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8화 (127/185)

제128화.

디미트리 후작 부인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는 마침내 긍정의 표현을 꺼내었다.

“적어도 이걸로 죽어서 프레이르의 얼굴을 볼 수는 있겠구나.”

그 모습은 참으로 위태로워 보였으나 후작 부인의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이면 충분하였기에 나 또한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부디 조심하렴."

이런 상황에서도 내 걱정을 해주는 따스한 염려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어서 오늘의 일을 라몬트에게 전할 생각에 라그나르와 플뢰르를 이끌고 빠르게 걷는데 뒤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선배, 잠시만요!"

제롬의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오더니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 또한 가만히 응시하자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말했죠. 선배는 정말 무슨 큰일을 터트릴 것 같다고요. 이래서 사람이 말조심을 해야 하나 봐요.”

나는 얼마 전 카페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에 후작가에 도움을 요청할 방법을 떠올렸어. 고마워, 제 롬.”

“정말 그때 떠올리신 건가요?"

"응. 후작 부인의 친우와 내가 닮았다고 한 말 덕이야.”

“선배가 그렇다면 정말 그런 거겠죠.”

제롬은 살짝 표정을 굳히더니 그럼 됐다며 다시 평소처럼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선배를 도울게요."

“후작 부인을 돕도록 해.”

"당연하죠.”

신이 난 제롬은 더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다프네.”

하지만 갑작스러운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뚝 하고 말을 멈추었다.

“응?”

“얼른 돌아가야 하지 않아?"

"아아. 그렇지. 미안해, 제롬. 나머지 대화는 후에 하도록 하자.”

제롬은 라그나르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나를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화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나서 해도 충분하니까요."

“그래. 그럼 이만 갈게. 배웅은 괜찮아.”

제롬은 퍽 아쉬워 보였으나 뒤따라오진 않았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놀려 빠르게 후작가를 벗어났다.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라그나르의 뚱한 표정이 보였다.

"라그나로,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걸?"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보았던 토라진 표정에 가까워 보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속이 좁아서 그래.”

“속이 좁다고?”

자꾸만 이어지는 되물음에 라그나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속이 좁기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어쩐지 침울해 보이는 표정이 마음에 걸려 익숙하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살짝 웃는데 어느새 라그나르의 얼굴에서도 우울함이 가셨다.

“정말? 내가 속이 좁다고 두고 혼자 다니거나 그러진 않을 거지?"

"내 옆에 있어 줄 거라고 했었잖아."

“응. 맞아.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라그나르의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라그나르는 눈을 감고서 내 손에 머리를 기대었고, 나 또한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라 푸스스 웃었다.

**

어두운 창문 밖을 바라보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락이 되지 않아."

글렌 공작가와 디미트리 후작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는데 이 일을 알아야 할 라몬트 쪽이 연락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오빠들도 연락이 되지 않고,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괜찮을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듯이 말해도 불안함에 요동치는 가슴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손톱을 물어뜯으려는 때에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라그나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라그나르가 엉망이 된 내 손톱을 감싸고는 꼭 쥐었다.

"미안해. 노크했는데 반응이 없어서 혹시 무슨 일인가 싶어서 들어왔어.”

"아냐.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 무슨 일이야?"

"혼자 있으면 불안해할 것 같아서 옆에 있으려고 했어."

라그나르가 나를 이끌고서 한쪽에 있는 소파에 함께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 쉬어.”

“쉴 수가 없어. 라몬트랑 연락이 되지 않아.”

"한창 전시 중이니 바쁠 수도 있잖아.”

라그나르가 안심시키려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불안해서 진정이 되지가 않아.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확인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방법이 도무지 없다고 중얼거리 는데 라그나르는 조금 황당한 듯 내게 말했다.

“다프네. 가끔 생각하는 건데 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잊는 것 같아."

"응?"

“방법이 없긴 왜 없어."

라그나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헝클어진 내 머리를 귀 뒤로 천천히 넘겨 주었다.

사륵하고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귓가에 닿는 손이 차가워 움찔 떨자 그가 작게 웃었다.

"내가 확인하고 올게. 그러면 되지 않아?”

“네가?"

나는 그제야 라그나르의 정체를 상기했다.

"내가 드래곤인 걸 정말로 잊고 있었던 거야?”

“잊은 건 아니지만, 그냥….”

라그나르를 위험한 상황에 보내고 싶지 않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어색히 눈을 돌리자 라그나르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얼른 다녀올 테니까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줘."

“괜찮겠어?”

"물론이지. 대신 플뢰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해.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게.”

라그나르의 당부에 나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대로 라그나르를 기다릴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현재의 나는 무장을 한 기사와 마차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반나절 전으로 흘러가야 했다.

늦은 밤중 라그나르가 전쟁터의상황을 보기 위해 떠났고,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라몬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침이 되어도 아티팩트는 울리지 않았다.

아픈 머리를 붙잡으며 조금이라도 쉬려는 찰나 갑자기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장한 기사가 황제가 보낸 전보를 들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전보에는 전쟁 물자를 지원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보태라는 명령이 있었다.

결국, 나는 쉬지도 못한 채 아침부터 있는 물자 없는 물자를 모두 챙겨 주둔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게 된 것이다.

'갑자기 왜 나를 불렀을까?'

나를 감시하는 것이 목적일 호위기사 때문에 플뢰르조차 곁에 두지 못하고 마차 밖에 있도록 해야 했다.

불안함을 애써 가라앉히며 잠시 눈을 붙였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자를 정리한다는 핑계를 대며 천천히 가고 싶었으나 기사의 완강한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멀리서 보아도 다른 천막들과 구분되는 거대한 천막은 누가 보아도 황제가 머무르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며 기사의 안내에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존귀하신 오스왈드의 태양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오느라 수고했다.”

에버하르트는 나름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인사를 받았다.

“갑자기 이런 연락을 해서 놀랐겠군. 내 생각보다 반란 진압이길어질 듯싶어서 말이야.”

“언제나 황실을 위해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문제없었습니다.”

“그래.”

에버하르트는 짧게 대답하고서는 한참이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 생각보다 반란군의 위세가 거칠더구나. 분명 힘없이 쓰러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그래 봤자 결국 폐하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될 자들입니다."

내 말에 에버하르트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다는 웃음이었다.

“사실은 매우 놀란 상태야. 도대체 어떻게 라몬트가 아직도 그러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이 아닌지라 입을 다물었다.

에버하르트도 내 대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닌지 홀로 말을 이어갔다.

“어젯밤 글렌 공작의 부대가 시찰을 나간 도중 기습을 당했다."

“…공작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찾을 수가 없다더군. 마치 도망이라도 간 것처럼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된다는 듯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망갔다면 다시 잡아 오면 그만이라지만 그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야 말이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에버하르트의 꽉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렉시우스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분이 나서일까?

“그것 아나?"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자 에버하르트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주 오랜 시절부터 오스왈드는 산맥이 험하고, 농사짓기가 어려워 사냥꾼이 많았지.”

“예. 그래서 오스왈드의 사람들이 사냥을 취미로 즐긴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이것도 아느냐? 초대 황제가 아주 훌륭한 사냥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역사서를 읽다 보면 알 수 있기에 그렇다 답하니 에버하르트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스왈드의 황실에는 그의 피가 흐른다. 초대 황제의 사냥 실력에 감탄한 신께서 대대손손 그 능력이 이어지기를 바랐거든.”

처음 듣는 소리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평범한 이들과 다르게 오감이 뛰어나게 발달하고, 무기를 다루는 실력이 출중하며, 한 번 노린 사냥감은 절대로 놓치지 않고 반드시 잡아내고 말지.”

에버하르트의 말에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폐하께서 그러한 능력을 지니셨다는 겁니까?”

“그래!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피가 옅어졌으나 사라지지는 않았지. 내게 나타났다."

자부심이 넘치는 말투에 훌륭하다 칭찬하려는데 그가 휙 내 턱을 잡아 올렸다.

“그래서 말이야.”

조금 전의 흥분한 듯한 목소리와 다르게 에버하르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너를 보면 참으로 기분이 나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꾸만 샘솟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사냥꾼의 감이 말하고 있어. 너를 살려 두면 안 된다고 말이야."

"폐하.”

내 다급한 목소리에 에버하르트가 입가에 씨익하고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당당한 웃음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니 말해라. 도대체 네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이지? 네 정체는 무엇이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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