마찬가지로 라그나르가 나간 문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호감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미묘하게 느껴지는 불쾌감에 마리아가 방심한 틈을 타 옷자락을 거칠게 털어 냈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마리아가 깜짝 놀란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마리아를 보자 비소가 지어지는 것은 왜일까.
“라그나르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던데. 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기라도 했니?"
"아, 아닙니다.”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네 나이에야 누구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데.”
어차피 라그나르는 널 좋아할 리가 없을 테지만.
라그나르가 분명히 내게 그럴 리가 없다고 했는걸.
속마음을 감춘 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스스로가 추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부끄러워 말을 거두려는 찰나 마리아가 놀란 얼굴로 황급히 외쳤다.
“그,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잘생겼다고 생각한 정도지 좋아한다거나 그런 감정이 아니에요!"
어찌나 급했는지 필사적으로 크게 외치는 바람에 나는 귀를 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리아는 당황함을 숨기지 않고 다시금 외쳤다.
“저, 저는 다른 사람의 연인을 좋아한다거나, 탐낸다거나 그러지 않아요!”
마리아의 급작스러운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연인?”
'라그나르와 내가?'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말이기에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라그나르 씨랑 연인…
아니세요?”
나는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사랑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는 행복한 표정.
누가 보아도 마리아는 라그나르에게 호감 그 이상의 감정이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짜증 나.'
나도 모르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맞아.”
내 대답을 들은 마리아가 아쉬움반, 기쁨 반 섞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왜 짜증이 나는 거지?'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아는 부끄러움에 볼을 붉게 붉히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두 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소중히 여기기도 하고, 참 예쁜 커플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다말고 마리아가 자신의 뺨을 내려쳤다.
“아이참! 저는 왜 이렇게 주책을 부린 거죠! 결론을 말하자면 저는 정말로 라그나르 씨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마리아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덧붙이며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냥 외모가 멋져서 눈길이 가는 정도, 딱 그 정도예요! 솔직히 잘생겼잖아요!”
“그래. 잘생기기는 했지."
나는 떨떠름한 마음을 삼키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리아여서, 더 불쾌했을까.'
조금 전의 짜증은 무엇이었을까.
영문도 모른 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다가 마리아의 시선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전 정말로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믿어 주세요!"
억울함을 피력하는 그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말이 마리아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하고, 또 안타깝게 느껴졌다.
'과연 네가 진실을 알아도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입가에 맴도는 말이 있었으나 차마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
그날 이후 마리아가 저택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락해 주었다.
마리아는 악셀리우스를 보더니 처음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이곳에 있다.
는 비밀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해 마음을 편히 먹은 지도 벌써 오래전이다.
혹시 모를 주변의 시선을 피해 직접 하녀복을 찾아 입고는 하녀행세를 하는 모습을 엄마도 기가 막혀 했었다.
나 역시 어이가 없어 그녀를 만류했으나 해맑게 웃으며 들키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하기는 모습에 포기했다.
저런 호탕하면서도 멍청한 성격을 갖고 있어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름 평화로운 일상 반복되는 와중에도 엄마는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마치 큰 사건을 앞두고 폭풍의 눈 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이른 새벽부터 급한 편지가 도착했다.
'뭐지?'
내 앞으로 온 편지에 의문을 가지고 펼쳐 보는데 익숙한 글씨체가 보였다.
[미안해. 모든 일은 없던 것으로 하자.]
발신인은 카롤리나였다.
나는 전보를 받아 든 채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어째서?"
혹시 공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라몬트와 연결된 아티팩트에서 나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프네. 이른 시간인데 혹시 깨어 있을지 모르겠구나.
나는 급한 몸짓으로 아티팩트를 쥐었다.
"네
“네. 듣고 있어요.”
-주둔지 근처로 정찰 온 부대를 발견했어. 가만히 두었다가는 위치가 들통날 위험이 있는지라 새벽에 급하게 기습하는 일이 있었다고 말해 주려고 연락했단다.
이어지는 설명에 내 시선이 손에 쥔 편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혹시 부대의 총책임자를 붙잡았나요?”
- 애석하게도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어지는 설명에 나는 입술을 꽉깨물었다.
아무래도 상황은 내가 원하는 대로 쉽게 흘러가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혹시 그 총 책임자가 나이가 어리지 않았나요?"
-어떻게 알았지? 이제 갓 아카데미를 졸업할 아이처럼 보였다.
지휘하는 것도 어설픈 자였어.
라몬트의 설명에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고는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아무래도 총 책임자는 글렌 공작인 것 같네요.”
-글렌 공작이라고? 그 어린아이가?
"부대의 책임자에 오르기 위해서 조금 이르게 작위를 계승받았다고 들었어요.”
-그럼 형님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의 수장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겠구나.
라몬트의 목소리에 나는 굳어 있는 머리를 팽팽히 돌렸다.
“그가 죽었나요?"
-꽤 치명상을 입었다. 다리를 다쳤으니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텐데.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걸 보면 어디선가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설마…..'
렉시우스가 죽지 않고 아티팩트를 사용해서 새벽에 급히 홀로 도망친 것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