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이번 공을 높이 사는지라 칭찬해 주고 싶어 그렇다네.”
라몬트의 입가에 호의가 가득 담긴 미소가 떠오르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예 시선을 끌 작정이었나?'
라그나르는 끝까지 내 손을 놓고 싶지 않아 했으나 아무래도 상대가 황제인지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꼭 붙잡은 손을 천천히 떼어 내었다.
라그나르의 시무룩한 표정이 보여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황제를 거절할 수는 없잖아.
나는 라그나르를 향해 조금 있다.
보자며 눈짓하고는 라몬트의 손을 잡았다.
라몬트가 홀의 중심을 향해 걸어 나갔고, 이내 멈춰 서자 오케스트라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첫 춤의 시작을 알리듯 잔잔한 음악에 몸을 맡기며 천천히 발을 움직이고 있으니 라몬트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놀랐느냐?"
"네. 이제 제국의 귀족 중에서 저를 모르는 이는 없겠어요.”
나는 우리를 향한 수많은 시선에 불쾌함을 섞어 말했다.
“웬만하면 춤은 안 추려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단다.”
“어쩔 수 없다니요?"
내 까칠한 목소리에 라몬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시원하게 웃었다.
“비슷한 연령대의 사내와 춤을 추면 네게 추문이 붙을지도 모르잖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세요?"
렉시우스랑 나의 추문이라니 …
누구도 믿지 않을 소문일 텐데?
내가 눈에 띌 정도로 미간을 구겨도 라몬트의 표정은 진지했다.
“폐하가 아닌 다른 이들은 절대로 믿지 않을 소문이네요."
“이왕이면 공작보다는 황제의 보호를 받는다고 드러내는 편이 더 도움될 테고.”
이쪽도 나름 나를 신경 써 주려 한 일이라 마냥 날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왜 이런 연회를 여셨어요? 즉위식에도 연회를 열지 않으시더니.”
"네 생일이라고 했잖니. 적어도 지금껏 못 해 준 만큼 성대하게 열어 줘야 하지 않겠어?"
“과해요."
따끔하게 충고를 던졌다가 미안한 마음에 황급히 붙였다.
“그래도 감사해요.”
라몬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졸업하고 나면 클레멘스로 귀국한다고?”
“네. 엄마의 누명을 풀고, 죗값을 받아야 할 이들에게 정당한 값을 치르게 해야죠."
"너무 빨리 떠나 아쉽구나."
“섭섭하세요?"
“그게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인데 내가 어찌 막겠나.”
가벼운 사담은 끝났는지 라몬트가 본론을 꺼내었다.
"네가 예전에 해 준 말대로 헤로 니스 공작이 보낸 서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더구나.”
“확실해.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더군. 그럼에도 다시 확인하지도 않고, 제멋대로 처벌을 결정하다니.”
라몬트는 빠드득 이를 갈면서 분노를 표현했다.
“프레이르의 누명이 밝혀진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으마. 오스왈드 황실에서 정식으로 클레멘스의 책임을 묻도록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 웃었다.
"큰 힘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감사의 말에도 라몬트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외숙.”
“네?”
“폐하라니. 편히 외숙이라고 부르거라. 너도 엄연한 황실의 사람이고, 이 제국의 황족인데 어찌 그리 거리감 있는 호칭을 쓰는 거냐.”
"안 된다는 것 아시잖아요.”
내 대답에 라몬트가 눈에 띄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이렇게 둘이 있을 때는 괜찮지 않니.”
라몬트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잃었고, 이제 남은 혈족은 나 하나뿐이니 더더욱 애착이 갈 만했다.
'미안한 마음도 크니 더 잘 대해 주고 싶은 거겠지.'
“곤란한 상황이 생긴다면 내게 도움을 청하거라. 네 일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서서 해결해 줄 테니.
내가 언제나 네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라몬트의 단호한 표정 안에 담긴 진심이 보여 나는 고마움에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려 웃었다.
“감사해요.”
하지만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
“하지만 제 일은 얼마든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외숙께서는 앞으로 황가를 어떻게 부흥시켜 나갈지에 집중하시면 어떨까요?"
내 장난이 섞인 말에 라몬트의 표정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결혼도 하시고, 황손도 보셔야 죠. 황손이 생기면 제 동생이 생기는 것이겠네요? 벌써부터 그날이 참 기대가 되네요."
“흠흠, 그 건은 천천히…."
"어서 동생을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가 황가의 어르신들에게 듣던 잔소리를 조카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라몬트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면서 춤을 멈추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편지를 보내 주렴. 언제든 기다리고 있으마.”
어느새 연주가 끝이 나자 그는 내 손을 놓고 인사를 하였다.
“즐거웠다네, 베네디토 양. 베네 디토는 영리한 후계자를 두어서 참 좋겠군.”
"황공합니다. 저 또한 즐거웠습니다, 폐하.”
그 대화를 끝으로 라몬트는 중앙을 벗어나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떠나갔다.
악단이 새로운 연주를 시작하려는 듯 부드러운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라그나르는 어디 있지?'
바로 이어서 춤을 출 생각이 없기에 그곳을 빠져나오려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부디 제게 그대와 춤을 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나보다 어려 보이는 귀족 영식의 권유에 어찌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찰나 옆에서 고운 손이 튀어나와 갑작스럽게 내 손을 잡아챘다.
"미안하군요, 헤이거 영식. 다프네는 나와 춤을 춰야 해서 말이 죠.”
“…공녀님?”
“그렇지?”
카롤리나는 새초롬한 눈빛을 빛내며 내게 물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당장이라도 경을 칠 것 같은 위험한 눈빛이었기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 다프네?"
카롤리나는 익숙하게 발걸음을 떼어 자연스럽게 나를 리드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남자 포지션으로 춤을 추는 것에 놀란 눈빛을 하니 그녀가 피식 웃었다.
“폐하도 참 무심하시지. 파트너.
에게 데려다주지는 못할망정 잔뜩 주목받게만 하고 떠나시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카롤리나의 시원시원한 스텝처럼 밝게 웃다 고개를 돌리는데 멀리에 있는 라그나르와 눈이 마주쳤다.
라그나르는 서운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춤의 기회조차 뺏은 것 같아 잠시 잊고 있던 미안함이 다시 몰려왔다.
“뭐야, 지금 나와 춤을 추는데 다른 생각을 하는 거야?"
“티 났나요?”
“뻔뻔하기는.”
카롤리나는 픽 소리를 내며 웃고는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심에서 춤을 추다가 대형의 가장 끝으로 옮겨 가는 움직임이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침 타이밍 좋게 연주가 끝이 났고, 카롤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이끌고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다가오려는 사람들이 보이면 냉정한 눈빛으로 노려보며쳐 내는 것 또한 잊지 않고서 말이다.
* * *
카롤리나가 나를 이끌고서 도착한 곳은 귀족 영애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파우더룸이었다.
“아무도 못 들어올 장소가 필요 했거든.”
카롤리나는 파우더룸에 들어오자마자 내 손을 놓고는 옆구리에 손을 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생일이라며? 왜 말 안 했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애초에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니 내 입으로 떠들고 다니기도 웃기지 않나?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적어도 우리가 친구 사이는 됐다 생각했는데. 나만 그리 생각했나 보네.”
카롤리나는 자존심이 상한 듯 서 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나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 친구예요?"
“그럼 그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쳤는데 친구가 아니면 뭐야?”
버럭 소리를 높이는 것이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피식하고 웃고 있으니 카롤리나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됐어. 받기로 한 거나 가져가든가.”
카롤리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내 앞에 조심스럽게 상자를 내려놓았다.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 포장된 것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다.
“완성했어요?”
카롤리나는 언제 새초롬했냐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답지 않은 거센 반응에 나 또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리볼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는데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총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지라 놀란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네가 활을 다루는 것을 고려해서 최대한 비슷한 무기를 만들어 봤어. 여기를 당기면 안에 있는 탄이 나가는 거야.”
카롤리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자기가 만든 리볼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안에 들어가는 탄도 평범한 게 아니야! 마법을 부여한 탄을 쓸 수도 있다니까? 탄을 바꿔 가면서 여러 기능을 쓸 수 있어. 외상 없이 생포도 가능하지."
“대단하네요. 카롤리나는 정말 천재였군요. 생일을 챙겨 주려고 일부러 오늘 가져온 거죠? 고마워요.”
박수를 치며 진심을 담아 활짝웃으니 카롤리나는 더더욱 흥분한 목소리로 설렘을 아낌없이 표출했다.
“연금탑주님이 도와주셔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만들 수 있었어! 정말 엄청난 역작이라니까!”
흐뭇한 마음으로 듣고 있자니 유독 그녀의 말투나 표정이 밝아진 게 느껴져 물었다.
“오빠가요?"
“응. 하나를 말하면 바로 알아듣고서는 필요한 것을 전부 가져다 주시거나, 제작할 때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지!”
고운 목소리로 조잘조잘 오빠의 칭찬을 내뱉는 카롤리나의 얼굴에 옅은 분홍빛이 떠올랐다.
"과연! 괜히 탑주의 자리에 앉으신 게 아니었어! 이렇게 말이 잘통하는 상대도 처음이어서 만드는 내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흐음.’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물었다.
“오빠랑 친해졌나 봐요?"
“…친해지기는!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았을 뿐이야.”
“그래요?”
“진짜라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존경의 마음일 수도 있으니 굳이 캐묻지 말아야지.'
나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카롤리나를 바라보았다.
'친구라…. 미리 말해 주지 않으면 나중에 서운하겠지?'
조금 전까지 미소를 짓던 내가 표정을 굳히자 덩달아 그녀까지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표정이 왜, 왜 그래?"
"말할 게 있어요, 카롤리나.”
“무슨 말이기에 이렇게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난 더 놀랄 것도 없는데.”
"내 출생에 관한 비밀이에요. 카롤리나는 내 친구니까 직접 이야기해 줄게요."
비밀이라는 말에 카롤리나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간략히 내 출신부터 신분을 숨겨야 하는 사정, 반역에 가담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카롤리나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더니 자신의 뺨을 짝소리 나게 내리쳤다.
“꿈이 아니네."
“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카롤리나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나를 위로하듯 손을 도닥여 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생 많았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런 비밀을 숨긴 것이냐며, 자신을 모욕했냐며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누명이 벗겨지기 전까지 어디가서 함부로 이야기하면 안 돼."
이왕 정체를 밝힌 김에 편히 말을 놓으니 카롤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니, 당연하지요.”
“말 해"
“친구라고 했잖아. 말 편히 해.”
“…그래, 그럴게. 직접 말해 줘서 고마워. 분명히 나중에 다른 이를통해 듣게 되었다면 나도 모르게 서운했을 것 같네.”
카롤리나는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듯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그럼 너는 황녀님의 누명을 벗긴 후에는 다시 오스왈드로 돌아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