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카롤리나는 눈물이 번진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기가 없던 눈에 천천히 빛이 스며들더니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지어졌다.
눈가에 가득 담긴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푸스스 웃음이 지어졌다.
"이상해. 네게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것 같아. 정말 불가능한 일인데 뭐든지 해낼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지켜봐 주세요.”
그 말에 카롤리나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니?"
“우선 공작님을 뵈야겠어요.”
“그래. 원치 않는 자리지만 잠시 어울려 줄 수밖에 없겠네.”
문 위에 손을 올린 카롤리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돌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억울한 듯 입을 뻐끔거리는 전대 공작 부부가 보였음에도 카롤리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두 분께서는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나머지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서 할 일들 해.”
“카, 카롤리나 아가씨."
집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카롤리나는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내게 말했다.
"따라와. 오라버니께 안내해 줄게.”
"아가씨!”
카롤리나의 말에 주변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전대 공작 부부 또한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막으려고 했으나 카롤리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공작 대리로서 하는 일을 막으실 생각이신가요?”
그 말이면 충분했다.
선대 공작은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카롤리나를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더는 누구도 카롤리나의 앞을 막지 않았다.
* * *
화려한 방 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 위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오라버니가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의식이 있었는데 그 후로 계속 혼몽한 상태야.”
가까이 다가간 렉시우스의 모습은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위중한 상처는 급히 치료했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으십니다. 특히 다리의 부상이 심각하십니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의사는 그 말을 마친 뒤 카롤리나의 명에 의해 방을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카롤리나, 렉시우스 그리고 마리아만이 남았다.
"맙소사. 온몸에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려요.”
성한 곳을 찾기 힘든 모습을 보고 마리아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이 아이는 왜 데려온 거야?”
카롤리나는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가 의식되는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이러한 일에 별 관련 없어 보이는 타국의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달갑지는 않겠지.
“마리아. 네가 지닌 물의 정령의 힘이 대단하다고 했었지.”
"네! 클레멘스에서는 제일이에요!"
하지만 마리아의 힘이라면 렉시우스를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데려온 것이었다.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할 일은 공작님을 깨어나게 하는 거야.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부상이 심각하신 것 같은데…
노력은 해 볼게요!”
마리아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렉시우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마리아의 손에서 곧 물방울이 통통 튀어나오더니 부드러운 물줄기가 렉시우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으윽.”
마리아의 힘이 닿자 렉시우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잠시 후 서서히 눈을 뜨는 것이 보였다.
"마리아, 그만.”
대화를 나눌 정도면 충분하기에 치료를 멈추게 하자 마리아는 눈에 띄게 아쉬워하며 손을 거두었다.
렉시우스는 무거운 눈을 깜빡이면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가늘게 열리던 눈이 놀라움에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작님.”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렉시우스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 꼴을 비웃으러 왔나?”
"비웃을 작정이었다면 치유사를 끌고 오지 않았겠죠.”
“치유사?"
렉시우스의 눈이 도르륵 하고 구르더니 로브를 쓰고 있는 마리아에게로 향했다.
아직 마리아를 알아보지 못한 듯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빛에 그와 눈을 마주치기 편하도록 한쪽에 준비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반란군의 갑작스러운 기습에 홀로 도망치셨다고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렉시우스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상황이 제 예상보다 너무 심각해졌어요. 저는 모두가 혼비백산한 틈을 타 아티팩트를 사용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죠.”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렉시우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네가! 네가 반란군을 도와주고 있던 것이냐!"
렉시우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흥분하지 마세요. 아직 상처가다 나은 것도 아니신데.”
“네가, 어떻게 네가! 감히 타국의 사람이 내란에 끼어들어!"
내 말에도 렉시우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렉시우스는 한참이고 화를 토해내더니 내 옆에 서 있는 카롤리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카롤리나! 당장 이 계집애를 내 쫓지 않고 뭐해! 당장 내쫓아!"
“오라버니. 그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카롤리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카롤리나!”
렉시우스가 거칠게 소리를 질렀으나 카롤리나는 단호했다.
“오라버니께서 부대를 버려두고 홀로 도망쳤다는 사실은 이미 폐하께 전해졌을 거예요. 폐하께서 이를 용서해 주실 것 같나요? 그럴 리가 없죠!”
카롤리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두려운 듯 몸을 덜덜 떨었다.
“그래서, 그래서 이 여자의 손을 잡았다고? 공작가의 자제인 네가 어떻게!”
“목소리 낮추세요."
나는 카롤리나를 뒤로 물리고선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공작님의 예상이 맞아요. 저는 반란군에게 물자를 지원했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어요.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
“무슨….”
"반란군의 기습에 홀로 도망친 부대장이라니. 심지어 반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준 아티팩트를 사용해 도망쳤다?”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렉시우스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차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한 표정에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 현 황제가 반란군을 진 압한다면 결국 글렌 공작가도 반역죄로 몰락하게 되겠죠.”
"그, 그런.”
렉시우스가 말을 더듬으며 애써, 부정하려고 했으나 카롤리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권을 지키기 위해 보란 듯이 공작가 모두의 목을 베어 내겠죠.
공작가의 수장으로서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생각은 없으시겠죠?"
이것뿐만이 아니겠지.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공작님께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도망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 수 있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렉시우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새로운 황제의 지지 세력이 될 생각은 없으신가요?”
"......."
내 말에 렉시우스는 참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 한숨을 모른 척하며 말을 이어 갔다.
“라몬트 오스왈드의 지지 세력을 모으세요. 반란이 성공한 후 혼란한 정세를 가라앉힐 수 있도록 큰 도움이 되시라는 말이에요.”
“하, 하하.”
결국, 렉시우스는 거친 웃음을 토해 냈다.
기가 막혀 자연스레 터진 웃음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되돌아갈 길도 없으시잖아요?"
“내가 배신할 가능성은 계산하지 않았나 보지? 이 모든 것을 폐하께 가서 고한다면?"
“그러실 건가요?”
내 물음에 렉시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내 뜻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뱉은 말이었으나 쉽게 답할 수가 없을 터였다.
결국, 렉시우스는 내 손을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몸을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는데? 의사가 그리 말했다. 평생 다리가 불구가 되어 살지도 모른다고!”
렉시우스의 비통한 외침에 카롤리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도 처음 듣는 소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나요?"
“문제?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문제가 아니라고?"
그에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겪은 일을 난 일곱 살 때 겪었어요. 다리가 엉망이 되어 내 힘으로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뛸 수도 없었죠.”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싸늘하게 비소를 지었다.
내 사연을 처음 듣는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하지만 난 이제 걸을 수 있답니다. 내게 의지가 있으니 주변에서도 도와주었지요. 그리고 설사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면 어떤가요.”
렉시우스의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에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까짓 게 누군가의 가치를 정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신도 포기하지 마세요.”
채찍은 이 정도면 되었다.
슬슬 당근을 던져 주어도 좋을 것이다.
“불안해하지 마요. 공작님은 제가 실패하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날 믿어요. 살아남을 길을 만들어줄 테니까.”
렉시우스의 눈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우선 치유사를 당신의 옆에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는 타국의 신전에 연락하여 공작님의 치료를 부탁해 보죠.”
“.… 고맙다.”
“대신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카롤리나의 독립을 약속해 주세요.”
내 말에 카롤리나가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고, 렉시우스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마치 카롤리나에게 의견을 묻는 듯싶었고, 그녀 또한 느꼈는지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어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오라버니.”
“…그래. 약조한다.”
모든 대화가 끝나자 나는 품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내어 중지시켰다.
“모든 대화가 기록되었으니 확실하게 한배에 타게 되었군요. 배신은 죽음뿐이랍니다?”
내가 입가를 가리고 가볍게 웃자 긴장이 풀린 듯 렉시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독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최고의 칭찬이네요.”
나는 활짝 웃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답했다.
렉시우스가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미 대화는 끝이 났기에 더는 그에게 볼일이 없었다.
“마리아."
내 부름에 조용히 듣고 있던 마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렉시우스가 드디어 그녀의 정체를 알고서 놀란 듯 몸을 굳혔다.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표정 또한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로 굳어 있었다.
"이제 알았니? 네가 하고 싶다며 떼쓰던 이 일이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네.….”
자신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며 신이 나서 달려왔던 이른 새벽과는 확연히 반대되는 반응이었다.
"네 인생이 평탄하고 순조롭게만 흘러갔다고 했지? 이곳에서는 아닐 거야.”
"......."
“이곳에는 너를 지켜 줄 사람이 없어.”
마리아는 계속 답이 없었다.
"만약 모든 일이 실패하면 너를 지켜 줄 가족도 없고, 너를 보호해 줄 사람도 없으니 스스로를 지켜야겠지. 그뿐일까?”
마리아가 불안한 듯 입술을 잘근물었다.
“이곳의 황제는 폭군이라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반역을 도운 타국의 공녀라니. 공작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게 되겠지."
마리아가 떨리는 두 손을 꽉 주먹 쥐었다.
"평생 널 지켜 준 가족들이 너 때문에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는 뜻이야.”
나직한 노랫소리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말은 잔혹한 뜻을 품고 있었다.
마리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이대로 돌아가도 좋아. 일이 해결될 때까지 비밀을 지켜 준다면 가족의 품으로 보내 줄 거야.”
나는 딱딱하게 굳은 마리아의 어깨를 붙잡고, 두 눈을 마주친 채 물었다.
“그러니 물을게, 마리아. 여전히 네 뜻은 같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