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건물은 오래되었는지 꽤 많이 낡아 있었고, 주변에 가득 찬 잡초는 정리되지 못한 채 우중충한 기운을 뿜었다.
나는 철창 대문 옆에 쓰인 팻말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일곱 살까지의 나쁜 기억이 가득한 곳.
생각보다 더욱 처참하게 망가진 광경을 바라보다가 팻말에 적힌 글을 읽었다.
“황립 보육원….”
나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라그나르에게 물었다.
“왜 여기로 온 거야?”
“이곳의 아이들은 별 제약 없이 재단에 들일 수가 있잖아.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야.”
“그닥…."
좋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물론 언젠가 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달까.
“베일을 씌운 이유가 내 얼굴을 가리려 한 거였어?”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라그나르의 말에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온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야?"
“아니.”
“…그럼?"
"나는 안 잊었거든. 여기 놈들이 네게 한 참혹한 짓들."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에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뒤뚱뒤뚱 뛰어오는 늙은 사내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한껏 들뜬 목소리에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펴려다가 어차피 베일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껏 표정을 구겼다.
‘시하브 프리다.'
나를 괴롭히는 보육원 직원들을 방조한 질 나쁜 사람.
아직까지 보육원장 자리에 앉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의 등장에 라그나르에게 더 묻지도 못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하브는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서 그저 환히 웃으며 라그나르를 응대하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나를 향해서 의문섞인 시선을 던져 대는 것 또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후, 후원을 해 주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후원을 해 줄만한 아이가 있는지 보고 싶어서 방문했다. 겸사겸사 보육원 후원도 고려 중이고.”
라그나르는 마당부터 건물까지 천천히 바라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정말 황립 보육원이 맞나? 형편없군.”
시하브는 라그나르의 말에 잠시 표정을 굳혔으나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빙긋 웃으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겉보기와 다르게 내부는 꽤 깨끗하답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라그나르가 불쾌하다는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시하브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니 꽤 즐겁기도 하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어울려 줘 보도록 할까.'
시하브는 라그나르의 깍듯한 태도에 놀라 두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께서는…?"
“내가 재단장이고 이분은 재단에 익명으로 후원해 주시는 아가씨일세. 아가씨께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후원을 할까 고려 중이지.”
시하브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머릿속에서 얼추 생각 정리를 끝낸 모양이다.
"아가씨께서 걷기에는 길이 조금 거칠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를 향해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질 때는 언제고 금세 변하는 태도에 기가 찼다.
나는 헛웃음을 한 번 짓고는 라그나르의 손을 붙잡고서 천천히 그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보육원은 예전의 모습 따위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낡아 빠진 건물은 밟을 때마다 나무가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높은 천장에는 거미줄이 가득하였다.
하지만 형편없는 건물의 모습과 달리 보육원장실은 예전과 같았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도 더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안내에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숨어 있었던 소파네.'
그때는 그렇게도 위급하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저 피식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나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라그나르와 시하브의 대화를 놓칠 새라 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보육원이 알다시피 황립보육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이들의 관리도 아주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과시하는 그의 말에 라그나르가 피식 웃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보육원장실을 제외하고는 감히 황립이라는 단어를 붙여서는 안 될 것 같은데.”
“보, 보기에는 이래도 아이들에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대하고 있답니다. 다른 곳과 다르게 절대로 굶기지도 않고, 학대하지도 않지요.”
“그래?"
“예, 물론이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원한다면 교육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답니다.”
자랑스럽게 꺼낸 말에 라그나르의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시하브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서는 더욱 거들먹거렸다.
“예전에 보육원의 창고에 화재가 일어난 후로 황실의 지원금이 줄어들어 겉보기에는 이렇지만….”
시하브는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어릴 적 이 보육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아이들이 부모의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신경 쓰고, 또 신경 썼답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학대당한 본인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시하브는 제 자랑을 줄줄 이어 갔다.
제가 얼마나 이타적인 사람이며,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길거리에 돌아다녀도 보육원 아이와 일반 가정집 아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중에서도 특별한 아이가 한 명쯤은 있겠지?”
"예. 그렇지요.”
라그나르의 말에 시하브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반응에 라그나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데려와 보게.”
“그, 사실은 아이들이 오늘 소풍을 나간지라 보육원에 없답니다."
시하브는 나름 침착하게 말을 내뱉으려고 했으나 라그나르는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렇다면 돌아가도록 하지. 아가씨께서는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아닌지라.”
라그나르의 단호한 반응에 시하브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는 애써 담담히 말을 꺼낸 것처럼 연기하였으나 우리의 눈에는 그저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몸을 사리는 비겁한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그것이….”
라그나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나 또한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일어났다.
“후원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지. 수고하게.”
“자, 잠시만요. 나으리, 잠시만…!"
시하브는 라그나르의 옷자락을 놓쳤으나, 포기하지 않고 내 드레스자락을 붙잡았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거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라그나르가 검을 뽑아 시하브의 목에 겨누었다.
시하브는 제 목에 닿는 날에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라그나르를 보며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언뜻 알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서 당한 모욕을 톡톡히 갚아 주기라도 할 모양인데.'
도장 이야기가 나왔을 때 표정이 심상치 않기는 했었는데 설마 정말 그것일까.
'이렇게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통쾌하기는 하네.'
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며 가만히 서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원장님? 안에 계세요?"
어디선가 들어 본 익숙한 목소리였다.
열린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꽤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은 어린 시절 내가 쓸모가 없어지자 나를 내쳤던 울리네였다.
“꺄악! 원장님! 뭐야, 당신들 누구야!”
“조용히 하지 못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목소리를 높여! 죄송합니다, 나으리 그리고 아가씨.”
울리네는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다가 시하브의 꾸중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저, 저는 원장님이 걱정되다 보니까…. 그, 누구세요?"
울리네가 우리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 갔고, 라그나르는 피식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분명 오늘 방문하겠다고 연락을 넣었는데 직원에게 사전 통보조차되어 있지 않은 건가? 보육원 사정도 알 만하군.”
라그나르는 더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듯 미련 없이 방을 박차고 나가려 했다.
“사실은 아이들이 부족하다 보니 혹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서 간절히 외치는 말에 우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러자 시하브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어 갔다.
"다음번에 찾아오실 때에는 정말로 훌륭한 아이들을 보일 테니 한번만 다시 방문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도 후원이 간절한가? 자네는 자존심도 없나?”
“부, 부탁드립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 있도록….”
라그나르는 마치 쓰레기를 보듯 시하브를 내려보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2주일 뒤에 다시 방문하도록 하지.”
“예, 예!”
우리는 마중을 나오겠다는 시하브의 호의를 거절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베일을 벗어 던졌다.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어.”
어린 시절의 악몽을 만들어 준 데크게 한몫한 인간이 고작 이렇게 시시하게 짝이 없는 놈이었다니.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고작 그딴 놈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재능 있는 아이를 예술 재단에서 후원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아이들은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지적에 라그나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차차 보면 되는 거잖아."
“라그나르.”
더는 기다릴 수 없다며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생각해 봤는데 역시 널 돕고 싶어.”
“결국, 이것도 널 위한 행동이 아니란 소리야?”
“끝까지 들어 봐.”
라그나르는 재촉하지 말라며 화를 내려는 나를 진정시켰다.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고, 예술재단을 만들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야. 다만 그걸 이용해서 겸사겸사 일을 더 하려고."
“그 일이 뭔데?”
“네 끔찍했던 악몽을 지워 주고 싶어.”
난 괜찮다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라그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욕심이야. 널 괴롭혔던 놈들의 흔적이 멀쩡히 남아 있는 걸 보기 싫거든.”
“그래서 그들을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인간들 사이에 섞여 살아가는 중이니 그들의 방식에 맞춰가는 게 맞지.”
라그나르는 방긋 웃으며 설명을 이어 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알아보니 여전히 보육원에서의 학대는 여전히 있었고, 황실에서의 후원도 끊긴 상태였지.”
나는 잠자코 라그나르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 학대에 대한 합당한 증거를 찾아서 쫓아내려고."
“…뭐?"
“황립 보육원을 바로 세워 시몬의 명성에도 도움을 줄 겸, 네게 거슬렸던 기억을 지워 줄 겸, 또 내 욕심을 맘껏 이룰 겸.”
라그나르는 그 말을 끝으로 활짝웃었다.
“그전에 좀 빌빌거리는 꼴도 보고 싶었고.”
과거가 들쑤셔진 기분에 혼자 성을 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내가 말없이 입술만 잘근 물자가 진 내 를라그나르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해 주며 웃었다.
"어때? 내가 이 일 계속해도 괜찮을 것 같아?”
“그걸 왜 내게 물어.”
“인생 선배로서 알려 줘. 나 합격이야?”
나는 옹졸하게 입술을 물고 있다가 천천히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라그나르가 다행이라며 웃었다.
"내일 기사단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찾아가 그를 고발하자. 그리고 내가 보육원장 자리를 가져올게.”
“설마 보육원장이 되려고?"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니 꽤 괜찮지 않아?"
아이들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말에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안 어울리는구나.”
“아니야.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래.”
“거짓말."
“진짜래도?”
우리는 내일 또 함께 보육원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의 계획과는 다르게 다음 날 보육원으로 향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