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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37화 (136/185)

제137화.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너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오스왈드로 향하는 거였어. 바보같이 그것 밖에 생각하지 못했어.”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고 나와 시몬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에 잠겼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아니, 도대체! 무슨…."

시몬은 베르돌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외쳤다.

“어떻게 형제라는 이름으로 그럴 수 있냔 말이야!”

시몬은 마치 자기 일인 듯 화를 내고 있었다.

그만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어째서 아버지에게 품은 원망을 동생인 네게 풀어 내냐고. 그게 약자를 괴롭히는 것과 뭐가 달라! 비겁한 새끼 같으니라고!"

시몬이 끔찍하다며 몸서리를 치자 라그나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이런 말할 자격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정말 보고 싶었어.”

“....."

우리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라그나르는 웃었다.

라그나르의 미소가 참 슬퍼 보였다.

"내가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라그나르의 사과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시몬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납치를 사주한 그 미친놈이군."

“아마 예상과 다르게 내가 죽지 않아서 직접 죽이러 찾아온 것 일거야.”

미친 살인마라며 중얼거리는 것에나 또한 그때를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구멍 사이로 보았던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기에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면 라그나로, 그자가 건 저주는 풀린 게 맞아?”

내 물음에 라그나르는 잠시 멈칫하더니 안심하라는 듯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내 대부가 누구인데.”

“대부가 누구인데?"

시몬의 질문에 라그나르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초대 황제의 친구. 클레멘스 수도 근처의 산맥에서 사는 고룡.”

“클레멘스의 수호룡?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셨는걸.”

나는 입을 막으며 놀란 것을 숨기지 않았고, 시몬 또한 깜짝 놀란듯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과 인간은 이렇게나 달라.

소중한 이들이 떠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라그나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함께 어울리기 더더욱 힘들 거야.”

눈썹을 한껏 아래로 내린 채 울상을 짓는다고 우리가 퍽이나 수긍하겠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는 저 입이 얄미워 나와 시몬은 동시에 소리쳤다.

"누가 그딴 멍청한 소리를 지껄여!"

“누가 감히 그래?”

마차 안을 가득 채운 우리의 큰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 놈 있으면 내 앞으로 데려와."

시몬이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 또한 단호히 말했다.

“고룡을 데리고 와도 한마디 해줄게. 우리의 우정을 얕보지 말라고.”

“친구를 하는데 종족이 구애받는다는 것은 또 처음 듣는군. 정말이지 멍청한 소리야.”

시몬이 한심하다며 혀를 차자 라그나르가 물었다.

“화 풀렸어?”

“사연을 들었는데 어떻게 더 화를내. 내가 인간쓰레기처럼 보이냐?”

시몬이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팍찌푸렸다.

그에 라그나르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버럭 화를 냈다.

“당장 결투부터 할까? 친구고 뭐고 인정사정없이?"

“그건 싫은데.”

“그럼 그냥 입 다물어.”

라그나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민망한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생각 정리를 끝냈는지 라그나르를 보며 말했다.

“용서할게. 용서는 하는데.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정말 친구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서 결투하는 거야. 봐주는 것 없이."

진심이 가득한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대화가 정리되자 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우리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해야 할 일?”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고, 똑같은 표정을 짓는 둘을 보며 나는 웃으며 말했다.

"타임캡슐이 남았잖아.”

* * *

예정대로였다면 작년 가을의 가면 축제에서 열었어야 했던 타임캡슐은 벌써 묻힌 지 11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작년에는 라그나르도 없었을 뿐더러 나 또한 클레멘스로 올 여건이 되지 못했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클레멘스로 돌아오면 열어 보기로 시몬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미루어진 덕분에 둘이 아닌 셋이서 함께 열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작년에 열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더라면 라그나르와 함께 열지 못했을 테니까.”

내 말에 시몬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의 보는 숲속의 집을 반갑게 맞이할 틈도 없이 우리는 가장 먼저 타임캡슐이 있던 곳을 파내었다.

라그나르의 손짓 한 번에 단단히 굳어진 땅을 메운 흙더미가 파였고, 그 아래 우리가 넣어 둔 타임캡슐 상자가 보였다.

어쩐지 감격스러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빤히 보고 있자니 시몬이 직접 나서 구멍 속에서 상자를 꺼내었다.

흙이 가득 묻어 있는 상자의 표면은 흐른 세월만큼 낡아 보였으나다행히 내부는 멀쩡했다.

우리는 상자 속에 담긴 세 개의 주머니를 보고서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각자의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누가 먼저 열어 볼까.”

시몬의 물음에 나와 라그나르는 동시에 시몬을 가리켰다.

“원래 이런 건 말 꺼낸 사람이 선두로 하는 거야.”

라그나르의 말에 맞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몬이 피식 웃고는 거침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작지만 고급스러운 보석 상자였다.

“어렸을 적에 선물받은 반지인데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더라고."

동그랗고 투명한 보석이 박힌 평범한 반지처럼 보였다.

내가 반지를 빤히 쳐다보자 시몬이 갑자기 반지를 분리했다.

그러자 반지는 아래로 향한 반원모양, 중간 부분은 일자 모양, 위로 향한 반원으로 보석이 나뉘어 총 세 개가 되었다.

"너희와 앞으로도 계속 친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어. 그리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네.”

시몬은 부끄러운지 주춤거리다가 우리의 손 위에 반지를 올려 주었다.

"마침 세 개고 하나씩 나눠 가지자."

“이렇게 작은 걸 누구 손에 끼라고.”

라그나르는 투덜거리면서도 위로 향한 반원 모양의 보석이 박힌 반지를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꼈다.

나 또한 일자 모양의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내 검지에 꼈다.

시몬이 남은 반지를 자신의 새끼 손가락에 끼우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다음은 라그나르.”

시몬의 지명에 라그나르가 자신의 주머니를 열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돌돌 말린 세개의 종이 뭉치였다.

나랑 시몬은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고,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초상화네?”

“우리 어린 시절 초상화야.”

첫 번째 종이에는 내가, 두 번째 종이에는 시몬이 마지막 종이에는 활짝 웃고 있는 우리 세 명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소중해서 계속 간직하고 싶었어.”

라그나르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고, 나는 신기해 하며 초상화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사진으로 옮겨 놓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솜씨인지라 우리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쪽에 재능이 있는 줄 몰랐어."

“그러게.”

나와 시몬의 입에서 감탄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라그나르가 피식하고 웃었다.

꽤 기뻐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리면서 꽤 즐거웠던 것 같아.”

“그렇구나.”

지금껏 함께 지내 왔는데도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어쩐지 소꿉친구를 실격해도 할말이 없겠는걸.

“둘에게 선물로 줄게. 난 이거면 충분해.”

라그나르는 가면을 들고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의 어린 시절 그림을 품에 안고서 말했다.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고맙다.”

이렇게 라그나르의 타임캡슐도 끝이 났으니 남은 것은 내 것뿐이었다.

“열기 싫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열어야겠지.

나는 천천히 주머니를 풀어 그 안에 들어 있는 세 개의 편지를 꺼냈다.

"난 미래의 우리에게 편지를 썼어."

“편지를?”

“셋이 함께 어린 시절의 편지를 본다면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어.”

말해 놓고도 부끄러워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말에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받은 편지 봉투를 열었다.

“소중한 내 친구 라그나르에게.”

“처음엔 무서웠던 내 친구 시몬에게.”

“두 사람 다 뭐 하는 거야!”

사이좋게 소리를 내서 읽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리 내서 읽지 마! 부끄럽잖아."

“읽으라고 써 준 것 아니야?”

시몬이 장난스럽게 말했고, 라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얄미운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속으로 읽으라고.”

“그것보다 서운한데. 라그나르는 소중한 친구고, 나는 무서웠던 친구야?”

"그거야 처음에 네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고, 시몬은 장난이라며 피식 웃으면서 다시 자신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괜히 편지를 썼어. 부끄러워 죽겠다.'

나는 두 사람에게 건네준 후 남은 내 편지를 뜯어보며 과거의 나와 마주했다.

'안녕, 미래의 나?'

그리고 첫 문장을 읽자마자 편지를 덮어 버렸다.

생각보다 더 부끄러워 읽어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느새 편지를 읽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편지를 봉투 속으로 집어넣었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읽어 봐야겠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읽기만 하면 되잖아.'

자연스럽게 다 읽은 척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편지를 다 읽고는 환하게 웃었다.

"편지 고마워.”

“잠시 어린 다프네를 만나고 온 느낌이었어.”

"다행이네.”

둘은 장난을 치고 싶은지 시시덕거리며 웃었으나 내가 굳은 표정을 짓자 사이좋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편지가 전부가 아닌가 봐?

주머니에 뭐가 들은 것 같은데?"

시몬의 지적에 나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보육원을 탈출할 때 챙겨 온 도장을 함께 넣어 놨었지.'

역시 이곳에 보관하기를 잘했다.

만약 넣어 놓지 않았더라면 어디 두었는지 한참이고 생각해 내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두 사람의 관심 속에서 주머니에 넣어 둔 도장을 꺼내었다.

“사실 잃어버릴까 봐 타임캡슐에 보관해 둔 물건이야. 미래의 나에게 주려고.”

나는 도장을 살펴보다가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있는 문양을 한참이고 살펴보았다.

수수한 꽃이 이리저리 얽혀진 문양은 도무지 어디에서 사용되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으음.”

“음.”

나와 마찬가지로 시몬과 라그나르도 도장에 시선을 두었으나 우리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도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기는 한데."

시몬의 중얼거림에 라그나르 또한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역시 잘 모르겠어.”

“나도."

“이제부터 차차 알아 가면 되지.

혹시 어디에 쓰이는지 알게 되면 내게 알려 줘.”

두 사람은 그 정도야 어렵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디서 얻은 도장이야?"

“확실히. 어렸을 적에도 보여 준 적 없었잖아.”

시몬의 물음에 라그나르 또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는 도장을 만지작거리다 딱히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말했다.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탈출하면서 훔친 도장이야. 혹시 나중에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챙겼었거든.”

내 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서는 도장을 노려보았다.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노려보는 것이 이러다가 도장이 부서질 것 같아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정식으로 상단주가 되었으니 많이 바빠지겠네. 나야 언제나 바빴지만."

시몬은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눈가를 누르며 고개를 저었고, 작위적인 그 모습에 우리가 작게 웃었다.

“라그나르는? 앞으로도 계속 다프네의 호위로 있나?”

“아니. 하고 싶은 게 생겼어.”

"정말?"

여기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다더니.

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어보자 라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건데?"

우리가 궁금증을 가득 안고 물어보자 라그나르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밀.”

그 말과 함께 라그나르는 다음 날 며칠만 자리를 비우겠다며 떠났다.

그리고 그사이에 내게 반갑지 않은 초대장 하나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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