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이건 또 의외인데.
나는 마리아와 옆에서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을 짓고 있는 카스토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 죠?"
"아빠가 카스토르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허락해 주지 않는다고 하셔서….”
마리아는 내 눈치를 쓱 보다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정작 죄인이 되어야 할 것은 지난번 던전에서 사고를 친 카스토르일 텐데.
내 시선이 카스토르에게 닿자 그가 의외의 행동을 했다.
카스토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한 것이다.
“?”
내가 숨기지 못하고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담담히 말했다.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카스토르?"
카스토르의 존댓말에 마리아 또한 당황하며 카스토르를 향해 놀란 시선을 던졌지만, 그는 그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사이좋은 남매 사이로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으나 카스토르의 변한 행동을 조금이나마 믿고 싶어졌다.
마리아가 변한 것처럼 말이다.
"네. 부디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었으며 좋겠어요."
나는 그리 말하고서 또 다른 의외의 인물을 보며 나올 것 같은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잠시 이야기를 좀 하지.”
시몬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모여 있는 무리를 피해 사람이 없는 한적한 숲으로 걸어갔다.
"아바마마께서 대공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역시 내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정말이지.”
나는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공작이 뒤에서 말을 더 얹은 거겠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마리아를 끌어들여서 일부러 더 그러는 거지?"
“그건 아닐 거야. 그냥….”
“그냥?”
“뭘 좀 오해하는 걸 수도 있지."
무얼 오해한다는 걸까.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시몬은 어색하게 웃었다.
“예전에 약혼을 깰 때 한 말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나 봐. 그래서 매번 이렇게 나를 물고 늘어진다니까.”
시몬은 말을 돌리면서 출발할 인원들이 모인 쪽을 바라보았다.
"인원이 많아졌는데 괜찮지?”
"네가 명령만 잘 내린다면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
나는 모여 있는 무리를 보며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위 귀족들이 함께 가는 던전이라니. 부담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그래도 최우선으로 네 의견을 따를 거니까.”
시몬은 내가 기분이라도 상했을까 걱정됐는지 바로 나를 달래는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네가 지도자가 되어야지.”
내 빠른 답에 오히려 시몬이 당황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일단 나는 던전이 처음이잖아. 네게만 말하는 거지만 솔직히 조금 긴장되는걸.”
“시몬, 너 무섭구나?"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시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휙 돌리는 것에 장난기가 샘솟아 몸을 가까이 기울이고는 웃으며 말했다.
“무서우면 나한테 기대도 돼."
“하나도 안 무서워. 그냥 긴장되는 것뿐이야.”
"얼마든지 어깨 빌려줄게. 내 등뒤에 숨어도 된다니까?"
“안 무섭다니까?”
우리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언제 출발해?”
라그나르가 우리를 부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라그나르는 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겁먹어서 가서 좀 달래줘야 할 거 같은데.”
라그나르는 시몬을 한 번 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아. 우리 전하께서도 무서우신가?"
“그러신가 봐. 전하, 무서우시다면 정말로 제 뒤에 숨으셔도 좋답니다.”
“제 등이 더 넓으니 그 뒤로 숨으시죠.”
“누가 무섭다고!”
우리 둘의 놀림에 시몬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는 씩씩거리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이 생긴 것은 산맥의 중간 부분이었고, 마차로 올라올 수 있는 곳까지 왔으니 앞으로 남은 부분은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나는 비가 내려 축축해진 땅을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감추었다.
'던전 갈 때마다 비가 오고 난리람.'
시간은 고작 점심시간을 넘겼건만 비가 내리는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다.
부디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라그나르와 함께 무리로 향했다.
* * *
던전 주변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최악이었다.
파견된 기사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을 해치웠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는데.
'시체가 엄청나네.'
꽤 많은 몬스터의 시체들이 늘어진 것을 보며 나는 표정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도 이 광경에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시몬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할 것 같은 모습에 슬쩍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속이 안 좋아.”
아무래도 몬스터의 시체는 처음보는 것일 테니 이런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대공은 이런 것을 몇 년이나 보면서 산 거야.”
시몬은 입을 가리고서 헛구역질을 하다가 이내 눈을 질끈 감고는 숨을 내쉬었다.
"난 괜찮아. 우선 상황을 좀 정리해야 할 듯싶은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보아하니 던전에 있는 몬스터들이 꽤 밖으로 빠져나온 것 같아요. 그러니 무리를 나눠서 던전밖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일도 해야 할 것 같네요.”
나는 시몬을 따라온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그것을 기사님들이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던전에 들어가는 인원은 저희로도 충분할 것 같거든요.
솔직히 전하께서도 밖에서 이들을 지휘해 주셨으면 좋겠지만….”
내 말에 시몬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악셀리우스를 대신하여 온 것이니 명분을 위해서라도 던전에는 들어가야겠지.
'그렇다면 들어가게 되는 인원은 나와 라그나르, 플뢰르, 마리아, 카스토르, 그리고 시몬이 되는 건가.’
하지만 내 말에 기사들은 반발했다.
“전하를 홀로 보낼 수는 없네."
“역시 그렇죠? 그럼 반은 이곳에 남고, 반만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서 미안한 표정으로 플뢰르를 바라보았다.
“플뢰르, 네가 이곳에 남아 줄수 있을까?”
던전 경험이 많은 플뢰르도 함께 안으로 들어가면 좋겠지만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던전의 몬스터를 접해 본 적이 거의 없을 테니 이게 최선일 것 같았다.
플뢰르 또한 그리 생각하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제가 여기 남아서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고마워."
내 말에 플뢰르가 정색하던 표정을 지우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저만 믿고 맡겨 주세요!"
플뢰르라면 적어도 남은 기사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수습할 수 있겠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찰나 조용히 있던 카스토르가 손을 들어 말했다.
“저도 이곳에 남아서 몬스터를 처치하는 걸 돕도록 하겠습니다.”
카스토르의 말에 마리아가 놀란 것을 숨기지 못하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스토르는 마리아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나를 보며 말했다.
“저 호위 기사와 싸우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그저 제게 제일 적절한 역할이 이것이지 않나 싶어서 그런 거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죠.”
카스토르의 말을 듣자마자 플뢰르와 싸울 작정인가 싶은 의심을 했기에 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당연히 마리아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새로운 던전에 다혈질인 카스토르를 데려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었다.
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플뢰르를 보자 그녀도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얼추 인원을 추려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상황이 정리되자 시몬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고, 주변에 임시 천막을 세워 둔 뒤 우리는 준비를 마치고 던전으로 향했다.
* * *
던전으로 들어온 우리는 한참을 걷기 시작했다.
약한 몬스터 한두 마리 정도는 발견되기 충분한 시간이었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가 나오지 않으니 긴장이 서서히 풀린 것인지 마리아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선배. 지난번 던전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원래 이렇게 몬스터가 없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 모두 아직 긴장을 풀지 못했기에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꺼냈다.
“보통 던전의 초입부에는 약한 몬스터가 주둔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몬스터들이 모두 빠져나갈만큼 이 던전이 오래된 것 같네.
요.”
나는 말하면서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긴 지 그토록 오래된 던전인데 어떻게 황실에서 모를 수가 있지?
아무리 수도 근처에 던전이 생긴 적이 없다 해도 전담팀이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차마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황실의 무능력함을 비난하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특히 시몬 앞에서는 더욱 말을 아껴야 했다.
'부디 빠르게 해결되어야 할 텐데.’
안 그래도 오스왈드에 가 있는 동안 살바토르가 고생을 해 주었는데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일을 가득 안겨 주고 말았다.
상단도 걱정이지만 은퇴한 살바토르를 불러와 일을 부탁한 것이 무척 마음이 쓰였다.
'이런.’
그 와중에 다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통증에 주먹을 쥐어 통통 두드리며 통증을 잊고자 했다.
“선배, 다리 아프세요?"
그런 내 행동을 보기라도 했는지 마리아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별로 들키고 싶지 않은지라 고개를 저으려는데 라그나르와 시몬이 나를 보면서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
'조금 쉬다가 가겠군.'
내 생각대로 시몬은 주변을 살피더니 적당히 쉴만한 곳을 찾고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피곤하군. 잠시 쉬다 가도록 하지.”
"예!”
시몬의 명령에 따라온 기사들이 바위 근처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는 가방에서 도톰한 담요를 꺼내 커다란 바위에 깔고는 나를 향해 말했다.
“선배! 여기 앉아서 쉬세요!"
"아니, 저보다는 전하께서 쉬시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괜찮으니 그대가 저곳에 앉도록 하게.”
그 말과 함께 시몬은 기사가 말릴 틈도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들도 눈치를 보더니 슬쩍 근처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마리아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담요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고마워.”
“히히. 별것 아니에요!"
마리아는 내 말에 기분 좋게 웃더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쩐지 내가 민폐를 끼치는 것 같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한 걸음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라그나르가 보였다.
그는 한 손에 푹신해 보이는 방석을 들고 있었다.
언제 챙겨 온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나를 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
라그나르는 실망한 표정으로 방석을 가방 속에 집어넣었고, 조용히 내 근처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다시 움직일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
약간의 휴식 후 우리는 다시 열심히 던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몬스터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혹시 모두 밖으로 빠져나간 것인가 걱정이 들 무렵.
갑자기 커다란 문 하나가 나타났다.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누가 봐도 수상한 것이었기에 슬쩍 라그나르를 바라보니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지나가는 통로인 걸까.'
시몬은 라그나르의 의견을 참고하여 문을 열기로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엄청난 빛이 우리를 감쌌다.
눈을 감아도 눈부신 빛이 파고들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니 그나마 버틸 정도였다.
시간이 지난 후 빛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서 손을 떼며 말했다.
“눈부셔.”
그런데 내 목소리가 이상했다.
“뭐지?”
평상시와 다르게 어린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낄 무렵 누군가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 다프네. 여기서 뭐 하고 있었니? 엄마를 기다렸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낯설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활기찬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던가?
나는 놀란 마음을 참지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이르, 나의 친엄마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