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글쎄.”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본 적이 없기에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상단주로서 일해야 하니 계속 본국에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누명이 벗겨지면 황족임을 당당히 밝힐 거잖아? 그런데도 계속 상단의 일을 할 생각이야?"
카롤리나는 쏘아붙이듯 다급하게 말하다가 아차 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덧붙였다.
“궁금해서 그러는 거지 그 일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절대 아냐.”
“응, 괜찮아. 그리고 상단주 일은 내가 계속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신분이 바뀐다 해도 포기할 생각 없어.”
평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카롤리나는 그럼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황녀님이 너무 안타깝네. 정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사악하고 못된 짓을 할 수 있는지."
카롤리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다가 이내 멈칫하고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그러면…. 교환 학생으로 온 헤로니스 영애가 네….”
“이복동생이지.”
"맙소사.”
담담히 이어진 말에 카롤리나가 입을 틀어막고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그걸 알면서도 걔를 그렇게 챙겨 준거야?”
“딱히 마리아를 미워하거나 그러지는 않으니까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미워해야지! 네 자리를 뺏어 간거나 다름없는데!”
“하지만 그 아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카롤리나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만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것은 여전해서 그녀가 분을 가라앉힐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걔는 모르는 거지?"
"알면서도 내게 뻔뻔하게 다가왔다면 역시 조금은 싫지 않았을까?
그래서 궁금하기도 해."
“뭐가?"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야.”
나는 리볼버를 상자에 넣어 놓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냐에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감정일지, 아니면 싫어하게 될지 결정이 되겠지.”
"너는 무슨 애가….”
“싫어하는 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괜한 것에 쓸데없이 내 감정을 쏟고 싶지도 않고."
"몰라, 나는 처음부터 걔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러니 난 싫어할 거야.”
공녀가 아닌 카롤리나 본연의 성격은 꽤 투정쟁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푸흐흐 웃는데 그녀가 이 기회를 틈타 또 질문을 던졌다.
“그럼 걔랑 그 파트너랑은 무슨 사이야?”
“파트너? 라그나르를 말하는 거야?"
“응. 나도 소문으로 들었었는걸.
그 사람과 마리아가 처음에 같이 나타났었잖아.”
"아, 나를 만나려다 우연히 도움을 받았다고 했어."
내 말에 카롤리나는 조금 전보다 더욱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네 파트너는 혹시 네 출생에 대해서 모르는 거야?"
"알고 있는데.”
내 말에 카롤리나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런데 걔랑 같이 여기에 왔다.
고? 모든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함께 나타나?"
“으음. 어쩔 수 없었다더라고, 거짓말할 아이는 아니니까.”
하지만 내 말에 카롤리나는 더욱 역정을 냈다.
“적어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인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잖아!"
"응?"
카롤리나는 흥분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자기 일처럼 거세게 화를 내었다.
“아니, 사정을 다 알면서도 어떻게 그 애를 쫄래쫄래 따라오니?
당연히 다른 방법을 써서 찾아왔어야지!”
“서운한 점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했는걸. 앞으로는 안 그럴 거라고도 약속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연인이 아….”
카롤리나의 오해를 정정해 주려 는데 그녀는 말이 끝나지 않았다.
며 내 말을 잘라 냈다.
"평민치고는 꽤 수려한 얼굴이고, 보니까 네게 다정하게 대해 주던데 그러니 마음이 갈 만도 해.”
"아니, 카롤리나 ...."
“하지만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할 줄 아는 사람은 별로야! 자고로 남자란 다정하고, 상냥하며 나만을 아껴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이어야 한다고!”
카롤리나의 흥분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녀를 식혀 줄요량으로 한마디 툭 던졌다.
“레녹스처럼?”
"그래, 탑주님처럼!”
카롤리나의 당당한 목소리가 파우더룸에 널리 울렸다.
카롤리나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호오.”
"......."
내 감탄이 섞인 목소리에 카롤리 나가 새빨간 사과처럼 얼굴을 붉히더니 다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야. 그냥 존경이야!"
“그래, 그러겠지.”
카롤리나는 분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것이 어지 간히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보이기는 했으나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조언하나를 해 주었다.
“존경은 괜찮아. 하지만 연애는 하지 마.”
“왜?”
“레녹스랑 나는 열 살이나 차이가 나는걸. 그럼 너랑은 열한 살 차이가 나잖아.”
“…그 정도 나이 차는 괜찮지 않나?"
“우리 오빠를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니?"
내 말에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사그라들었다.
* * *
그 후로 대화는 흐지부지 끝이 났다.
카롤리나는 조금 더 쉬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라그나르를 떠올리고는 나가기 위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아. 나가기 전에 해 줄 말이 있는데.”
그냥 나갈 수도 있었으나 나를 생각해 화를 내 주던 모습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응?”
“네가 오해를 하고 있어. 라그나 르랑 나는 연인 사이가 아니고 그냥 친구 사이야.”
“뭐? 하지만 마리아 걔가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고 했는데.”
내가 저지른 거짓말이 떠올라 머쓱하게 웃자니 카롤리나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평범한 친구처럼 안 보이는 건 알지?"
“응?”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어떤 친구가 그렇게 쫄래쫄래 따라붙니?
연모하는 마음을 품은 게 아닌 이상 그러는 건 이상하지."
카롤리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해 주었다.
"연인이 아니고, 그렇게 발전할 생각도 없다면 확실하게 선을 그어. 괜히 서로 관계 망치지 말고.
네 신분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
조금 전까지는 부끄러움이 가득한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는데..
아까와 다르게 반대로 조언을 받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카롤리나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파우더룸을 빠져나왔다.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꽤나 생각이 깊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만약 라그나르가 내 연인이 된다면 ….
으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라그나르가 내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너무 앞서서 생각했다.
카롤리나의 말에 쓸데없는 생각만 든 것 같아 애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라그나르부터 찾기 시작했다.
우선 혼자 두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뒤에 같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연회를 조금 즐겨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라그나르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이 보였다.
'…라그나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던가?'
붙임성 좋은 강아지처럼 달라붙던 모습은 어디 가고, 누가 무슨 말을 걸든 관심 없다는 듯 딱딱한 표정으로 무안만 주고 있었다.
그가 스스로를 나스라고 속이던 때와도 겹쳐 보였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정다감한 라그나르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보이는 표정이 꽤 낯설게 다가왔다.
'아. 눈 마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돌린 라그나르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조금 전의 그 냉정한 사람과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급격한 변화였다.
라그나르의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그를 따라 내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는 그들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내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혼자서 심심했지?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플뢰르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말을 걸어 줬어.”
말을 걸어 주기는 했겠지.
네가 다 무시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목 끝까지 나올 것 같은 말을 아끼고서는 빙긋 웃었다.
“볼일은 다 끝난 거지?"
“응. 카롤리나가 선물을 주고 싶다고 불렀어. 그래서 조금 늦어버렸네.”
“선물?”
빈손이다 보니 그가 의문을 가진 채 물었고,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저택으로 보내 줄 거야. 연회에서 들고 다니기에는 눈에 띄는 물건인지라.”
"아아. 그러고 보니 저택에 선물이 가득 쌓여 있었지.”
"다 내게 잘 보이려고 보낸 거지 뭐.”
으음, 어쩐지 서운해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묘하게 축 처진 모습에 괜히 신경 쓰였는데 마침 악단이 새로운 연주를 하려는지 움직임이 분주해진 것이 보였다.
“라그나르, 우리도 한 곡 출까?”
“오늘 많이 줬잖아. 힘들지 않아?"
"내 첫 파트너랑은 추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 그러니 신사분 저와 함께 춤을 춰 주시겠어요?"
나는 격식을 갖추어 손을 내밀었고, 눈을 빛내며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라그나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기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기꺼이, 나의 레이다.”
* * *
카롤리나는 한껏 처진 기분을 다스리고는 파우더룸을 나섰다.
“저기 좀 봐요,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요?”
“그러게요. 두 사람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네요."
“한창 좋을 때죠.”
“젊음이란 그런 거죠.”
귀부인들이 꺄르르 웃는 소리를 가볍게 넘기려는 찰나 뒤이어 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저 차기 상단주 말이에요. 보면 볼수록 그분을 닮지 않았나요?”
“저만 그런 게 아니죠? 아무리봐도 프레이르 황녀님을 꼭 빼닮았는데.”
“하지만 머리색이 다르잖아요.
저 머리를 봐요. 제 어미랑 꼭 닮은 하얀색이라고요.”
비밀을 알고 있는 카롤리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가 발랄한 곡에 맞춰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프레이르 황녀님의 이야기가 나올 때 예상했지만 당연히도 그들이 입에 담고 있는 커플은 다프네와 라그나르였다.
귀부인들이 속닥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 옆을 지나가던한 여인이 헛기침하며 그들을 향해 따끔한 시선을 던졌다.
“고귀한 분을 이야깃거리 삼다니 조심들 하는 게 좋겠어요.”
디미트리 후작 부인의 경고에 그들은 입을 꾹 다물더니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 신지."
디미트리 후작 부인은 카롤리나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홀로 중얼거리고는 자리를 떴다.
'의외네. 다정하기로 유명한 후작부인이 저렇게 대놓고 쓴소리를 하다니. 하긴….'
카롤리나는 디미트리 후작 부인 이 처녀 적에 프레이르 황녀와 친우였다는 것을 떠올리며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납득했다.
'어떻게 후작 부인을 움직였나 싶더라니. 아마 그녀에게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했던 모양이지.'
참 대단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웃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부채를 펼쳐 제 얼굴의 반을 가리고는 그들을 구경하였다.
그러다 이내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허, 참네.”
다프네와 라그나르는 서로에게 몸을 맡긴 채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진중하고도 다정했다.
우아한 동작에 따라 물결처럼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다프네의 드레스 자락은 영혼이라도 깃든 듯 참 아름다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도 모르는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집중하느라 바빴다.
'저걸 누가 친구라고 한담.'
서로를 향한 미소를 보고 있자면 마치 세계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느새 곡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은 함께 테라스로 떠났다.
'연인도 아니라면서 둘이서 테라스에 향하는 이유는 또 뭐람.'
지적하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녔으나 카롤리나는 다프네가 난감해 하며 관계를 부정하던 표정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말해 주면 뭐한담. 스스로 깨닫지 않고서는 모를 텐데.'
애초에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옳았다.
'뒤늦게 알아차려서 창피해해라.'
다만 성격이 곱지 못한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