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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5화 (124/185)

제125화.

렉시우스 때문이었다면 카롤리나가 갑작스럽게 없던 일로 하자는 내용의 전보를 보낸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이걸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내가 잠시 말이 없자 건너편에서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은 건가? 혹시 공작과는 사이라도 된다거나….

“알기는 알지요. 그것보다 라몬트, 아무래도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는 것만 같지는 않아요."

-뭐?

“고위 귀족들의 지지도 필요하다.

고 했죠? 잘하면 글렌 공작가를 끌어들일 수도 있겠어요.”

-어떻게?

라몬트의 놀란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근처에서 라몬트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결하고 따로 연락할게요. 부디 오늘 하루도 행운이 가득한 하루가 되시기를.”

-…그래. 알겠다. 오늘 하루도 네게 신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라몬트와의 연락은 거기서 끝이었다.

'신의 은총이라.'

만약에 렉시우스가 공작가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할 일이 엉망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분명히 돌아왔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 카롤리 나가 이런 서신을 보냈을 리가 없어..'

서신의 내용을 보았을 때 카롤리 나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해 보여 더욱 마음이 쓰였다.

'이렇게 빨리 써 버릴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된 이상 글렌 공작가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

정찰 중 갑작스러운 기습과 부대원을 두고 사라진 공작.

내통자로 의심받을 만한 상황이니 공작가에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작가에 회유가 될지 모르겠다만 도박을 해 봐야겠지.'

나는 급히 나갈 채비를 하며 밖에 있는 플뢰르를 찾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라그나르였다.

"라그나르?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해?”

“산책하고 있었어. 우연히 네 방의 불이 켜진 걸 보고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돼서 찾아와 본 건데.”

라그나르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마지막 결전이 터질 수 있었기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럴수록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겠지.

나는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할 작정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서 글렌공작가로 갈까 해. 같이 가 줄래?"

"네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내가 따라간다고 했잖아.”

당연하다는 듯 꺼내는 말은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입가에 결연한 미소를 짓다가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자가 누가 있을지를 떠올렸다.

'달갑지는 않지만,'

지금껏 자신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마리아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상처가 크다고 하니 치료사가 옆에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되겠지.'

걱정이 되기는 하였으나 전쟁터로 나가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일거리를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급히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만, 마리아도 데려가자.”

나름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라그나르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왜 그래?"

“꼭 그 여자를 데려가야 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할 수 있을 텐데.”

어쩐지 목소리가 시무룩하게 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하지만 정정할 것은 바르게 정정해 주어야 했다.

“마리아를 그 저택에 두고 나올건데. 그 자리를 네가 지키겠다.

고?”

“두고 나올 거라고?"

"아무래도 글렌 공작이 전쟁터에서 몰래 돌아온 것 같아서. 치료사가 필요할 게 분명하거든.”

라그나르도 결코 마리아보다 부족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런 저택에 그를 두고 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글렌 공작가에 머물고 싶지 않은 건 라그나르 또한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구겨져 있던 표정이 활짝 펴져 있었다.

“아니야. 데려가자. 그리고 거기에 두고 오자.”

"어째 조금 신나 보이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야?"

“매일 네 옆에 달라붙어서 귀찮게 하는 거 보기 싫었어. 잘됐네.”

솔직한 발언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는데 오히려 라그나르가 나를 재촉했다.

근래 들어 보았던 모습 중 가장 즐거워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 * *

“공작가의 초대 없인 누구도 들일 수 없다. 어디를 함부로 들어오려 하는 것이지? 고귀한 공작가의 명예에 누를 끼칠 셈인가."

예상은 했지만, 들어가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글렌 공녀님의 친구이자 그녀의 급한 연락을 받고서 찾아온 손님이야.”

목석같은 경비들을 무력으로 뚫고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강제로 들어가면 대화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긴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전해만 주게."

“안 된다고 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것도 모자라 나를 무시하는 억양이 가득한 말투였다.

그러자 플뢰르는 참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내 주군을 모욕했으니 검을 뽑아도 합당할 것 같은데."

플뢰르는 눈빛을 서늘히 빛내며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경비 또한 경계하며 검을 뽑으려는 찰나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목을 하나 베면 대답이 바뀌지 않을까.”

“사람을 죽이겠단 말을 쉽게도 하는 구나?"

플뢰르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타박하였으나 이미 검을 뽑아 든 사람이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잠시만요. 강압적인 방법은 옳지 않아요!”

졸음에 잠겨 있던 마리아가 깜짝놀라 두 사람을 말리고자 나섰으나 그다지 큰 효력은 없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도중에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머리를 깔끔히 넘긴 중년의 집사가 나와 주변을 살피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베네디토에서 오셨습니까?”

“예. 영애의 편지를 받고서 무례를 무릅쓰고 급히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애석하게도 공녀님께서는 만날수 없으니 돌아가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의 딱딱한 말에 내가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물었다.

“공녀님께서요?”

“예, 공녀님께서요."

"흐음.”

협박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나.

나는 집사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새벽 중에 갑자기 나타난 공작님께서 내린 명령이 아니고요?"

내 말에 집사가 뒷걸음질 치며 화들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놀라 크게 뜨여진 눈과 갑자기 흐르는 식은땀을 보며 내가 예상한 것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제 입을 봉하고 싶으시다면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 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 말에 집사의 두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나는 입가를 가리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네요. 제가 디미트리 후작가와 친하다는 사실을 말이죠.”

디미트리 후작가가 신문사를 운영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했다.

집사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제가 공작가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다음으로 향할 목적지는 제 친애하는 후배가 있는 후작가일 겁니다.”

내가 입만 벙긋하다면 아무리 늦어도 오후 중에는 글렌 공작이 전쟁터에서 홀로 도망쳤다는 사실이 대서특필되어 전국에 떠돌 것이다.

글렌 공작가의 명예가 땅바닥에 추락할 수 있기에 결국 집사는 나를 공작저 안으로 들이는 것을 선택하였다.

공작저로 들어서자마자 어두운 침묵에 잠겨 있는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함 속에 이물질처럼 섞인 죽음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공녀님은 어디에 있죠?"

“방에 계십니다. 다만 아무도 만나기를 원치 않으셔서….”

집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카롤리나의 방 앞에는 그녀의 하녀뿐만 아니라 호화로운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선대 공작 부부였다.

그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부드럽게 회유하기도 하며 카롤리나 방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카롤리나! 이 일을 해결해야 하는 네가 그렇게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어찌하란 말이냐!"

"카롤리나! 난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어서 나와 공작 대리로서 그 의무를 수행해야지!"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방문 앞에 도착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카롤리나의 문은 열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지켜만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전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모르는 데 시간 낭비를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제가 문을 열 테니 비켜 주세요.”

"누구… 너, 너는!"

로브를 벗은 내 얼굴을 보자 선대 공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려는 것에 나는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제가 문을 열테니 뒤로 물러나 주세요.”

“네가 감히 어떻게 여기를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나가!

내 아들을 전쟁터로 내민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화를 아끼지 않는 것에 미간을 찌푸리 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

선대 공작 부부는 놀란 기색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무어라 말을 해보았으나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프네. 이제 들어가자."

아무래도 라그나르가 조치한 모양이었다.

뒤는 맡기라는 믿음직한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저예요. 다프네.”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지? 분명히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아무도 들이지 않고 저만 들어갈 테니 문을 좀 열어 주시겠어요?”

한참이고 미동도 하지 않던 문이 잠시 후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자 문 앞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에 놀라움이 담겼다.

나는 그들이 들어오려는 것을 막으며 라그나르와 플뢰르에게 말했다.

“문 앞을 잘 지켜 줘."

그 말이면 충분했고, 두 사람은 내가 들어가자마자 문을 확실하게 닫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문에 막 혀 사라진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어 준 카롤리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넘치는 눈물을 참지 않고 흘려 내는 중이었다.

“모두 끝났다고 했는데 왜 왔어.”

"공녀님께서 이러고 계실까 봐요.”

내 말에 카롤리나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터트렸다.

“모두 끝났어. 오라버니는 죽거나 평생 불편한 몸을 안고 살아갈 테고 그런 그를 대신해서 내가 공작가를 책임지게 될 거야.”

카롤리나의 눈에 맺힌 슬픔과 절 망은 참으로 깊어 내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난 네 생각보다 독한 사람이 아니야. 결국, 멍청하게 내 가족을 위해서 나 스스로를 버리는 것을 택하게 되겠지.”

카롤리나는 눈물이 번진 눈으로 슬프게 웃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무섭다고 해서 가족을 버릴 수가 없는걸. 난 그저… 아니. 아니야. 내가 포기하면 되는 일이잖아.”

그저 지금처럼만 살면 된다고 카롤리나는 애써 자신에게 위안을 던졌다.

울먹이는 소리에 섞인 말은 마치 자신을 붙잡아 달라는 듯 서글프게 짝이 없었다.

“제가 연금탑의 초대권을 드린건 공녀님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서였어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언제 또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야? 내가 포기하는 게 맞아!”

그래, 카롤리나가 독하게 행동하지 못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래서 천천히 그 마음을 해소해 주고 싶었던 것인데.

카롤리나는 다시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 가련한 모습을 보자, 그녀를 정해진 흐름대로 끌고 가려는 운명이 느껴져 한순간 불쾌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꼭 카롤리나가 독해질 필요는 없죠. 걱정하지 말아요.”

갑작스러운 호칭의 변화에 카롤리나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악녀의 운명? 웃기는 소리지.'

이딴 운명 부숴 버리면 그만이다.

절망에 찬 악녀를 정해진 운명에서 꺼내 주리라.

나는 허리를 숙여 절망에 빠진 카롤리나를 향해 어느 때보다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한 것은 나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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