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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30화 (129/185)

제130화.

위험한 상황을 잠시 잊을 정도로 깜짝 놀라 버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사람과 연락하는 걸 듣고 혹시 네가 위험할까 봐 먼저 달려왔어.”

“오빠들은?"

“탑의 사람들과 함께 반란군을 도와 도망친 군사들을 쫓고 있어.

곧 이곳에 도착할 거야."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나는 입가에 지어질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에버하르트가 불안해했던 그 감이 확실하게 들어맞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라그나르의 등장에 주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졌다.

급한 대화가 끝났다 생각했는지 라그나르는 고개를 들어 경계하고 있는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어찌나 살벌한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물어뜯을 듯한 눈빛이었다.

매서웠으며, 금방이라도 상대를 나는 땅에 쓰러져 시체가 되어버린 기사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저놈들이 널 죽이려고 했었는데 괜찮다고?”

“큰일이 나기 전에 네가 와 주었으니까….”

하지만 내 말은 헤럴드 경의 물음에 중단되어 버렸다.

“다프네 양. 조금 전 기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 줘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그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헤럴드 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도망치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검을 뽑아 우리에게 겨눈 것이다.

“다프네 양.”

헤럴드 경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으나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가 없었다.

“헤럴드 경.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때가 되었어요. 오늘 밤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은 저물고, 새로운 달이 뜰 거예요.”

“정말로 저 기사의 말이 맞다는 겁니까! 반역에 가담했느냔 말입니다!”

헤럴드 경이 목소리를 높이는과 동시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변의 기사들이 분노를 짓씹으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우리를 노려보았다.

상대편이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다프네.”

라그나르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부름에 라그나르를 돌아보자 그는 나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죽여 줄까?"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든지 말해. 네가 원한다면네 앞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죽여 줄게.”

그 말과 함께 바로 앞에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살육을 저지를 것 같은 모습에 나는 황급히 그의 손을 붙들고는 말했다.

"아니. 모두 죽일 필요는 없어.”

“그래? 그럼 내가 저들을 어떻게 해 줄까?”

말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만 아니었으면 달콤하게 들렸을지도 몰랐다.

아마도 긴장에 가득 찬 기사들에겐 끔찍하게 들렸겠지만.

내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자 적막이 이어졌고, 누군가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외쳤다.

“고, 고작 한 명뿐이야! 어차피 저 계집애는 무기도 없으니까 다 같이 덤비면!”

비웃음이 가득한 말에 나는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그나르가 손을 올려 거대한 화염 불덩이를 여러 개 만들어 내었다.

"마, 마법사였어?”

“지금 마법사가 남아 있나?"

“헛소리야! 다들 폐하와 함께 출전한 지 오래란 것 알잖아!”

혼란한 와중에도 라그나르가 만든 불덩이는 거대하게 변해 주변은 화마에 삼켜졌다.

주둔지 근처도 거대한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심상치 않은 기세에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겁을 먹은 것이었다.

시작이 어려울 뿐 그 후는 쉬웠다.

한 사람이 도망가자 겁에 질린 몇몇이 창백한 얼굴로 그를 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그나마 불길이 약한 곳을 찾아 빠져나가려 했으나 미처 다다르기도 전에 번진 불길은 그들의 키보다도 더 높이 타올라 출구를 막아 버렸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지르는 비명을 압도하는 어떤 목소리가 별안간 크게 울렸다.

"이 불길은 또 뭐야!"

말발굽 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익숙했다.

“리카르다!”

“다프네! 그 안에 있는 거야?"

내가 라그나르를 재촉하자 그가 잠시 불길을 죽여 리카르다가 들어올 길을 만들어 주었다.

선두에 있던 리카르다는 멍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더니 라그나르에게 다가와 그의 등을 거칠게 두드렸다.

“아무리 다프네가 걱정되어도 그렇지 먼저 뛰쳐나가면 어떻게 해!”

"다 데리고 가면 늦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

“젠장. 갑자기 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이 여린 아이를 이곳에 끌고 온 거람. 다프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응. 난 괜찮아.”

리카르다는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기 시작했고, 뒤따라 들어온 반란군들은 이리저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기사와 병사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반항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미 끝이 났다는 것을 짐작한 듯 포기한 자들의 모습도 얼핏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리카르다에게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어?"

“황제가 갑작스러운 기습에 도망치는 중이고 라몬트가 뒤쫓고 있어.”

만약 에버하르트가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서 군대를 정비해 반란군을 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처리해야 했다!

“어디로? 그가 어디로 도망쳤 쳤어?"

내 다급한 물음에 리카르다는 그의 등 뒤에 솟은 산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숨어 들어간 것 같아.”

“오빠. 플뢰르와 상단의 직원들도 감옥에 갇혀 있을 거야. 모두를 꺼내 줘. 뒤를 부탁할게.”

리카르다는 나를 붙잡았지만 내 결연한 의지와 마주치자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목을 놔주었다.

"조심해야 해.”

“응. 걱정하지 마.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라그나르 너도.”

리카르다의 말에 라그나르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멋쩍게 주변을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변에 있던 활과 화살들을 챙겨 라그나르와 함께 빠르게 불길 사이를 빠져나왔다.

우리가 나오자 다시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 입구를 막아 버렸다.

“아군에게는 뜨겁지 않을 거야."

"드래곤은 굉장하구나."

대단한 마법이라며 중얼거리다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산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발을 떼기도 전에 라그나르가 나를 획 안아 들어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라그나르?”

깜짝 놀라 높아진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리. 불편하지?”

"어?"

“오른쪽 다리에 살짝 경련이 일어나는 게 보였어. 더 오래 있다가는 무리가 갈 거야."

피로하면 곧잘 다리의 후유증이 도지는 걸 잊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봐.”

미안한 마음에 작게 중얼거리는데 라그나르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활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제나 네 다리가 되어 줄 테니까.”

라그나르의 발길은 거침없었다.

그 기세에 떨어질까 무서워 그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안겨 있다가 그가 멈춰 서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험난한 산을 거침없이 뛰어오른 덕인지 어느새 깊은 곳까지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있어.”

라그나르의 말에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친 풀숲을 헤치고 무언가가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라그나르는 당황하지 않고 커다란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나무 위에 안전하게 착지하고 나서야 나타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있었다.

“에버하르트!”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라몬트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지지 않겠다는 듯 검을 겨루고 있던 에버하르트 또한 외쳤다.

“이게 네 최후다. 라몬트! 아무도 찾지 않는 이 비참한 산속에서 죽는 것이 네 지긋지긋한 운명의 끝인 거야!”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둘 다크게 다친 상태였으나 애석하게도 부상은 라몬트가 더 심각해 보였다.

"아니. 나는 네 목숨을 가져갈 때까지 죽을 수 없어. 내가 너의 폭정을 끝내겠다!”

"입만 살았구나. 그래. 어디 힘껏 덤벼 보아라! 네가 평생 이 형님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찌나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건지 몰라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에버하르트는 라몬트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에버하르트의 검이 라몬트의 옆구리에 상처를 만들자 라몬트가 괴로운 신음을 내었다.

에버하르트는 끝을 내겠다는 듯 다시 검을 높이 들어 올리자 나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화살을 쥐어 활시위를 빠르게 당겼다.

거침없이 날아간 활이 에버하르트의 오른팔에 박혔다.

"아악!”

화살촉이 살을 찢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에버하르트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이미 나의 존재를 눈치챈 에버하르트는 날아드는 화살을 손쉽게 쳐냈다.

그가 증오가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내 감이 맞았다. 역시 네 짓이었어! 네가 마탑과 연금탑을 끌어들여 반역자들을 도운 것이구나!"

“그렇다면?"

"라몬트가 네게 무엇을 약조했지? 이 전쟁에 참여한 명분이 무엇이냔 말이다!”

“명분?”

"라몬트가 무엇을 약조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보다 더한 것을 주겠다! 그러니 내 손을 잡아라!”

나는 흥분한 에버하르트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고 확신했는지 에버하르트가 득의 양양한 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비소로 화답하고는 다시 화살을 쥐었다.

"내가 네게 원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야.”

내 단호한 목소리에 에버하르트는 혀를 차면서 어느새 쓰러진 라몬트를 잡아 들고는 그의 목에 검을 겨누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라몬트의 목을 베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가 없게 된다면 이 제국도 혼란에 잠기겠지! 다 네년 때문에!"

에버하르트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웃더니 나를 향해 경고했다.

“활을 내려라.”

“내리지 마! 나를 신경 쓰지 말고 망설임 없이 쏘거라, 다프네!"

라몬트가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젠장.’

더 상처를 입었다가는 라몬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활을 내려놓았다.

그에 에버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몬트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질질 끌기 시작했다.

"내가 무사히 도망치면 그다음엔 네년의 목을 친히 베어 주마."

에버하르트는 낮게 경고하며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상처쯤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다프네?"

라그나르의 물음에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도망간 쪽을 향해 겨누었다.

다시 화살을 잡고 에버하르트가 곧 그가 도망친 쪽에서 고통이 섞인 비명이 들렸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에버하르트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라몬트를 멀리 던져 버렸다.

어느새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사라졌기 때문에 순간 안심한 듯 라몬트를 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네가 그랬지. 오스왈드의 황실에는 특별한 피가 흐른다고.'

아마 이것은 오스왈드의 황녀였던 엄마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일 것이다.

온몸의 신경이 발달한 듯 감각이 예민해졌고, 내 눈은 한 번 정한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제대로 보지도, 맞추지도 못할 거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한들 내게는 똑똑히 보였다.

미처 꼬리를 감지 못한 내 사냥감이.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사냥감의 목을 향해 활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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