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하녀들은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라그나르 님인 거죠?"
"왠지 라그나르 님일 것 같아요."
그들은 웃으면서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니?"
“에이, 아가씨 옆에 라그나르 님이 딱 붙어 다니는데 감히 누가 파트너를 하겠다 나서겠어요."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고, 이번에는 노크뿐만 아니라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목소리 또한 들렸다.
“다프네, 들어가도 될까?"
하녀들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기 들끼리 입을 막으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민망함이 몰려와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황급히 외쳤다.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고, 곧 들어온 라그나르의 모습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에게 눈을 떼지를 못했다.
평소의 간편한 차림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금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남색의 맞춤 예복은 라그나르의 몸에 꼭 맞아 그의 조각 같은 몸매를 멋지게 드러냈다.
곱슬거리는 머리 또한 반쯤 이마뒤로 넘겨 옷에 어울리도록 깔끔하게 정리했다.
평소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질만큼 강렬해 저절로 눈이 갔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라그나르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해?”
"아니.”
"정말?"
내 단호한 답에 라그나르가 환히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고마워. 다프네의 첫 파트너니까 부끄럽지 않으려고 열심히 준비했어.”
"으응.”
라그나르는 웃음을 아끼지 않은 채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꺼내어 나를 향해 내밀었다.
"아니, 그냥 편하게 오지."
그의 손에는 색색의 꽃들을 엮어 만든 아름다운 꽃다발이 있었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러 온 것 같은 모양새에 민망함이 몰려와 빠르게 받았다.
“가장 예쁜 꽃들을 모아도 너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쩌면 좋지."
“하하.”
모두가 참여하는 연회에 라그나르혼자 집에 있으면 서운해할 것 같아 파트너로 삼았던 건데.
'이렇게 작정하고 준비할 줄은 몰랐는걸.'
파트너로 초대해도 괜찮을까 고민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나는 꽃다발을 품에 끌어안고는 향긋한 꽃내음을 맡으며 슬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받은 꽃다발 때문일까.
어쩐지 조금 설레면서 오늘 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엄마와 악셀리우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엄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 주위를 맴도는 어색한 공기에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식은땀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한 채 엄마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언제쯤 화를 풀어 주실까.'
반란과 관련된 일은 모두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날 말했던 네 번째 소원으로 인해 생긴 엄마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어색함의 원흉은 나였으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늘 참 예쁘구나."
“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멀리 날아가 있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깜짝 놀란 내 목소리에 엄마는 나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언제 이렇게 커서 어엿한 숙녀가 되었는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니 엄마가 말했다.
"그래, 다 크긴 다 컸지. 하지만 넌 여전히 작고 소중한 내 아이란다.”
“그, 그렇죠?"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나는 그저 급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엄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부터.”
“네?”
"다음부터 그런 소원을 빌면 혼날줄 알아라.”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면 어떤가.
드디어 엄마의 화가 풀렸다는 사실에 이내 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엄마는 피식 웃으며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리 오렴. 한 번만 안아 보게.”
"얼마든지요.”
나는 엄마의 품에 꼭 안겨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한다, 내 딸. 늦었지만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단다.”
“고마워요, 엄마."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웃자니 옆에 서 있던 악셀리우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이야. 오늘 너무 예뻐서 연회장의 사람들이 다프네만 보겠는걸."
“걱정되세요?”
"이상한 놈은 알아서 잘 거를 텐데 걱정은 무슨.”
엄마의 냉정한 말에 악셀리우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옆에 꼭 붙어 있을 테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라그나르가 내 손을 꼭 잡고서는 천천히 깍지를 끼었다.
손가락 사이가 맞물리는 느낌이 어쩐지 오늘따라 생소하게 느껴져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냥 잘 부탁한다고."
내 말에 라그나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었다.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해치워 버릴 거라며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에 나는 해치우지는 말라고 덧붙였다.
'뭔가 평소보다 더 의욕이 넘치는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연회 시작 전부터 모든 것이 잘풀리고 있으니 어쩐지 오늘 하루가 무사히 흘러갈 것 같았다.
* * *
세심하게 준비한 티가 나는 고풍스러운 연회장에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어머, 저기 좀 봐요.”
“설마 저 아가씨가 그….”
“어쩜. 정말로 소문보다 더….”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관심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작은 속삭임은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으나 나를 향한 시선이 워낙 뜨거워 들리지 않아도 내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관심받게 될 줄 몰랐는데.”
"괜찮아?"
“무슨 말들을 하고 있어?"
내게는 들리지 않더라도 분명 라그나르에게는 들리겠지.
“그냥 누구를 닮았다든가, 반역을 도와줬다든가....."
“그 정도야 뭐.”
귀족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을 내가 막을 수도 없으니 무시하는 것이 낫겠지.
“와, 부회장님!”
“어머, 어머.”
활기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모여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악셀리우스와 엄마는 아카데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고, 우리는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가 다가가면 갈수록 마치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에 오히려 의아함이 더 커졌다.
“이분은 유학생과 함께 왔던 호위아니에요?”
"분명 모르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뭐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부회장님의 첫 파트너가 된 거예요?”
졸업생이고 재학생이고 관심을 가지면서 자꾸 묻는 것에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왜 다들 흥분해 있는 거야?”
"중요하죠! 부회장님이 첫 파트너를 데리고 온 것인데!"
“역시 지금껏 퇴짜 맞았던 선배들은 기준이 미달되었던 건가.”
누군가 중얼거리는 말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저 얼굴이라면…."
"나라도 파트너 수락하지."
“넌 남자잖아.”
“남자여도 남자랑 파트너 할 수 있지. 미남이잖아.”
“얘들아, 본인을 앞에 두고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는 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으니 그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부회장님 졸업하면 아카데 미가 쓸쓸할 거예요.”
“차기 회장이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한담?”
"내가 어떻다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롬이 삐딱한 자세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의 대화를 다 들은 것인지 짐짓 화난 척을 하는 모습을 보여 내가 웃으며 말해 주었다.
“차기 회장의 활약이 기대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선배, 저도 귀가 있는데요."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니, 그렇게 말하면 화난 척도 못 하겠잖아요.”
그 말에 긴장감이 풀린 모두에게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보다 회장님은요?"
“맞아요. 전쟁터에서 다치셨다고는 들었는데 못 나올 정도로 심각하신 건가?"
"아니, 그건 아닐걸.”
나는 그들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멀쩡하게 오고 있잖아.”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고, 렉시우스와 그 옆에 함께 걸어오고 있는 마리아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마리아네? 본국에 안 돌아간 거야?"
“여행하다가 우연히 다친 공작님을 만나서 치료해 주었다던데? 그래서 공작저에 정식으로 손님으로 지냈다더라.”
모인 이들은 동그란 머리들을 끄덕이며 궁금증을 해결했다.
“그래서 공작님의 파트너로 참가한 모양인가 봐.”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지?"
“설마 오늘 같은 날에도 부회장님께 시비를 걸려고?"
동기들과 후배들이 떠드는 소리는 렉시우스가 우리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싹 사그라들었다.
렉시우스는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찜찜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모른 척했다.
“흠흠, 졸업 축하하네, 다프네 양."
“공작님도 졸업 축하드려요.”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고마워, 마리아.”
예상과 달리 평화로운 대화가 이 어지자 주변의 다른 아이들은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저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듯해 금방 떠날 줄 알았는데 렉시우스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지 않겠나?"
그리고 그 말에 주변에 모인 아카데미 학생들의 얼굴에 경악이 차올랐다.
“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황망한 시선에 그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아무래도 회장과 부회장이 함께 첫 춤을 추는 것이 보통이지 않나.”
"그거야 그렇긴 한데.”
굳이 우리 둘이?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내 표정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그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렉시우스는 내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공작가와 베네디토 상단이 사이가 좋다는 것을 보여 줄 기회기도 하지 않나.”
옆에 있던 마리아가 작게 속삭이며 거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고위 귀족이랑 가까이 지낸다면 평민이라고 무시할 일은 줄어들 테니까요.”
무엇보다 현 황제의 최측근에게 보호를 받고 있음을 드러낼 기회라는 뜻이기도 했다.
웬일로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렉시우스를 바라보았다.
"곧 황제 폐하가 들어오고 첫 춤을 출 텐데. 그때 함께 아카데미를 대표해서 추자는 거야.”
다른 의미는 없다며 덧붙이는 것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렉시우스의 뜻도 나쁘지는 않기에 수락하려는 찰나 라그나르가 내 손을 꽉 붙들었다.
“안 돼.”
"응?"
"네 파트너는 나잖아. 그러니까…
적어도 나랑 첫 춤을 춰야 하는 것 아니야?"
라그나르가 꺼낸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라그나 르를 바라보았고, 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잡은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어머머.”
"웬일이야.”
장난기 많은 후배들이 놀리려는 찰나 우리 뒤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파트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기회를 내게 양보해 줄 수 있겠나?"
중후한 목소리가 들리자 장난스럽게 웃고 떠들던 무리의 얼굴에 순식간에 긴장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라몬트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