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헤로니스 공작가?"
나는 서류를 살피다가 플뢰르가 가져다준 편지에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마리아에게서 온 편지인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발신인은 헤로니스공작 부인, 유니스였다.
“공작 부인은 참 좋겠네. 누구는 바빠 죽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한가 하게 편지로 초대장이나 보내고 말이야.”
편지를 찢어 버릴까 했으나 애써 이성을 잡고서 침착하게 답장을 써 내려갔다.
'초대에는 감사하지만, 자리를 비울 여건이 안 되어 다음 기회에 뵙고자 합니다.'
이런저런 수식어들을 예의 바르게 덧붙였으나 결국은 거절 의사를 밝힌 편지였다.
감히 일개 평민이 공작 부인의 청을 거절하냐고 화를 내도 번복할 생각은 없기에 망설임 없이 헤로니스 공작가로 편지를 보냈다.
그로부터 돌아온 것은 예상외의 답장이었다.
* * *
마리아는 헤로니스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인 콘란드에게 굉장히 혼이 났다.
“가족들이 걱정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가출을 해?"
혼자 떠나 그리 즐거웠냐며 이어지는 신랄한 꾸중에 마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어딜 보아도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았기에 마리아는 입을 다물고 용서를 구했다.
'예전이었다면 여러 변명을 했겠지….’
걱정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며 제 입장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과보호만 더 심해질 거야.'
마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러워 보였는지 옆에서 지켜보던 유니스가 다가와 콘란드를 말리기 시작했다.
“여보, 마리아도 걱정시키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거예요."
"아니라니? 작정하고 항구에서 탈출했다고 하는데."
“어린 나이에는 새로운 경험도 해 보고 그래야죠. 그리고 마냥 놀러 다닌 것도 아니잖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유니스는 여행 도중에 다친 글렌공작을 도와준 일화를 꺼내며 마리아의 어깨를 도닥였다.
“저는 혼자인 와중에도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않은 제 딸이 너무 자랑스러운걸요. 언제 이렇게 자라났는지 너무 기특해요.”
유니스의 칭찬이 이어지자 콘란 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했다간 반역자를 도왔다며 책임을 물어야 했을 수도 있었던 일이야.”
“하지만 결국 반란이 성공해 글렌 공작가가 새로운 황실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면서요. 글렌 공작가에서도 감사의 의미로 마리아를 은인처럼 대해 줬다고 들었어요."
유니스의 뿌듯한 목소리가 올라 갈수록 마리아는 얼굴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마리아는 자세한 내막을 알릴까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아빠가 상단에 해코지하게 될지도 몰라.'
마리아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분명 직접 나설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고민하지도 않고 제가 겪었던 모든 일을 전했을 것이다.
부모님께 숨길 이유가 뭐가 있으랴 하며 너무나 즐겁게 말했겠지만, 마리아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나부터 달라져야 가족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테니까.'
언제까지나 자신을 울타리 안에 넣어 두고 보호하려는 것이 보여 입안이 썼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곧 자신을 용서할 것을 알기에 씁쓸함을 감추고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콘란드도 유니스도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는 둘만의 대화에 빠져 들어 있었다.
“마리아는 잘 해냈잖아요.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안아 주고 나서 혼을 내도 늦지 않을 거예요.”
“정말이지.”
마리아의 생각은 얼추 맞았다.
조용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모습에 콘란드는 화를 내는 것을 멈추고는 자신의 소중한 딸을 품에 끌어안았다.
“제발, 부다. 다음부터는 이런 짓을 하지 말려무나. 이 아비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또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콘란드는 화를 내었으나 그럼에도 결국 소중한 딸아이에게 모진 말을 더 뱉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착한 자신의 딸은 다음부터는 절대 말썽 따위 부리지 않고 안전한 곳에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아버지의 말에 마리아는 가슴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겠노라 입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마리아의 가출 문제는 이렇게 평화롭게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마리아는 앞에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통 식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 유니스가 물었다.
“마리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 그냥….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리아는 입을 열 듯하다가 이내 다물었다.
유니스는 그 점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작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혹시 연애 문제라도 생긴 걸까?”
유니스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콘란드와 카스토르의 시선이 매서 워졌다.
“뭐? 그게 정말이냐?”
콘란드가 불쾌한 목소리로 다그치듯 묻자 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연애라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아요. 누님께 접근하는 멍청한 놈들은 주제 파악을 할 줄 아는 놈들이었는걸요.”
카스토르가 자신이 적절한 선에서 잘 막아 내었다며 자랑하자 콘란드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 네 누이는 네가 지켜야지.
별것도 아닌 놈들이 다가오면 망설이지 말고 쳐내려무나.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
"예, 아버지.”
마리아가 그 대화에 끼어든 것은 반쯤 충동적이었다.
“왜 카스토르가 저를 지켜요.”
뚱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마리아는 제가 말을 꺼내 놓고서도 놀랐다가 이내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보호받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가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요.”
카스토르가 서운한 표정으로 마리아를 불렀다.
마리아는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걱정과 서운함에 얽매이는 것을 느끼며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물을 들이켰다.
어색해진 상황 속에서 유니스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참! 이번에 베네디토 상단의 새로운 상단주가 드디어 귀국했다면 서요?”
베네디토의 이름이 나오자 카스토르의 미간이 구겨졌고, 마리아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맞아. 오스왈드에서 벌인 일이 꽤 안정되었는지 아카데미를 졸업하자마자 귀국했다더군."
“이제 갓 졸업한 거예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기도 하지.”
유니스의 칭찬이 커지자 카스토르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봤자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평민일 뿐이에요. 돈줄을 좀 쥐었다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그저 그런 인간 중 하나겠죠.”
“카스토르, 선배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마리아는 유니스의 입에서 나오는 다프네에 대한 칭찬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카스토르가 꺼낸 말에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선배가 어딜 봐서 그런 사람이라는 거야?”
“하지만 누님. 그러고도 남을 사람일 게 분명해요."
“네가 던전에서 저지른 잘못으로 쓴소리를 조금 들었다고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면 어떻게 해."
마리아의 말에 카스토르의 입가가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표정에는 듣기 싫다는 기색이 가득했으나 마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선배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그러니 다음에 선배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아무리 너라도 나 정말 화낼 거야.”
평소의 마리아답지 않은 단호한 모습에 유니스와 콘란드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단주가 마리아에게 잘해 주었나 보네.”
“…네. 정말 잘해 줬어요.”
마리아는 다프네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볼을 붉혔다.
덕분에 자기를 가두고 있던 좁은 세상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고, 책임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변화시킨 다프네가 싫기 는커녕 너무 좋았다.
존경의 마음이 어찌나 큰지 한편으로는 다프네가 자신의 언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만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 참았지.'
나름 몇 달 동안 다프네를 지켜보았기에 내린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유니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택에 한번 초대하는 게 어떠니? 네게 그토록 잘해 주었다니 나도 인사를 한번 하고 싶은걸.”
"유니스.”
콘란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유니스를 불렀으나 이미 기대감으로 차오른 유니스의 눈빛을 보자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조용히 허락하려는 그 순간 의외로 마리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봄이 되었으니 선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분명해요.”
단호한 대답에 유니스가 눈을 깜빡였다.
“물론 만나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참을래요. 저는 선배를 방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 후로 더는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에 마리아는 유니스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난 뒤 유니스가 꺼낸 말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참, 마리아. 얼마 전에 베네디토상단에 초대장을 보냈단다.”
“네?”
티타임 중 갑작스럽게 꺼낸 유니 스의 말에 마리아가 깜짝 놀라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초대장이라니요?"
“네게 잘해 줘서 고맙다고 저택에서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보냈는데 바쁘다며 거절하지 뭐니.”
분명 선배라면 주변의 평판도 평판이지만 상단의 일을 가장 중요 시할 사람이니 그럴 것 같았다.
마리아는 유니스가 멋대로 초대장을 보낸 것이 화가 났으나 다행히도 다프네가 거절했다는 말에 따로 사과의 편지를 보내고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
“그래서 상단에 한번 찾아가겠다고 다시 편지를 보냈어.”
“네?”
“그랬더니 언제든 반갑게 맞이하겠다고 그러지 뭐니. 그러니 우리 내일 함께 가 보는 게 어떨까?"
마리아는 유니스의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어떻게 엄마는 내 말도 듣지 않고 그렇게…!"
“마리아?”
“제가 말했잖아요! 전 선배를 방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엄마는 그저 네가 상단주를 만나고 싶어 하니까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어서….”
“엄마는 왜 그렇게…."
유니스가 당황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마리아는 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상단의 일이 좀 한가해지면 제가 알아서 찾아갈 생각이었어요.
당연히 만나고 싶었지만, 저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고요."
“마리아….”
"엄마가 제게 어떤 것이든 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아요.”
마리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화를 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서 방을 빠져나갔다.
엄마에게도 미안했으나 마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그저 어떻게 다프네에게 사과를 건네야 할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 * *
답장을 보낸 다음 날 헤로니스공작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상단을 찾아왔다.
'오란다고 진짜 오면 어떻게 한담.'
나는 창문 밖에 보이는 화려한 마차를 보며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가 집에서 내 이야기를 한 걸까? 갑자기 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나는 손님을 응접실에 모시고 귀하게 대접하라 명한 뒤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찾아가기로 했다.
헤로니스 공작가 때문에 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따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감히 대귀족을 기다리게 했다고 화를 내도 마리아가 알아서 막아주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일을 마친 뒤에 응접실로 향했다.
대귀족의 등장에 상단의 모두가 긴장한 듯해 보였으나 나는 그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너무도 싫고 끔찍한 사람을 앞에 마주하게 되겠지만.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쯤은 지겹게도 연습했으니 어려울 것도 없다.
나는 노크를 하고는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부드럽게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응접실 안에는 차를 마시던 유니 스와 좌불안석인 마리아, 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카스토르가 보였다.
나는 세 사람을 보며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예의를 갖춰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곳의 상단 주인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을 만나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쨍그랑-
유니스의 손에 들린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큰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인사가 끝남과 동시에 유니스의 표정에 경악이 서린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