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7화 (126/185)

제127화.

마리아는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긴장에 가득 찬 몸은 여전히 뻣뻣했고, 푹 숙인 얼굴은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네가 포기해도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어느 정도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다.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도록 운을 띄워 준 건데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요! 저 이곳에 남겠어요!

저는 제가 꺼낸 말에 책임을 지고 싶어요.”

“두렵지도 않니?”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 기억하시죠? 지금도 같은 마음이에요.”

마리아는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또박또박 말했다.

"두려워요.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듣고 사정도 아니 이대로 모른 척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네가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베네디토 상단이 들어서기 전까지 오스왈드가 많이 황폐했다는 말 정도는 저도 들은 적이 있어요.”

마리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모든 일이 실패하면 오스왈드는 폭군의 지배 아래로 떨어지겠죠.

그럼 많은 사람이 불행해질 거예요.”

마리아는 평소와 다른 의미로 눈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쓸데없이 나선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이상 물러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최대한 돕고 싶어요.”

이렇게까지 확고한 의지를 다졌다면 더는 말릴 수도 없겠지.

‘치유사를 새로 구하는 것도 번거롭고 말이야.'

나는 그리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뜻대로 해.”

너무 쉽게 허락이 나오자 오히려 마리아의 표정이 멍하니 변했다.

그러더니 로브를 휙 젖히고는 활짝 웃었다.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글렌 공작님께서 운신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잘 치료해 주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야 한단다."

굳이 답하지 않았음에도 마리아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카롤리나가 나를 배웅하려 황급히 빠져나왔으나 나는 그녀를 물렸다.

“조용히 빠져나갈게요.”

그렇게 마리아를 두고 글렌 공작가를 나왔을 때는 이미 아침 해가 쨍하게 떠오른 상태였다.

라그나르와 플뢰르의 표정이 조금 밝아 보였다.

“두 사람 표정이 좋네.”

“그 여자가 사라지고 나니 마음이 이리 편하네요."

“동의해."

플뢰르의 말에 라그나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오르기 전에 목적지를 말했다.

"디미트리 후작가로.”

* * *

“선배가 갑자기 찾아올 줄 몰랐어요.”

제롬이 나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어머니는 원래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싫어하시죠. 예의가 없다고요. 하지만 이렇게 반겨 주는 경우는 또 처음이네요."

“그러니?”

과연, 후작 부인이 내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제롬의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다행이군..'

나는 라그나르와 플뢰르를 밖에 세워 두고는 둘에게 작게 말했다.

“후작 부인 외에 아무도 들이면 안 돼.”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제롬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제롬의 수다가 끝날 때쯤 응접실의 문이 열렸고, 디미트리 후작부인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여전했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갈색 머리와 따뜻한 녹색 눈동자, 옅은 주름마저 그녀의 인자함을 돋보여 주고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다프네 양."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하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이리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편히 앉아요.”

나는 후작 부인의 말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평소와 달리 환하게 웃자 찻잔을 들던 후작 부인의 손이 흠칫 멎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는 천천히 차를 머금고는 말했다.

“그래서 다프네 양이 제롬이 아닌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후작 부인의 따뜻한 목소리에 나는 액자 속 엄마의 미소를 따라하며 다시금 웃었다.

“부인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어떤 거죠?”

후작 부인이 궁금증을 가진 눈빛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여쭤보아도 괜찮을까요?”

후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제롬에게 말했던, 저와 닮은 오래된 친우는 프레이르오스왈드가 맞나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후작부인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녀는 놀라 크게 떠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애써 웃었다.

“제롬이 그런 것까지 말했나요?

다프네 양의 입에 쉽게 오르내릴만한 여인이 아닐 텐데요.”

불쾌감이 설핏 물든 목소리와는 다르게 찻잔을 쥔 그녀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럼 다른 것을 묻죠. 부인께서는 프레이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계신가요?"

“뭘 묻는 거죠? 당연히 병으로.."

“부인. 저는 클레멘스 제국의 사람입니다. 제 앞에서 쓸데없이 거짓을 말씀하실 필요 없어요.”

내 말에 제롬이 놀란 듯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거짓이라니요? 분명히 폐하께서….”

하지만 제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후작 부인이 큰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부인께서 신문사를 책임진다는 것 정도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부인이 타국의 소식을 찾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후작 부인의 인자하던 얼굴에 분노가 서렸으나 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소중한 친구의 일이라면 더 그렇겠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내가 일부러 오보를 내었다고 그에 대한 책임이라도 묻고 싶은 것이냐?”

그녀의 떨리는 두 눈에는 명백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좀 어여쁘게 여겨줬더니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려 해!"

"아니요. 저는 부인께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부인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을 정정해 드리고자 찾아왔어요.”

“잘못?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지? 프레이르가 억지로 악녀로 몰려 첨탑에 갇혀 죽은 것이?"

후작 부인은 분노를 짓씹으며 기가 찬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말에 옆에 앉은 제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악녀라니…. 어머니 그게 무슨 소리….”

“프레이르에게 자식이 한 명 있다는 소식도 들어 보셨지요?”

제롬의 질문은 내 물음에 다시 묻혀 버렸다.

“그래, 들었지! 제 아비가 야멸차게 내친 그 가여운 아이가 보육원에서 불타 죽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는 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의 일을 뒤늦게 안 나는 친우의 자식마저 구해 줄 수 없었지. 비통했었다! 그래, 도대체 이것을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

흥분에 차 흐느끼는 후작 부인과다르게 제롬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새파랗게 질렸다.

“서, 설마….”

제롬은 눈치가 빨랐고, 내가 이러한 말을 꺼낸 이유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선배가 프레이르 황녀님의 딸…

인가요?”

제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던 조금 전이 거짓말인 것처럼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맞아."

짧고도 단호한 대답에 후작 부인의 눈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내게 멈추었다.

그녀의 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동요가 가득했다.

“친엄마가 죽은 다음 날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보육원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어.”

“저, 정말로….”

제롬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베네디토 상단으로 도망쳐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거짓말! 그 아이의 머리는 프레이르를 닮은 보라색이라 했어!"

“어릴 적 큰 충격을 받고 새하얗게 바랬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의 의심받지 않고 베네디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죠.”

후작 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제가 굳이 부인 앞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부인의 소중한 친우인 프레이르의 자식인척을 하면서?"

부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제 친어머니의 죄가 누명이라더군요. 저는 얼마 전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레이르에 대해 알고 있는 후작 부인은 프레이르의 억울함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어쩌면 좋아, 프레이르, 어쩌면!"

그녀의 울음 속에는 분노가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미안해, 프레이르! 황제의 협박이 무서워서 그런 기사를 썼어.

그 편이 네 명예에 더 나을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어! 정말…

미안해….”

후작 부인의 말은 눈물에 묻혀 흐려졌다.

그녀는 마치 프레이르에게 하듯 내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죄악감을 털어놓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부인.”

내 부름에 후작 부인은 눈물이 가득히 차오른 눈으로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갑게 벼려진 내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부인이 원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제 친어머니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

“애초에 잘못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지 않나요? 그자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는데 부인께서 이리 눈물을 보이시다니.”

나는 힘겹게 웃었다.

“부인. 저는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습니다.”

"바로잡는다니?”

“사람들 앞에서 제 친어머니의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찾아 밝힐 것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묵인한 자들을 모두 밝혀 낼 것입니다."

후작 부인의 두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제 친어머니에게 죄를 진 것은 제 외숙인 에버하르트 황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공작가를 방문한 뒤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반란이 성공하고, 귀족가의 세력을 얻는다 한들 민심이 혼란스럽다면 안 될 테니까.

얼마 전에 제롬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후작 부인을 따로 찾아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아, 아아.”

후작 부인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네가 황제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분명 황제는 네 정체를 알고 나면 죽이려 들 텐데!"

“그가 황제가 아니라면 그럴 수 없겠죠.”

내 말에 두 사람이 경악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반란군의 수장인 레몬트오스왈드가 황제의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폭군인 에버하르트보다는 말이죠.”

“선배!”

제롬이 필사적으로 내 말을 막으려 했으나 내 입은 멈추지 않았다.

“권력에만 집착하는 에버하르트와는 달리 라몬트는 힘든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먼저 배려했다는 것 정도는 쉬쉬할 뿐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부인의 표정은 여전히 창백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성들의 안위가 우선인 자가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그 누가 황좌에 어울릴까요?"

내 말에 후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의 폭정을 신문에 실으라는 거구나. 반란군과 비교되도록 말이야.”

정답이었다.

내 단호한 표정에 부인은 흐느끼며 제 얼굴을 감싸고는 말했다.

“감히, 내가 무슨 자격이 되어서 그런 짓을 하겠니.”

“자격이 없다니요.”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후작 부인은 내 친어머니에게 속죄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부인께서는 제 친어머니의 친우이자, 오스왈드의 귀족이며, 오스왈드를 대표하는 신문사의 수장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

“이 일이야말로 부인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주 바람직한 방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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