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31화 (130/185)

제131화.

에버하르트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라몬트는 언제나 거대한 태산과도 같았던 그가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버하르트의 목을 정확하게 꿰뚫은 화살이 그가 스스로 설 수 있는 마지막 힘을 앗아간 듯했다.

마치 죄인을 옥죄는 사슬과 같이 에버하르트를 순식간에 끌어내린 장면은 경이로워 보일 정도였다.

"크헉, 허억.”

에버하르트의 고통에 찬 신음에 라몬트는 정신을 차리고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으나 자신의 손으로 마무리지어야 했다.

그러니 벌써 쓰러질 수는 없었다.

“형님, 황위에 오르기 전 제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나십니까?"

“......."

에버하르트는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목을 부여잡으며 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부끄럽지 않은 군주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훌륭한 황제가 되겠다 다짐해 주셨습니다.”

라몬트는 쓰러진 에버하르트를 보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에버하르트의 대관식이 이루어지는 그날, 높이 떠오른 태양은 황제의 관을 쓰고 있는 그를 환히 비추어 주었다.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갈 에버하르트는 훌륭한 군주가 될 것이라 다짐했고, 그리할 것이라 믿었다.

바다 건너의 왕국들을 별다른 명분 없이 정복할 때에도 그것이 제국의 부흥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황폐한 백성들의 삶을 보살펴 달라는 충언을 올린 대신들이 영문 모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제게마저 그 손길이 닿았던 그 순간이 오고서야 깨달아 버렸다.

황제가 된 에버하르트는 제국의 안위가 아닌 자신의 안위와 권력만을 위해 해가 되는 것을 모두 제거하고 있었다.

그것이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라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더 이상 제국을 밝혀 줄 태양이 아니었다.

제국을 불로 태워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가는 폭군일 뿐이었다.

“태양이 지는 순간 이 제국 또한 함께 멸망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네가 감히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느냐!"

에버하르트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짜내어 소리를 질렀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채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참으로 악독하고, 추악해 보였다.

라몬트는 복잡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을 다잡으며 말했다.

“힘든 길이겠지요.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견뎌 내겠습니다.”

에버하르트는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라몬트를 노려보았다.

그 안에 가득 찬 증오에 라몬트는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켰다.

“이것은 형님의 죗값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책임을 묻고 싶었고, 마음속 깊이 잠겨 있던 원망을 터트리고 싶었다.

“저는….”

라몬트는 입을 열었다 곧바로 다물었다.

어느새 다프네와 라그나르가 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이 보였다.

라몬트는 잔뜩 굳어 있는 다프네의 얼굴을 보고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을 텐데 입을 연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도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 더는 망설이지 않으리라.

라몬트는 복잡한 심경을 다잡으며 말했다.

"어째서 프레이르를 그렇게 죽게 하셨습니까. 그 가여운 아이에게 손이라도 한 번 내밀어 주셨더라면….”

라몬트는 차가운 눈빛으로 에버하르트의 옆에 떨어진 검을 주워들었다.

"그럼 제가 이리 마지막까지 발버둥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라몬트는 다프네에 대한 말은 아끼기로 했다.

에버하르트가 죽기 직전이라 한들 다프네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품은 원망이 다프네에게까지 향하게 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무책임한 어른인 라몬트 자신이 받는 것이 맞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없단 말이다!”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모습에 라몬트는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진 달은 곧 세상을 환히 비출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에버하르트는 발버둥 치며 도망가려 했다.

라몬트는 조용히 칼자루를 그러쥐고, 질기게도 바르작거리는 에버하르트의 목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

그것이 라몬트가 자신의 형제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 * *

에버하르트의 죽음으로 인해 전쟁의 판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반란군 세력에 포위당한 제국군은 황제를 잃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피비린내를 풍기던 지독한 새벽이 끝나고, 다음 날 에버하르트의 죄를 폭로하는 기사는 예정대로 무사히 발행되었다.

에버하르트의 죄가 제국 곳곳에 낱낱이 밝혀졌고, 백성들은 권력에 미친 폭군을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디미트리 후작가는 마지막 결전의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폭군의 죽음을 다룬 기사를 발행하였고 원망의 소리가 환호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드디어 지독하게 이어지던 내전이 끝이 났다.

폭군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기뻐하는 이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라몬트 역시 그의 형과 다르지 않을 거란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라몬트가 반란군이었을 때 백성들에게 베푼 선의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였다.

덕분에 그를 황제로 추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저잣거리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글렌 공작을 중심으로 하여 라몬트를 지지하는 귀족가의 세력이 모였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힘을 입어 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였다.

폭군의 목은 수도의 성문에 내걸렸으며,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쪽을 향해 침을 뱉으며 욕을 하는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오스왈드의 새로운 황제인 라몬트 오스왈드의 즉위식 날이었다.

전대 황제와 다르게 소소하게 이루어진 대관식에서 라몬트는 말했다.

“피폐해진 민심을 보살필 것이고,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황제가 되겠노라.”

환호성은 황성을 넘어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다.

* * *

겨울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우산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라그나르가 우산을 살짝 들어 올려 내 시야를 터 주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네요.”

나는 친엄마의 유골함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황실의 납골당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몬트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납골당에 프레이르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준비가 끝나자 곧바로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우리가 납골당에 도착했을 때 라몬트는 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예.”

라몬트의 시선은 내 품에 있는 유골함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서글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비가 오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준비된 장소로 천천히 이동했다.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내 친엄마의 납골함은 무사히 안치되었다.

프레이르가 생전에 좋아했던 꽃들이 그녀가 잠든 자리를 감쌌다.

만약에 정해진 운명대로 내가 죽었더라면 내 친엄마는 이곳에 오지도 못했겠지.

알록달록한 꽃 사이에 있는 그녀의 작은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만지는데 무언가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환히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피폐한 상황 속에서 울고,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던 모습밖에 기억나지 않아 그것이 너무 원통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는 나의 친엄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엄마의 누명을 벗겨 주는 것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해요.'

올라오는 감정을 삼키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담담한 척 말을 꺼냈다.

“제 친엄마는 이곳에서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죠?”

“부디 그랬으면 좋겠구나.”

라몬트 역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라몬트에게도 혼자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는 친엄마의 초상화 앞에 그녀를 닮은 보라색 꽃 한 송이를 내려놓고는 뒤로 물러났다.

"나를 낳아 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나는 내 모든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환히 웃었다.

'돌아올 때는 꼭 엄마의 누명을 벗기고 올게요.'

이제 첫발을 내디뎠으니 이대로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 또한 잊지 않았다.

* * *

라몬트를 위해 자리를 비킨 지얼마 되지 않아 곧 슬픔에 잠긴 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 오라비가 미안하다….”

미처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눈물에 잠기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창했으면 좀 좋았을 텐데."

하필 오늘 같은 날 날씨도 이렇게 우중충할 건 뭐람.

가슴속이 답답하여 콩콩 내려치 는데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라그나르가 다가왔다.

“어디 아파?"

"아니, 아픈 건 아니고.”

그저 조금 답답할 뿐이라며 중얼거리다가 기분에 따라가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나 울 줄 알았는데 눈물이 안 나더라. 내가 너무 매정한 사람인 걸까?”

자식이 되어서 눈물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매정해 보이지 않았을까.

이런 내 걱정에 라그나르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슬플 때마다 눈물을 참았으니까 정작 울고 싶을 때 눈물이 안 나는 것 아닐까? 그래도 대신 울어주는 하늘이 있잖아."

라그나르의 말에 나 또한 고개를 들어 올려 여전히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비가 마냥 싫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이미 메말라 버린 감정의 둑이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았다.

라그나르다운 위로에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에 나는 그와 마주 보고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슬슬 돌아가자, 우리 집으로.”

* * *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러 벌써 1월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평소와 다른 차림에 괜히 부드러운 드레스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어쩜, 오늘 너무 예쁘세요.”

“연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가씨만 쳐다볼지도 몰라요!"

“어떻게 아가씨의 생일날 딱 연회가 열리게 되었을까요. 정말 특별한 하루가 될 거예요.”

하녀들의 높은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하였고, 나는 어색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참 기대되네."

오늘은 내 생일임과 동시에 아카데미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아카데미로 가는데 왜 드레스 차림이냐면… 올해의 졸업식은 조금 특별하기 때문이다.

원래대로였더라면 졸업식이 진행된 후 오후에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모여 졸업 축하 파티를 함께 즐기게 되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은 아카데미의 홀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으나 올해 기념 파티가 황실의 연회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다 라몬트의 뜻이었으니….

지금껏 던전에서 고생해 준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선물이라며 황실에서 직접 규모가 큰 졸업 기념 연회를 주최해 준 것이다.

'라몬트….'

졸업식 날짜가 내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가 선물을 주겠다고 한 말이 이러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선물은 너무 과한데.'

심지어 새로운 황실에서 주최하는 첫 연회다 보니 이때다 싶어 연회에 참가하는 귀족들의 수도 상당하다고 들었다.

'부디 귀찮은 일만 없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란 후 슬슬 나갈 채비를 하려는데 옆에 있던 하녀가 물었다.

"아가씨, 올해에는 파트너와 함께 가시는 거죠?"

“맞아요! 무려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인데! 이번에는 혼자 가시면 안 돼요!”

그동안 졸업 파티 때마다 파트너도 없이 참가하고, 매번 춤도 안추고 돌아온 것이 그녀들은 꽤 억울했나 보다.

"혼자는 아니야.”

내 말에 하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너희도 아는 얼굴일 텐데.”

기대에 찬 얼굴에 실망을 안겨 주지 않을까 싶어 말을 아끼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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