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라그나르와 함께하는 춤은 앞에서 추었던 춤과 다르게 미소가 피어오를 만큼 너무 즐거웠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 갈수록 발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다.
“라그나르, 나 발이 아파."
내 한마디에 라그나르는 곧장 나를 이끌고서 테라스로 향했다.
'조금 더 추고 싶었는데. 아쉽다'테라스에 도착하자 라그나르는 나를 테라스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힌 뒤 바로 그 앞의 커튼을 쳐서 시야를 가렸다.
마법이 걸려 있기라도 한지 커튼이 쳐지자마자 테라스는 연회장과 별개의 공간이라도 된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마워.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
구두를 벗고서 잠시 발에 휴식을 주려는데 라그나르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 빨랐다.
"발 좀 봐도 될까?"
표정이 사뭇 진지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내 발을 잡더니 천천히 구두를 벗겨내었다.
드러난 발에는 붉게 쓸린 상처가 보였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구두에 의해 다친 것 같았다.
“이게 다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그런 거야. 내 옆에만 있었으면 발이 무리하지 않았을 텐데.”
라그나르는 속상하게 이게 뭐냐며 낮게 타박하고는 상처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환한 빛에 상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순식간에 발이 매끈해졌다.
“고마워.”
“기다려 봐. 혹시 더 무리가 갔을지도 모르잖아.”
라그나르가 발을 꾹꾹 눌러 주고,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마사지를 해 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손길이 너무 간지러워 나도 모르게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 간지러워.”
“뭉쳐 있는 것 같은데.”
라그나르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살살 간지럽히는 것에 그만하라며 발로 슬쩍 미니 그가 옆으로 폭 넘어졌다.
일부러 넘어지는 것이 훤히 보여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밀어 놓고 사과도 안 하고, 일으켜 주지도 않고."
“일부러 넘어진 거잖아.”
"나는 상처도 치료해 주고, 마사지도 해 줬는데.”
"아니, 누가 봐도 일부러 넘어졌잖아?"
“파트너라고 데리고 와서 첫 춤도 다른 남자랑 추고, 두 번째 춤도 다른 여자랑 추고."
서운하다며 내뱉는 말들이 길어져 가자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으로 입을 꾹 막고 있으니 라그나르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안. 그러니까 여기서 둘이서만 놀다가 들어가자?"
달래 주려 한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라그나르가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고 보니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여 나도 따라 피식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하니 라그나르가 냉큼 내 옆에 앉았다.
"춥지 않아?"
“괜찮아.”
내 말에도 라그나르는 굳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서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빠 옷을 빌려 입은 듯 큰 옷이 흘러내릴 것 같아 꼭 쥐어 잡아야 했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크네.'
아직도 어릴 때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데….
문득 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난 오늘 성인이 됐는데. 라그나르는?"
“응?”
"드래곤은 인간이랑 조금 다르지 않아? 다 자란 거야?"
생각해 보면 당장 급한 일들을 아볼 시간이 없었다.
처리하느라 라그나르에 대해서 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시몬과 함께 들으려고 미뤘으니까.'
여러 번 각성을 거쳐서 성체가
"드래곤은 헤츨링 시기를 지나면 돼. 나는 아직 마지막 각성이 남아서 완전히 성체는 아니고."
“…그럼 아직 미성년자 같은 거야?"
“완전한 성체가 아니니 그렇게 되려나?”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 막자 라그나르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누나라고 불러 줄까? 다프네 누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면서 해맑게 웃는 것이 약올라 그의 코끝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다프네. 너 지금 나를 완전 동생 취급하고 있거든?"
"너 우리 집 막내 맞잖아.”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며 킥킥거리며 웃자 라그나르도 부정하지 못하겠다며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찬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을 한차례 흐트렸다.
그 바람결이 간지럽다며 또 함께 웃음을 터트리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 물었다.
"라그나로, 혹시 하고 싶은 일같은 것 없어? 꿈이라든가?"
드래곤에게 묻기에는 조금 이상한 표현이었으려나…?
내 질문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네 옆에 있는 건데?"
"아니. 그런 것 말고….”
나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을 해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내가 상단주가 되고, 일하다 보면 더더욱 함께 있을 일이 줄어들 것 같아서.”
“......."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도 없잖아.”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지니 정말로 동생을 타이르는 누나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뺨을 긁적였다.
“네 호위가 되는 건...”
“플뢰르가 있잖아.”
“…네 옆이 아닌 곳은 상상도 안해 봤는데.”
심각한 목소리에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고 싶어서 그래. 우리는 가족이니까.”
내가 말을 이어 가면 이어 갈수록 라그나르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구어졌다.
나는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책에서 읽었는데 드래곤은 자유로운 생명체라고 했어. 네.
가 용병 일을 했던 걸 떠올리면 여행하는 걸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라그나르가 갑자기 내 손을 꼭 붙잡으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라그나르의 보랏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 울어?"
무엇이 서러운지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며 우울한 기색을 비치는 것에 나는 놀라 멀리 달아날 것 같은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이제 내가 필요 없어졌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다시 물었으나 라그나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라그나르.”
"나 말고 다른 소중한 친구가 생긴 거지. 두 번째로 춤춘 그 여자야?"
"뭐?"
애써 미소를 짓는 라그나르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성 친구보다는 동성 친구가 마음도 맞고 편할 거야. 알아. 하지만… 아무리 이제 내가 필요 없다 해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그나르는 나름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는데 너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보니 내 입가에는 어이없는 웃음밖에 지어지지 않았다.
"내 손을 먼저 잡아 준 건 너였잖아. 그런데 이 손을 놓아 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해.”
라그나르는 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꼭 붙들고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 손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꼭 끌어안은 라그나르가 살짝 힘을 주어 당기자 나는 얼떨결에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난…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것이 많아서 분명히 네 옆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나도 알고 있어.”
라그나르의 물기 어린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아낌없이 내비치는 것에 내가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노력할게.”
라그나르는 애원하듯 내 손을 끌어당겨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먼저 잡아 줬잖아. 내 세상을 환하게 비춰 줬잖아. 네가 손을 놓아 버리면, 나를 떠나 버리면 난 어떻게 해.”
“라그나르, 내가 어떻게 널 버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정말이야?"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라그나르의 붉어진 눈가를 쓸어 주며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정말 몸만 자랐지 아직 애 맞네.”
그만 뚝 그치라며 등을 거세게 내리치자 그가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네가 하고 싶은 게 없다면 내가 만들어 줄게."
“응?”
"내 옆에도 있을 수 있고, 보람도 생길 자리를 네게 줄게.”
“그래. 네가 주는 건 뭐든지 좋아.”
눈물이 맺힌 채로 방긋 웃는 모습에 나 또한 그를 따라 활짝 웃었다.
'다 큰 남자가 우는 건 징그러울 줄 알았는데.’
저렇게 멋들어지게 차려입고서나 때문에 눈물을 보인 것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
"와,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는 말이 있던데. 선배랑 저는 역시 인연이 있는 것 아닐까요?"
활기찬 목소리에 없던 피곤도 몰려올 것 같아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 돌아가는 날 아니었니?"
“선배가 배웅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산책하다 보면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외출했는데 이렇게 딱…!”
“우리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니?"
신나게 조잘거리는 입에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초콜릿을 넣어 주었다.
"아, 맛있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렉시우스를 향해 말했다.
“얼굴 봤으니 빨리 데려가세요."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요?"
어차피 나도 클레멘스로 들어가게 될 테고, 분명히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렉시우스는 그저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무는 것이 쓸데없는 말을 아끼는 아주 좋은 습관을 들인 모양이었다.
“참! 선배, 클레멘스로 돌아가도 저랑 만나 주셔야 해요."
"바쁠 예정이야.”
“너무해. 그럼 우연히 만나도 무시하지 말아 줘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그렇지 않다고 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는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듯 환히 웃었다.
그 웃음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마주 보고 편히 대화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웃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 또한 마주 웃어 주니 그녀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렸다.
“헉! 선배가 날 보며 웃어 줬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기뻐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다니, 내가 이 아이에게 정이라도 들어 버린 걸까.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충고를 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웃으면서 보기 힘들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조심히 잘 가렴.”
마리아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다시 물었으나 나는 더 이상 말해줄 생각이 없었기에 망설임 없이 몸을 틀었다.
그것이 오스왈드에서 마리아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마리아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 또한 짐을 꾸려 클레멘스로 귀국할 준비를 마쳤다.
오빠들은 각자 탑에 돌아갔고, 엄마는 오스왈드에서의 일들을 얼추마무리하고 책임자를 세운 뒤에 넘어오겠다며 나를 먼저 보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
라그나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배에서 내리고 나니 드디어 클레멘스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마중 나오기로 한 살바토르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 이르게 왔나?'
애석하게도 살바토르의 모습은 항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짐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조금만 더 그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떨리네.”
“모든 일이 잘 풀릴 거야. 나도 도와줄게.”
믿음직스러운 말에 빙긋 웃는 그때 뒤에서 친숙하지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러면 그 도움 나도 좀 받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