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귀족들이 나의 자문을 구한다 듣고 오기는 했는데….
들어와 인사를 하자마자 귀족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박혔다.
모두가 놀란 시선을 숨기지 못하는 와중에도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마친 소개에도 여전히 동요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무리 뒤로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 시몬이 보였다.
보아하니 이 상황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남색 머리를 깔끔히 넘긴 제법 사나운 눈빛을 가진 중년의 사내는 굉장히 불쾌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간간이 몇몇 귀족들이 나와 사내를 번갈아 보는 듯했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어느새 회의장 안에는 적막이 가득 찼다.
'신기하겠지.'
여기 있는 이들이 프레이르의 얼굴을 모를 리 없을 테니 다들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나를 보는 것 이리라.
특히 헤로니스 공작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나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시몬을 바라보았다.
'뭐지?'
시몬을 마치 원수를 보듯 노려보는 것도 잠시 그가 분한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오스왈드에서 유학했다지?”
“그렇습니다.”
“지금 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잘 알고 있을 테고?”
어차피 내 도움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면서 뭘 이리 뜸을 들이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퍽 즐거운 목소리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듯 경쾌하게 말했다.
“오스왈드 제국에서 던전 공략에 큰 기여를 했다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자국을 위해서 공략에 참여해 보는 건 어떤가.”
"공작.”
헤로니스 공작의 발언에 시몬이 그를 제지했다.
"분명 저이에게는 조언만 얻기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하. 수도에 던전 경험이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경험 있는 자야말로 실력이 증명된 것인데 조언보다는 실전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헤로니스 공작의 말에 시몬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국의 기사들이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일이네.”
“대공께서 자리를 비운 지금! 이곳에서 던전 경험이 제일 많은 이가 기사단의 중심에 서서 이끌어줘야 이 사건을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몬의 못마땅한 표정과 다르게 주변의 귀족들은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시몬은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그들을 향해 말했다.
“대공의 자리는 분명히 내가 대신 서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하께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중심에 두고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다투기 시작했다.
헤로니스 공작의 이죽거림에 가까운 말에도 시몬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실력이 부족하다 폄하하고 싶으면 직접 하게. 우리 사이에 굳이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다만…."
“다만 그 안에 들어가서 내가 방해될 거라 생각이라도 하나 보지?
경험이 없으니?”
“저는 다 전하가 걱정되어서 올린 충언이었습니다.”
헤로니스 공작의 말에 시몬은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헤로니스 공작을 향해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아무래도 경험이 있는 이들이 참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죠? 제국을 위해서 말입니다.”
내 말에 헤로니스 공작은 덤덤히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나는 답했다.
“그럼 모국을 위해 제가 기꺼이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시몬이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며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표정을 보며 그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의 의견처럼 저는 오스왈드에서 던전을 공략한 경험이 있고, 어느 정도 공략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필요한 인원만 있다면 충분하죠.”
“그래. 필요한 인원은 얼마든지 준비해 주지.”
헤로니스 공작은 제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처음보다 여유로운 반응을 보이며 웃었다.
"어떤 던전인지도 제대로 조사가 되지 않았는데 그대가 가겠다고 하는 건가?”
시몬이 화를 억누르는지 평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알다시피 저는 클레멘스 제국의 사람이니까요. 모국이 위험이 처했다는데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구만."
누군가가 꺼낸 칭찬에 감사하다고 답하며 덧붙였다.
“누구나 그랬을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직접 참가하시겠다고 하는데 어찌 제가 이 일을 외면하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맞아. 내가 직접 참가하겠다고 했는데 그대까지 참여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시몬이 이를 갈며 말했으나 이미 분위기는 내가 공략에 참가하는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히 혼자 참여할 생각은 없지만.'
슬슬 본론을 꺼낼까 싶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사태의 심각함을 보아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던전 같았습니다. 하루빨리 공략하지 않는 한 더 큰 피해가 발생하겠지요.”
내 발언에 들뜬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까 합니다. 그러니 그에 필요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내 말에 시몬이 거센 숨을 내쉬었다.
“어떤 것이든지 지원해 줄 테니 편히 말해 보도록 하게.”
시몬이 쉽게 답을 하지 않자 공작이 즐겁게 웃으며 자비로운 척 말을 하였다.
그에 나는 그를 보고 진심으로 방긋 웃었다.
“저희 쪽에서는 저와 제 호위 둘이 참가할 테니 치유사 한 명과 기사 여섯 명을 붙여 주십시오."
“그 정도 인원이면 충분한가? 너무 적은 게 아닌지.”
“훌륭한 치유사가 있다면 인원이 오히려 적은 편이 좋습니다.”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헤로니스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나선 것은 그쪽이니 내 잘못은 없다고.’
분명 내가 말을 꺼낸 의도를 알아차린 듯싶었다.
그가 입을 열어 내 말을 막으려 했으나 나는 즐겁게 진심을 담아 웃으며 말했다.
“헤로니스 공녀님께서 정령술에 능하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공략을 빠르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헤로니스 공작이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큰소리에 주변의 모두가 깜짝 놀랐으나 흉흉한 공작의 기세에 입을 다물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감히 던전에 내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헤로니스 공녀님께서는 오스왈드에서도 던전 공략에 참여하신 적이 있죠. 치유사로서 아주 훌륭한 실력을 보여 주신 것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 꺼낸 말입니다.”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만,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왜? 더 해 보게.”
헤로니스 공작이 내 입을 막으려는 듯 명령했으나 이번에는 시몬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 발언을 허락했다.
헤로니스 공작이 미친 사람을 보듯 시몬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강경했다.
“공작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던전의 경험은 중요하지요. 공녀님께서는 훌륭한 정령술을 가지고 계시고, 던전의 경험도 있으시니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로니스 공녀가 있다면 공략이 더 수월하단 건 확실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참여하신다면 더 빠르게 공략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허하도록 하지."
“전하!”
시몬의 허락에 헤로니스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몬은 별문제 없다는 듯 말했다.
"왜 그러는가 공작."
“어찌 제 딸아이가 어떻게 그리 위험한 곳에 간단 말입니까!"
“헤로니스 공녀는 제국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한다는 건가? 실력과 경험이 충분한데도?"
“고작 한 번 다녀온 겁니다!"
“다른 치유사들은 그 한 번의 경험이 없어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걸세. 그러니 공녀가 가는 게 맞아.”
헤로니스 공작이 했던 말을 시몬이 그대로 되돌려주자 그가 분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는지 열심히 생각하는 듯했으나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것이 느껴졌는지 점점 안색이 나빠졌다.
“제 딸아이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에 피로가 쌓인 상태입니다!”
“피곤해서 안 된다?"
“예. 무엇보다 너무 급작스럽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피로가 누적된 아이에게 위험한 상황에 들어가라고 떠밀다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잠시 틈이 생긴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헤로니스 공작이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역시 공녀님께 의견을 묻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고집만으로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내 말에 시몬과 헤로니스 공작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 그대의 뜻은 그렇다 이거지.”
시몬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헤로니스 공작에게 말했다.
“공녀를 불러들이게. 공녀가 오기 전까지 회의는 잠시 쉬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시몬이 먼저 자리를 나섰고 헤로 니스 공작 또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떴다.
나는 금세 시끌벅적해진 회의장에서 조용히 물러나 밖으로 빠져나왔다.
“휴게실을 알려 준대. 잠시 쉬고 오자.”
"응. 시몬은?”
“나한테 미소 한 번 지어 주고 가던데.”
라그나르가 소름 끼친다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에 가볍게 웃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라그나르와 함께 시종의 뒤를 따라가니 아니나다를까 그 안에는 시몬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시몬은 입가에 가득 지은 미소를 지우더니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 최대한 막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오스왈드의 던전은 유명하고, 나는 그곳에서 살다 왔으니까 도움이 필요했을 거야.”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시몬의 표정이 더욱더 안 좋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 위험한 곳에 너를 보낸다는 게….”
시몬의 말에 나는 괜찮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1년에 몇 번은 가 봤어. 무서워하고 가면 더 무서울 뿐이야.”
“…그렇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더 무서워지는 것밖에 없겠네."
시몬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헤로니스 영애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강압적으로 말하는 게 마음에 안들어서.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쉽게 꺼내는 거겠지."
처음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더니 마리아가 엮이자 바로 표정을 굳히는 꼴을 보라.
“그리고 마리아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야.”
“그 여자가?”
라그나르가 야박한 평가를 내렸고, 나는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걔 동생보다는 나아. 처음보다 정신도 좀 차린 것 같고."
근래 보았던 것이 있기에 처음과 비교하면 꽤 후한 평가였다.
“하지만 헤로니스 영애가 안 간다고 한다면?"
시몬은 걱정을 멈추지 못했다.
“안 간다 할 확률이 높으니 역시 실력 있는 기사들을 더 붙이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정령술사나 의사를 함께 대동하든가."
시몬은 나를 생각해서 다른 방법을 꺼냈고, 라그나르는 자기면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어필했다.
“아니. 애초에 공녀는 공작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안 갈 사람이라고, 그러니 다른 수단을 생각하는 게 맞아."
시몬의 걱정이 절정으로 오르기 전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잖아. 던전이라고! 심지어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던전!"
시몬은 자기 이야기이면서 왜 이렇게 겁이 없냐며 나를 혼냈고, 그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네 걱정처럼 마리아가 거절할 리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은 생각할 필요가 없단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그냥. 그럴 것 같아.”
말은 모호하게 했으나 어디까지나 확신에 찼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내 미소에 시몬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마리아가 도착했다는 말에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시몬이 먼저 떠났고 휴게실에는 나와 라그나르만 남았다.
둘이 남자 라그나르의 삐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가 없어도 나로 충분하지 않아?”
“물론 너만 있어도 충분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공작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도 있거든.”
내 말에 라그나르가 뾰로통한 표정을 풀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와.”
표정과 다르게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으나 라그나르는 잡은 손을 천천히 놔주었다.
그 모습이 퍽 서운해 보였다.
‘마리아 때문에 자리를 뺏겼다고'생각할 테니 속상할지도.
나중에 다시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우선 앞에 처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싫어요! 저는 던전 공략에 참가 할 거예요!”
“마리아!"
그리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를 내는 헤로니스 공작을 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