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몬!”
내 예상대로 우리의 뒤에는 못 본 사이 훤칠하게 자라난 시몬이 웃으면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햇빛에 반사된 반짝이는 청은발아래 평소보다 더욱 환하게 빛나는 그의 선한 미소가 유난히 더 반갑게 느껴졌다.
“오래간만이지, 다프네. 그리고 그쪽도.”
“그쪽….”
라그나르는 애써 침착한 척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흔들리는 동공을 보아하니 갑작스러운 시몬의 등장에 당황한 것 같았다.
시몬은 라그나르가 당황하는 틈새를 놓치지 않고는 말했다.
“그쪽에게 묻지 않았나. 도움을 줄 수 있냐고.”
“…도와달라면야 도와줄 수 있지.”
라그나르가 민망한 듯 시선을 회피하며 답하자 시몬은 두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래? 사람을 찾고 있는데 찾아 줄 수 있나?”
"......."
“이름은 나스라고 하고, 몇 년 전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거든.”
"......."
“행방이 묘연해져 굉장히 걱정돼서 말이야. 정말 소중한 친구인지라.”
시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라그나르의 안색이 점차 나빠졌다.
창백한 안색 위로 미안한 표정이 보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시몬이 화가 난 듯 라그나르를 향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우리가 네 친구가 맞기는 해?"
"나는….”
“네놈이 그러고도 우리 친구냐고 묻잖아. 어떻게 편지 하나만 남겨놓고 그렇게…!”
시몬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가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끼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몸을 휙 돌리고는 내게 말했다.
"보는 눈이 많아. 일단 마차로 가자.”
“하지만 살바토르 씨를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시몬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도착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플뢰르와 크세스를 도와 짐을 챙기는 살바토르가 보였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살바토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플뢰르와 크세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나는 안심하고서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걱정할 필요 없지?"
"그러네.”
시몬의 말에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뒤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라그나르가 따라오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 있자 시몬이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 말했다.
“빨리 오지 않고 뭐해! 10년이나 기다리게 하더니 더 기다리게 할 생각이야?”
시몬의 재촉에 라그나르가 기다렸다는 듯 우리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고, 우리는 준비된 마차에 올라 탔다.
"미안하기는 한가 봐. 평소라면 얼굴에 철판 깔고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았을 텐데.”
마차에 오르기 무섭게 시몬이 꺼낸 말에 우리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시몬.”
그가 화났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내 눈빛에 시몬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서는 턱을 까닥이며 말했다.
“자, 어디 네 이야기를 들어 보자.”
나 또한 오늘을 기다렸기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의 얼굴에는 긴장이 서려있었다.
“막상 이야기하려고 하니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
라그나르는 머뭇거리는 듯싶었으나 나와 시몬의 맹렬한 시선에 곧 입을 열었다.
**
라그나르는 아픈 머리를 붙잡고서 고통을 호소했다.
분명히 자신은 다프네와 시몬을 만나기 위해서 식당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우연히 요제프를 만났었는데.
라그나르는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멍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어린 라그나르는 이제 막 태어난 새끼 양처럼 연약하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위가 온통 까맣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뿌연 시야 너머 거대한 산 하나가 보였다.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했는데 피부에 예리한 살기가 닿으며 따끔따끔한 고통을 피워 냈다.
아직 어린 그가 받아 내기는 너무 버거운 감정이 밀려들어 왔고, 이 내 고통에 가득 찬 울음소리가 널리 퍼지더니 살기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라그나르는 그저 몸을 흠칫 떨며 눈을 꼭 감고는 저를 감싼 살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라그나르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인지 원통함이 느껴지는 울음소리는 천천히 사그라들었고, 그를 감싸는 살기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산 하나가 무너지듯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라그나르는 감고 있던 눈을 떴고, 그제야 제 앞에 있던 것이 거대한 산이 아닌 저를 지키고 있던 아버지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무리 병들었다고 하지만 이거 너무 약해 빠진 것 아냐?”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점차 라그나르 쪽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드래곤의 시체를 눈앞에 두고서 꺼내는 말 치고는 꽤나 태평했다.
쓰러진 드래곤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가득 채워 라그나 르의 발에 자작하게 밟혔다.
라그나르는 놀라며 뒤로 물러나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철퍼덕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드래곤을 죽인 학살자가 관심을 보였다.
"안녕, 내 동생.”
옅은 회색빛이 도는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라그나르를 보면서 싱긋 미소 지었다.
짙은 회색 머리칼은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고, 부드럽게 휘어진 눈가 사이로 비치는 검은 눈동자는 암울한 느낌이 가득하였다.
“이렇게는 처음 보지? 반가워. 난네 형이야. 베르돌트 시어볼드.”
라그나르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베르돌트가 다가와 그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는 것이빨랐다.
"서운하게 왜 도망가려고 그래.
네가 알에서 깨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가까이에서 마주한 베르돌트의 얼굴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라그나르의 시선이 자신의 뺨에 머무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소매로 피를 대충 닦으며 환히 웃었다.
“아버지는 죽었어."
“…어째서?”
"글쎄. 너를 지키려다가?"
베르돌트는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뒤에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시체를 보며 말했다.
“웃기지. 매정하게 버린 자식에게 몇십 년 만에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동생을 지켜 달라는 것이라니. 어이가 없긴 했는데.”
"..."
"부탁을 들어주면 나를 자식으로 받아 줄까 하고 응한 나도 참 멍청했어.”
언뜻 가볍게 들리는 목소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적대감을 눈치챈 라그나르는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강하게 붙는 사내의 힘을 아직 어린 라그나르가 이겨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둥거리는 것이 귀찮았는지 베르돌트가 커다란 바위 위에 라그나르를 앉혔다.
"나는 왜 너와 다른 걸까."
“나줘."
"어째서 너는 나처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거지?”
"이거 놔!”
라그나르가 도망치려 버둥거리자 베르돌트는 그의 작은 어깨를 억세게 붙잡았다.
“? 해 봐.
“응? 라그나르. 대답해 봐."
베르돌트는 눈을 희번떡 뜨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네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야? 죽어 가는 와중에도 쓸모없다고 버린 자식에게 찾아와서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잘났어?"
라그나르의 흔들리는 시선이 베르돌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드래곤의 시체에 머물렀다.
베르돌트는 드래곤이 죽어 가고 있었다고 말했으나 쓰러진 드래곤은 아무리 봐도 살해당한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범인은 앞에 있는 베르돌트였다.
“나를 다시 찾아 줘서 기쁘다고 생각했지. 인간도 드래곤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내가 속할 곳이 드디어 생긴다고 생각했어.”
베르돌트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나를 향한 기대감을 배신하고 싶지 않아서 그를 대신해서 너를 지켜 주려고 했어. 내 동생이라고 생각하고서. 바보같이 말이야.”
그리고 터져 나온 것은 흐느낌이 섞인 미쳐 버린 듯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결국 내게로 향하는 시선 따위는 없었다는 게, 소중한 자식은 오로지 너 하나뿐이라는 게 어찌나 원망스러운지.”
붉게 충혈된 두 눈을 희번덕거리는 베르돌트의 모습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왜 죽어 가는 와중에도 끝까지 너를 지켜?”
어린 라그나르는 자신에게 향하는 원망과 분노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 감정이 끔찍하다는 것은 알수 있었다.
"어째서 너는 나와 다르냔 말이야! 어째서 너는 나와 다르게 사랑을 받고 자라났냐 묻잖아!"
라그나르는 제게 쏟아지는 악의가 무서웠고, 저를 지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몸을 떨었다.
“버린 혼혈 자식의 손에 죽어 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 한 가족이 고작 이딴 꼬맹이라니. 너무 우습잖아.”
베르돌트의 광기 어린 눈빛은 라그나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너도 나처럼 비참해져야 공평하지 않겠어?”
베르돌트는 바닥에 가득 흐르는 피를 보며 실성한 듯 웃었다.
“빌어먹을 반쪽짜리한테 죽임을 당하는 드래곤이라니. 그들이 내 가족이 될 뻔한 존재였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복수인지.”
베르돌트의 표정은 언뜻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 표정이 안쓰러워 보여 라그나르는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손을 들어 베르돌트의 뺨에 살짝 얹었다.
따뜻한 뺨에 차가운 손길이 닿자 베르돌트는 기겁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베르돌트의 두 눈동자가 거침없이 흔들렸으나 그것은 찰나였다.
그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 드래곤의 시체 근처에 섰다.
“잘 들어. 난 지금부터 네게 저주를 내릴 거야.”
“저주…?"
라그나르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움직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베르돌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드래곤의 피로 내리는 저주는 어떤 매개체를 쓰는 것보다 강력하다.
베르돌트는 그 점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피로 제 동생에게 저주를 내리기 시작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각성할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거야. 온몸이 약해지고 부서질 것 같아도 무조건 죽이고, 또 죽여.”
베르돌트의 목소리는 마치 최면처럼 라그나르의 머릿속을 잠식해 나갔다.
“네 옆에 있는 이가 너의 적이든,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든 상관없어. 모두 죽이는 거야. 이왕이면 소중한 이에게 죽는 것이 훨씬 좋겠다. 그렇지?”
“싫어. 형, 나 무서워."
라그나르는 머리를 저으며 거부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다가온 베르돌트가 그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두 눈을 보며 말했다.
“뭐가 무서워. 형이 있잖아."
인자한 미소에 라그나르는 긴장이 풀어진 듯 따라 웃었고, 그와 함께 베르돌트가 내린 저주가 라그나르에게 걸렸다.
최면에 걸린 듯 멍해진 라그나르를 데리고 베르돌트는 미련 없이 아버지의 레어를 떠났다.
일부러 타국으로 넘어가 잔혹하기로 유명한 암살자 집단에 그를 집어넣고는 다시 최면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이 널 두고 떠나지만 언젠가 꼭 데리러 올 거야. 그러니 여기에 있는 사람들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라그나르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것 외에는 라그나르에게 허락된 말이 없었다.
"모두의 원망과 두려움을 살만큼 살벌하고 무서운 암살자가 되어서 그 주변의 모두를 죽이려 하다 오히려 네가 죽어야 해. 알겠지?"
해. 그래서 각성 때 몸이 약해지고 저주의 목소리 끝으로 베르돌트울 듯 말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라그나르가 아닌 스스로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나를 비참하게 한 아버지에게 복수하게 해줘. 부디 꼭 죽어 줘.’
베르돌트의 말과 함께 라그나르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졌다.
사이가 좋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두고 떠난 형과 막연히 기다리는 자신.
최면에 걸린 라그나르는 암살자로서 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능력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압도적인 힘과 능력에 라그나르는 베르돌트의 말처럼 주변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났다.
라그나르의 세상은 먹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질척하고, 어둡게 변해 갔다.
그렇게 깊은 어둠 속에 잠길 것 같을 때 누군가가 라그나르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검붉은 피로 물든 라그나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얗고 작은 손.
라그나르는 부서질 것 같은 그 작은 손을 붙잡았고, 곧 그의 세상이 변했다.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족이 생겼고, 그녀뿐만 아니라 또 다른 소중한 친구도 생겼다.
'다프네, 시몬.'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라그나르는 눈을 떴다.
하지만 과거의 꿈을 꾼 잠시 동안 야속하게도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