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엄마?"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고, 내 부름에 프레이르는 활짝 웃으며 나를 자신의 품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럼 내가 다프네 엄마지. 우리 딸 이곳에서 뭐 하고 있었니?"
나는 프레이르의 품에 갇힌 채로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 저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무리 보아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프레이르는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후후, 왜 그렇게 놀랐어. 혼내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오늘은 맘껏 놀라고 했잖니.”
프레이르는 옆에 있는 꽃을 꺾어 내 귓가에 꽂아 주며 초상화 속에 서나 보았던 모습처럼 환히 웃어 보였다.
"내일이면 네 생일이니까 오늘은 충분히 놀고, 내일 밤 즐거운 데뷔당트를 치러야지."
"아.”
내가 데뷔당트를 치를 나이였던가?
보통 열네 살 정도에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이미….
'내가 몇 살이지?'
나는 프레이르의 품에서 빠져나와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다.”
"어머머. 아직 성장기니까 키는 곧 클 거란다. 엄마보다 더 자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프레이르는 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온실에서 보내는 시간도 좋지만, 내일을 위해서 드레스를 고르러 가 보자꾸나.”
"드레스요?"
“아이참. 우리 딸이 오늘따라 왜 딸이 왜 이럴까. 다섯 가지 드레스 중 하나를 고르기로 했잖니."
프레이르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랬던 것도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디 아픈 걸까?”
프레이르는 내 반응이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열을 재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움직였다.
"열은 없는데…. 혹시 모르니 의사를 불러 보자꾸나."
'나를 걱정하시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빤히 쳐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사이좋은 모녀처럼 팔짱을 끼고서 온실을 나섰다.
* * *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화려한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아이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 위로 살짝 손을 올려 보았다.
거울 속 아이도 나와 같이 손을 올려 우리의 손이 맞닿았고, 부정할 수도 없이 이 아이가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 ”
“머리가 보라색이에요."
분명히 내 머리는 흰색이었던 것 같은데.
내 말에 프레이르는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오스왈드 황족의 피가 흐르니 보라색인 게 당연하잖니. 네 머리가 하얀색이라니 꿈이라도 꿨니?"
프레이르는 그 말과 함께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에요, 우리 귀여운 공주님.”
“…꿈인가?”
지금껏 내가 겪었던 그 모든 것이 정말 꿈인 걸까?
아니, 내가 무얼 겪었지?
이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흐릿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 현실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네가 어릴 때만 해도 데뷔당트드레스를 골라 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쩜, 너무 기쁘네.”
거울을 한참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프레이 르가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왜 우세요?"
“네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 줬다는 게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그래. 어렸을 적…. 아니다. 좋은 날에는 좋은 말만 해야지."
프레이르는 내 드레스를 이것으로 하면 되겠다며 활짝 웃었고, 곧 나를 위해서 간식을 챙겨 온다며 방을 나섰다.
하녀에게 시켜도 되건만 그녀는 내게 직접 가져다주고 싶다며 즐겁게 웃으며 떠났다.
나는 프레이르가 떠난 후 멍하게 내 방을 바라보았다.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한 물건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내 방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분명 부드러운 침구도 그렇고, 침대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인형이 가득 쌓여 있는데 왜 이렇게 가..
그러던 중 침대 위에는 내가 읽책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렸을 적 보았던 책인 것 같은데.
'책을 읽고 싶은 기분은 아니야.'
찜찜했지만 어차피 읽었던 책이니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침 책을 치워 놓으니 프레이르가 상큼 달달한 냄새가 나는 디저트를 들고 돌아왔다.
"네 생일을 맞이해서 딸기 케이 크를 만들어 봤는데 맛있을지 모르겠네.”
“엄마가 직접 만들어 줬으니 그 어떤 케이크보다 맛있을 거예요!"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고, 프레이르는 그런 나를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곧 네 약혼자가 올 거란다. 너를 위해서 직접 선물을 주고 싶으시대.”
"야, 약혼자요?”
내가 약혼자가 있던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프레이르가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약혼자를 볼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나 보구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 프레이르의 말처럼 내게 약혼자가 있던 것 같기도 했다.
프레이르는 간식을 먹는 내 뒤로 와서 직접 머리를 예쁘게 땋아 내려 주었다.
“머리 풀고 싶은데."
“어렸을 때 이렇게 많이 묶어 봐야 해. 결혼하고 나면 머리는 다 올려 묶는 편이니까.”
프레이르는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내 치장을 도와주었고, 하나 하나 챙겨 주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나 엄마의 손길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프레이르는 치장이 끝난 나를 보며 환히 웃었고, 손님이 찾아왔다.
는 말에 나보다 더 설렌 표정으로 응접실로 나를 이끌었다.
'그런데 내 약혼자가 누구였더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입가에 환하게 미소가 차올랐다.
“시몬!”
“…내가 그대에게 이름을 허락한 적이 있나?”
익숙한 얼굴에 환히 미소를 지었으나 시몬은 평소와 다르게 나를 보며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시몬이 평소에 내게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아니, 황태자 전하를 왜 익숙하다고 생각했지?'
이상하게도 자꾸 내 기억과 현실이 어긋나 있는 기분이었다.
“명색이 약혼녀의 생일이니 직접 선물을 주러 오기는 했다만."
시몬은 내 품에 꽃다발을 던져 주듯 넘겼다.
“이런 귀찮은 일로 나를 부르지 마. 생일이 대수인가? 아니면 벌써부터 황족이 되었다고 입장을 공고히 하고 싶기라도 한 건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시몬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네가 황태자비가 된 건 어디까지나 그 황금색 눈동자 때문이니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말란 소리야.”
그 말과 함께 시몬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시몬의 뒷모습만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몬이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이런. 전하께서 속상하신 일이라도 있던 걸까.”
프레이르는 내가 상처라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나를 품에 끌어 안고서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아직은 눈 때문에 트라우마가 있으시지만, 분명히 서로를 알아가다 보면 다정해지실 거란다. 전하께서 상처를 이겨 내실 때까지 기다려 주자꾸나.”
“네.”
나는 프레이르의 품 안에 안겨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쓴 미소를 지으며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말렴. 다프네, 넌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니까."
다정한 말이 참 사무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 * *
시몬이 다녀간 후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나는 참 많이 웃었다.
참 행복한데 이상하게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기억이 이상하게 얽혀 있는 느낌에 뭐가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생각하는 찰나 그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 보았던 신학책인데 어쩐지 표지의 나비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읽었음에도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책을 읽고 나면 이 찜찜한 마음이 가실까?'
나는 책을 펼쳤다.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지 말아라.
죽음은 언제나 너희의 곁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죽음으로써 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역시 읽지 말걸.”
읽으면 읽을수록 불쾌감만 맴돌았다.
짜증을 숨기며 책을 덮으려고 하는데 마지막 한 장이 남은 것이 보였다.
"어라? 분명 저게 마지막 페이지였을 텐데.”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내가 읽어 보지 못했던 마지막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정해진 죽음을 피한다면, 진정한 너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남은 문구를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무언가 머리를 거세게 내리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그러면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니. 그게 무슨..."
나는 머리를 붙잡고서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다프네. 자고 있니? 아빠가 들어가도 될까?”
“아빠?"
내게 아빠가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내 입에서는 좋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얼마 전까지 보았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니, 그때 보았던 것보다 젊어 보이려나?
남색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남자는 나와 같은 금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고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빠가 네 생일에 늦지 않고 싶어서 영지 업무가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왔다지 뭐야.”
프레이르의 말에 콘란드가 나를 안아 들어 올렸다.
“아직도 어린데 벌써 데뷔당트라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먼저 생일 축하를 해 주고 싶었단다. 사랑하는 우리 딸 다프네, 생일 축하한다.”
때마침 자정을 시계의 바늘이 자정을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보며 환히 웃고 있는 프레이르와 콘란드를 보다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이러한 관계가 아니지 않았나?
무엇보다 그의 손길이 닿는다는 사실만으로 소름이 끼쳐 버틸 수가 없었다.
“이런. 벌써 다 컸다고 아빠한테 시위하는 건가?”
콘란드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내려 주었다.
나는 즐거워 보이는 두 사람을 두고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고, 보면 볼수록 이곳은 내가 아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고, 내 방도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보라색 머리를 가진 소녀도 내가 아니었다.
저 사람도 내 아빠가 아니었다.
내 친엄마는….
나는 환히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유니스는 어디 있어요?"
"유니스? 그 여자를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내 물음에 콘란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놀라 재차 다시 물었고, 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당신 유니스랑 사랑하는 사이 아니었어요?"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거짓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내 외침에 콘란드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안하다는 듯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흔들린 것은 사실이나 네가 생긴 것을 알고서 관계를 정리했어. 그녀와는 이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란다, 다프네. 네 엄마도 내 실수를 용서해 줬어.
물론 나도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할 거란다.”
“맞아, 다프네. 난 네 아빠를 용서했어. 그리고 너도 어렸을 적에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었잖니? 이건 네가 간절히 바란 거란다.”
"내가 바랐다고?"
“행복하지 않니? 네가 원했던 행복이잖니.”
콘란드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유니스와 끝난 사이도 아니고, 마음이 흔들린 도중에 프레이르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프레이르와 함께한 오늘 하루는 분명 행복했으나 이것은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내가 간절히 바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은….
악몽.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악몽과 같았다.
거울 속의 내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으니 열네 살이 아닌 열아홉 살인 원래의 나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망설일까.
나는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내 콘란드를 향해 겨누었다.
“내 행복에 너 같은 건 없어.”
콘란드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고, 프레이르는 나를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난 행복을 가장한 이 악몽에 머무를 생각이 없으니까!
탕-
곧 거울이 깨지듯 그가 산산조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