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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29화 (128/185)

제129화.

에버하르트의 거센 물음에 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저는 베네디토 상단의 후계자, 다프네 베네디토입니다. 어찌하여 제가 불안하십니까?”

나는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글렌 공작과 다릅니다. 제가 모시기로 한 주군을 배신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 말에 에버하르트의 두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

직감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내 말을 믿을 것인지 계산을 하는 것 같이 보였다.

"폐하.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믿어 달라?"

"예. 고작 상인인 제가 어찌 폐하께 위협이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에버하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내 말에 흔들리는 듯했다.

나는 그가 말이 없는 틈을 타 복잡한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했다.

‘어쩐지. 처음 활을 잡았을 때의 느낌이 이상하더라니 했었지.'

유독 오감이 좋았고, 어떤 무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특기가 활이어서 주로 그것을 무기로 삼았던 것이지 큰 의미도 없었다.

'단순히 직감만으로 나를 가둘수는 없겠지.'

그렇기에 이 순간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라는 듯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에버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물었고, 낯설지 않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수도에서 급히 도착한 서신이 있어 전하고자 왔습니다.”

‘헤럴드 경이군..' 황성에서 들었던 목소리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에버하르트는 헤럴드 경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가 건넨서신을 받아 펼쳐 보았다.

한참이고 그 서신 속의 종이를 노려보던 그가 곧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마치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터져 나오는 웃음에 나도 헤럴드 경도 깜짝 놀라 에버하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래도 너를 믿으라고?”

에버하르트는 들고 있던 종이 뭉치를 가차 없이 내 앞으로 던졌다.

그것은 내일 디미트리 후작가의 신문에 오를 기사의 내용이었다.

“내일 신문에 실릴 기사다."

“어떻게….”

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에버하르트가 비웃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오스왈드에서 제일가는 신문사에 내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은가.”

당연하다는 듯 잘라 말한 그가 명령했다.

“읽어 보아라."

나는 제일 앞면에 적힌 기사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현 황제는 즉위 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백성들을 외면하고 전쟁을 일으켜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반란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들을 도왔으며 힘겨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제국의 평화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한참이고 이어지는 폭로의 끝에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모두 읽고 나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짓이지.”

"아닙니다.”

"아니, 네가 끼어들고 나서부터 모든 일이 어그러진 것이 분명하다.”

에버하르트의 분에 찬 목소리에 나는 급히 말을 잇고자 했으나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화를 내며 내 머리를 붙잡고서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내 직감이 이번에야말로 라몬트를 죽이고, 완벽한 황권을 손에 넣을 거라고 말해 주었지. 하지만! 너를 보고 나니 달라지더군."

에버하르트는 차갑게 벼려진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거친 손길로 나를 내던졌다.

그리고 헤럴드 경에게 명했다.

"내 감이 틀렸는지 아닌지는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알게 되겠지.

지금 당장 이 계집을 감옥에 가둬놓아라.”

“하지만 폐하…. 베네디토 양을 당장 투옥하기엔 명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헤럴드 경이 최대한 나를 변호하려 애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지금의 에버하르트는 매우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아니,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애초에 라몬트는 별것 없는 놈이다. 나와 같이 초대 황제의 특징도 타고나지도 않았다고! 내 권력은 최정상에서 완벽하게 빛이 날 것이다!”

허공을 향해 혼자 고함을 치는 황제의 모습에 헤럴드 경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감옥으로 끌고 갔다.

'지금 당장 도망칠 수도 없겠지.'

감옥에 갇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그다지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아니, 불안에 떠는 에버하르트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 걸까.

“당장 출전을 준비해!"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따라 붙는 에버하르트의 목소리를 들으니 미소가 지어질 것 같아 참았다.

이상하게도 두려움 따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프네 양. 그대의 일행도 따로 투옥되어 있으나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나는 생각을 잇다 말고 들려오는 헤럴드 경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애초에 폐하께서는 저를 가두실 목적으로 부른 듯싶습니다. 물자 따위는 핑계고요.”

"반란을 종결시키고 나면 다프네 양의 충성심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헤럴드 경은 다정하게 나를 위로 했으나 그의 표정 역시 굳어 있었다.

“지금껏 폐하께서는 불확실한 일이 있을 때 자신의 감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 내려왔습니다.”

“고작 감으로요?"

“지금껏 틀리신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걸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헤럴드 경의 표정에도 불신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상황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요. 생각보다 반란군의 기세가 높았습니다. 그러니 걱정이 크셔서 그러십니다.”

대수롭지 않은 척 덧붙였지만 헤럴드 경 역시 불안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감에 매달려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군주라니 실망을 살 만했다.

헤럴드 경은 애써 다정하게 나를 위로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하여 주변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외딴곳에 세워 둔 감옥인지 몰라도 철창 근처에는 나를 제외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군.'

아무래도 어린 여자아이고, 무기가 없으면 괜찮을 것이라 방심을 한 모양이다.

‘빠져나가기 어렵진 않겠군.'

우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조금 전 에버하르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면서 참던 웃음을 입가에 떠올렸다.

'굉장히 불안해 보였지. 헤럴드경의 말에 따르면 상황이 좋게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았어.'

나는 라몬트와 연결된 아티팩트를 톡톡 두드려 보았다.

'신호가 가지 않네.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쓴 게 분명해.'

그래서 연락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잠시 귓가를 만지작거리다가 오빠들 또한 연락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티팩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다프네. 다프네, 내 목소리가 들리니?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정체는 레녹스였다.

“응. 들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는 조용히 답하자 건너편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다행이다. 갑자기 라그나르가 찾아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라그나르가 찾아갔다고? 레녹스, 지금 어디야? 다들 무사한 거지?”

급한 마음에 빠르게 묻자 당연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긴. 반란군의 중심지에 있지.

건.

이번에는 리카르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들 무사해. 오늘 오전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다시 연결하느라 조금 고생한 것 빼면 괜찮아.

리카르다가 생색내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때?"

-라몬트가 에버하르트의 군대를 기습해서 에버하르트가 급히 후퇴하고 있어.

라몬트가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고, 리카르다의 말에 레녹스가 덧붙였다.

역시나 상황이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겠지.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레녹스가 물었다.

-다프네는? 괜찮은 거 맞지?

"아.”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에버하르트가 물자가 필요하다.

고 해서 주둔지에 왔다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어.”

-뭐?

“쉿. 너무 목소리가 크면 안 돼."

두 사람의 놀란 목소리에 황급히 덧붙였다.

-에버하르트는 쫓기고 있느라가지 못할 거고, 아마 남은 반란 군들이 그곳을 기습할 거야.

레녹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혼란스러운 틈을 타 몰래 빠져나갈게. 너무 걱정하지 마."

'우선 해가 지기를 기다리자.'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을 때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테니까.

* * *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식사 시간이 되었는지 조금 전과다르게 소란스러워졌다 생각하는데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베네디토 양! 무사하십니까!”

혼란이 가득 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헤럴드 경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척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요?"

"기습! 기습입니다! 반란군이 이곳까지 침범했습니다."

헤럴드 경은 당황해 떨리는 손을 움직여 내 감옥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빠져나오십시오! 이곳에 있으면 큰일 납니다!"

이런 급한 와중에 나를 신경 써주다니.

나는 무서운 척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빠르게 감옥을 빠져나갔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요?"

“우선 다프네 양부터 피하시고 상단의 사람들도 곧 대피시키겠습니다!”

헤럴드 경이 덧붙이는 말에 나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상황을 살피고 도망쳐야겠네.’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갑자기 내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네 이년!”

“꺅.”

거칠게 휘어잡힌 머리가 아파 절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나는 부러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기사의 행동에 헤럴드 경이 놀라 소리를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놓지 못해!”

하지만 기사는 헤럴드 경의 명령에도 아랑곳 않은 채 이리저리 도망치는 다른 기사들 사이로 나를 끌고 가며 고함을 질렀다.

"이년이, 이년이 반란군을 도와 준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탑과 연금탑이 나설 리가 없습니다!”

언뜻 보이는 팔에는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제가 그곳에서 도망친 산증인입니다!”

아무래도 이 자는 에버하르트와 같이 도망친 기사 중 한 명이었나보다.

이자를 뿌리치고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니 당장 이년을 죽여서 본보기를 해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억지로 머리채를 움켜잡은 손이 천천히 떨어지더니 뒤에서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기사는 피를 토하며 뒤로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가 내 허리를 잡고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내 허리를 잡아당긴 사람에게서는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괜찮아, 다프네?”

라그나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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