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역시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봐.’
어린 시절 최악의 기억을 안겨 준 보육원을 방문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거세게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일까.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자려 했으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거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안 와..'
나는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면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형편없어서 놀랄 정도였지.
그딴 놈 때문에 엄마와 내가 그런 일을 겪었어야 했다는 게 억울할 정도야.'
나는 우러나는 차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육원장은 친구들을 팔아넘기는 짓을 저질렀다고 했으니 그에 합당한 벌도 받을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어렸을 적 엄마에게 넘겨주었던 서류가 그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함께 있었던 도장의 용도를 밝혀야 했다.
‘보육원장을 심문하면 정체를 알려 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우러난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번쩍이며 번개가 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데 곧이어 거대한 천둥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 위에 달린 조명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이리저리 흔들렸고, 찻장 안에 들어 있던 그릇들이 모두 떨어져 큰 소리를 내었다.
“꺅!”
앞에 놓인 찻잔 또한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안에 가득 담긴 뜨거운 찻물 또한 엎질러졌다.
“젠장!”
나는 우선 팔로 머리를 감싸 보호했고, 곧바로 주변에 보이는 테이블 아래로 들어갔다.
그나마 안전한 곳으로 피하고 나니 엉망이 된 바닥이 두려울 정도로 거세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진인가?"
이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라그나르는 어디 있지? 키키도 데리고 와야 하는데….’
이 정도 지진이면 잠에서 깨어났을 텐데 라그나르도 키키도 어째서 반응이 없는 걸까.
'혹시 가구에 깔리기라도 했나?'
걱정이 피어나기 무섭게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프네!”
“라그나르!”
슬쩍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니 라그나르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라그나르의 품 안에 안전하게 안겨 있는 키키를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땅을 가득 울리는 진동 또한 서서히 줄어들더니 어느새 지진이 멈추었다.
지진이 멈추자마자 라그나르 품에 안겨 있던 키키가 내 쪽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놀라 벌벌 떠는 키키의 몸을 쓰다듬어 주며 따뜻한 온기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라그나르는 나를 테이블 아래에서 꺼내 주며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난 괜찮아. 너는?"
“괜찮기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살펴보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어느새 내 발에 머물렀다.
"왜 다친 걸 숨기려고 해."
"아. 정말로 몰랐어.”
급박한 상황에 찻물이 내 발에 쏟아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몸을 피하느라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뜨거운 찻물이 닿은 피부가 화상을 입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아파."
모를 때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었는데.
화끈한 통증에 괴로움을 호소하자 라그나르가 나를 안아 들었다.
"앗.”
무릎 아래에 손을 넣고 제 품으로 끌어안는 것에 깜짝 놀라 내가 딱딱하게 굳자 라그나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지진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니까 우선 밖으로 나가자."
"나 혼자 걸을 수 있는..…."
“치료는 밖에서 해 줄게.”
"으응.”
내 말은 가볍게 무시를 당했으나 워낙 흉흉한 기세였기에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민망한걸.’
이 정도야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데 과보호를 받는 느낌이었다.
'하긴, 라그나르는 언제나 내가다치는 것에 예민했지..'
내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시절을 기억하는 라그나르는 내가 다리를 다칠 때마다 유난히 더 신경을 쓰는 듯했다.
'이젠 괜찮은데.'
약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가도 어째서인지 걱정 받는 것이 기분이 좋아 결국 피식 웃었다.
라그나르의 가슴에 편히 머리를 기대며 슬쩍 고개를 올려다보니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며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래에서 봐도 잘생겼구나.'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다가 괜히 부끄러워 얼굴을 슬쩍 가렸다.
'자다가 일어나도 괜찮네. 그에 비하면 나는….’
요새 몰아치는 일에 피로가 누적 되었으니 분명 얼굴빛도 좋지 않겠지.
손에 닿는 피부가 꺼칠꺼칠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닌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고개를 내리는데 이번에는 얇은 잠옷이 눈에 띄어 조금 민망해졌다.
‘별것도 아닌데 왜 괜히 의식하고 그러는 거야.'
얇은 천 사이로 혹시 안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잠옷을 꼭 쥐고 있는 사이 어느새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주변이 엉망이네.”
보호 마법이 펼쳐진 주변은 그래도 밖과 비교하면 멀쩡한 편이었다.
라그나르는 나를 품에 안은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멀쩡한 벤치에 나를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내가 벤치에 앉자마자 키키가 내 품에서 뛰어 내려갔고, 내 주변을 맴돌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라그나르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내 발을 들어 상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잠이 안 와서 따뜻한 차를 좀 마시려다가 그런 거야.”
내 잘못이 없다며 나름 분위기를 풀려 유하게 말해 보았으나 라그나르는 웃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발에 손을 얹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이 발의 상처를 헤집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차가운 손길에 뜨거운 열기가 진정되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왜 이렇게 더운 것 같지.'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황급히 물었다.
“라그나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아, 미안.”
불태울 것처럼 쳐다볼 때는 언제고 당황하며 허둥지둥 상처를 치료하는 라그나르를 보며 나는 괜히 손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혔다.
‘의식하지 말자.'
복작복작했던 어릴 때와 다르게 다 크고 나서 둘만 남으니 괜히 의식하게 되어 이래저래 골치가 아팠다.
'고용인이라도 하나 뽑을까.'
나는 엉망이 된 주변을 살펴보면서 슬쩍 물었다.
“역시 우리 둘만 있으니 지내기가 조금 불편한 것 같은데. 고용 인이라도 한 명 뽑을…."
“싫어.”
내 말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식사나 청소도 그렇고."
“식사도 청소도 다 내가 준비할게. 다프네는 신경 쓰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
“나야 고맙기는 하지만."
라그나르의 빠른 대답에 나는 뺨을 긁적였다.
여기서 더 권유를 하면 금방이라도 삐질 것 같아 말을 아꼈다.
'마법은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멀쩡해진 발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갑자기 라그나르가 발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 황급히 발을 뺐지만 이미 닿을 것은 다 닿았다.
“라그나르!”
내 외침에 라그나르가 심술궂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기라도 했는지 뺨이 뜨거운 게 느껴졌다.
조용히 라그나르를 흘겨보자 그가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상처를 치료하면 됐지 거기에 왜 입은 또 맞춰가지고.
민망함과 별개로 화끈거리는 통증이 가라앉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키키의 등을 쓰다듬으며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어느 정도 진정될 쯤 라그나르가 자신의 망토를 들고 나오더니 내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아직 밤공기가 차.”
“…고마워."
그 대화를 끝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망토를 여며 쥐면서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말을 돌렸다.
“날씨도 궂은데 지진이라니."
나는 보호 마법 위로 거세게 부딪히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몬이 고생하겠는데."
“그러게.”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갑자기 강도 높은 지진이 일어났으니 분명히 정신없어질 것이 뻔했다.
“재해가 따로 없네."
숲속은 위험하니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쪽에서 키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끼잉-
키키가 보호 마법 바깥쪽을 향해 계속 경계 섞인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라그나르가 그곳으로 가 보더니 이내 당황한 듯 빤히 밖을 바라보았다.
“이 기운은….”
“왜 그래?”
라그나르를 따라 바깥으로 다가갈수록 오싹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끔찍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이 낯설지 않은 건 단지 기시감만은 아니었다.
특유의 어둑하고 진득한 기운이 밖을 유영하고 있는 게 두 눈에 보일 정도였다.
어찌나 독한지 보호 마법 바깥쪽으로 나무들이 어둠에 잠겨 시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라그나르도 나도 많이 겪어 보았기에 저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던전이 생겼어.”
라그나르의 말에 나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멘스 수도에 던전이 생긴 적이 있던가?”
"아니."
라그나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내가 읽어 본 역사서에는 없었어. 그리고….”
“그리고?”
“…조금 전에 생긴 게 아니야."
“뭐?”
라그나르는 밖을 노려보면서 혀를 찼다.
“오래전에 생긴 거야. 다만 공략을 하지 못해서 그 힘이 커진 거고.”
“그래서 이렇게 던전 밖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야?”
오스왈드에서는 이런 상황을 본적이 없었기에 놀라 묻자 라그나르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상황에 놀랄 틈도 없이 바깥을 지나가는 형체가 보였다.
“몬스터.”
보호 마법 탓인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곰의 생김새를 닮은 몬스터의 모습에 소름이 쫙 돋았다.
“던전의 힘이 커져서 몬스터가 밖으로 빠져나온 거야. 이렇게 되기 전까지 황실 측에서 알아차리 지를 못했다니.”
“…아저씨가 없어서."
던전의 총 책임자였던 악셀리우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는 것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안전 불감증도 적당히여야지.'
“시몬에게 연락해 줘야겠어.”
“몬스터가 나타난 것은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니까."
라그나르가 골치 아프다는 듯 거세게 머리를 휘저었다.
나는 키키를 품에 안고서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보니 내일부터 순탄치 않은 하루가 흘러갈 것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 *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모든 건물들의 불이 켜져 있었고, 그것은 우리 상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진 것이 다행이었다.
'걱정되네.’
라그나르는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숲을 탐색하였고, 상황의 심각 정도를 시몬에게 전달해 주고 오겠다며 건물을 나섰다.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듯싶어 기지개를 켜다가 소파에 몸을 뉘였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야겠다.'
피곤함에 절여 가물가물한 눈이 스르륵 감겼다.
분명히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일생각이었는데….
“다프네?"
"으응.…."
잠결에 라그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찾아온 것 같아.”
“응. 응?”
위에서 들려온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그나르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당황하며 황급히 일어나니 라그나르는 그저 무표정으로 나를 빠히 바라보고 있었다.
“빤히 보지 마.”
자다 깬 얼굴이 어떻게 보일지,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왔으면 깨우지.”
“너무 피곤해 보여서.”
무릎은 또 언제 빌려준 거람.
괜히 머리만 만지작거리다 흠흠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누가 찾아왔는데?"
"황실에서.”
"뭐?"
그 소리에 지금껏 괜찮았던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얼추 상황이 잘 정리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황실에 도착하자마자 콘란드 헤로니스를 중심으로 모인 귀족들을 마주하자 나는 새벽에 한 내 안 좋은 예감이 잘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