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콘란드가 부서져 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죽는 것이 너의 행복이라면 이 아비가 얼마든지 죽어 주마."
콘란드는 이곳에서 사라져 가는 와중에서도 끝까지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유지했다.
“다프네. 이 엄마가 없는데 네가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단다.”
프레이르마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뻗었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듯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이 환상 속에 갇혀 있다면 분명 어릴 적 갖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겠지.
하지만 꿈은 어디까지 꿈일 뿐.
더는 어린 시절에 얽매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원작도, 운명도 전부 필요 없다.
“이곳에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없어요.”
베네디토,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없다.
"내가 맺어 왔던 관계로 지낼 수 없어요."
시몬과 친구가 될 수 없을 테고, 카롤리나와도 편하게 대화할 수 없을 것이다.
플뢰르도 다시 나의 기사가 될 수 없겠지.
키키도 나의 옆에 있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둠 속에서 나를 꺼내 주었던 나의 작고 소중한 친구를 떠올렸다.
“라그나르도 없잖아요."
프레이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그녀의 얼굴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내 운명은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거예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거예요.”
곧 프레이르마저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함께 내 주변의 세상이 빠르게 무너졌다.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가득 찼고,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붙잡고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끔찍했어.’
아무리 꿈이라지만 내가 어떻게 헤로니스 공작을 내 아버지라 여기며 다 함께 행복하게 살겠는가.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쓰러진 줄 알았는데 우리는 어느새 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곳은 거울이 가득 차 있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이곳저곳 잔뜩 놓여 있는 거울 때문에 마치 미로처럼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내 앞에는 깨진 전신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잠시 그 거울을 바라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행히 몬스터는 없는 것 같지.'
아무래도 이 방 자체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곳 같았다.
사람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나니 내 옆에 마리아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리아. 일어나, 마리아!"
아무래도 다들 악몽과 같은 환영에 사로잡혀 있는지 마리아의 안색도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아 마리아를 흔들려는 순간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어!”
커다란 비명과 함께 마리아는 내가 깨어났을 때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마리아는 깨어나기 무섭게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마리아, 괜찮아?”
“선, 배.”
내 목소리에 마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에 예전과 같은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분 나쁜 환영을 보여 주는 던전 같아. 가끔 이렇게 함정을 가진 던전이 있거든."
“환영이요?”
“악몽이 더 맞으려나?"
내 말에 마리아가 눈가에 가득 고인 눈물을 닦지도 않고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 안도하는 듯했다.
“충격이 큰 건 이해하지만 아무 래도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쓰러져 있는 것 같아. 외부의 충격이 있어야 깨어나는 것 같으니 좀 도와주겠니?"
"네. 물론이죠.”
마리아는 그제야 눈물로 번진 얼굴을 닦아 내고는 씩씩하게 일어났다.
“기사들을 깨워줘. 전하와 라그나르는 내가 깨우도록 할게.”
나는 주변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고, 마리아는 쏜살같이 그쪽으로 뛰어가 그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나 또한 아픈 머리를 붙잡고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디 있는 거야 라그나로, 시몬….”
어째서 다 같이 모여 있지 않은 것인지 이 던전의 속셈을 정말 모르겠다.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시몬을 찾을 수가 있었다.
거울 가까이에 쓰러져 있는 시몬을 보자마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시몬, 시몬!”
시몬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힘겹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일어나, 일어나 봐.”
시몬을 거칠게 흔들자 그의 입에서 조금 전이랑 다른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일어나라고! 이깟 악몽에 지지 말란 말이야!"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고, 시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곧 시몬이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평온한 모습이었으나 시몬의 안색은 너무도 좋지 않았다.
“다, 프네?"
"다행이다. 눈을 떴구나.”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시몬이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을 매만졌다.
“…울었어?”
“울긴 누가 울어.”
마음을 졸였다는 것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아 애써 웃으니 시몬이 나를 따라 웃었다.
시몬은 등을 세워 일어나 앉았고,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너희가 날 떠나는 꿈을 꿨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나와는 더 이상 친구 하기 싫다면서 매정하게 떠나더라.”
“그냥 꿈일 뿐이야.”
“응. 그렇겠지.”
시몬은 괜찮다며 웃는 소리를 내었지만,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답지 않은 약한 모습이었다.
“꿈이 현실이 아니란 건 잘 알지만…. 나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시몬은 말을 제대로 이어 가기도 어려운지 더듬더듬하더니 내 옷깃을 붙잡고서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시몬….”
시몬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고, 그 악몽의 주체가 우리였으니 나를 더 놓기 힘들 것이다.
꿈과 현실이 이어지는 것 같아 더 충격에 빠질 수 있겠지.
마음 같아서는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괜찮아지고 있는데 아직도 라그나르 혼자 악몽에 빠져 있는 거라면, 그 아이가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걱정이 끊이지를 않았다.
혹시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남아 있는 몬스터가 튀어나온다면?
아무리 강한 드래곤이라 한들 잠들어 있는 상태에선 무기력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시몬을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아 주었다.
시몬이 나보다 한참 크다 보니 내가 시몬에게 안긴 꼴이 되었지만 그게 중요할까.
“다프네?"
“우리가 널 버릴 리가 없잖아.”
"......."
시몬은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더욱 제 품에 끌어당겼다.
“우리 전하. 언제든지 겁나거나무서우면 내 등 뒤로 숨어도 된다 했잖아.”
"..."
시몬의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시몬. 잠시만 여기서 나를 기다려 줄 수 있어?"
“왜?”
“… 라그나르가 보이지 않아."
내 말에 시몬이 고개를 들더니 주변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에 낭패 어린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보며 나는 걱정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말했다.
"나도 네 옆에 있어 주고 싶어.
하지만….”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있는데 시몬이 나를 끌어안은 팔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붙잡고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 분명히 걔도 어디선가 악몽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텐데.”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 줘서. 그리고 같이 못가서 미안해. 아직 몸에 힘이 안들어가네.”
시몬의 얼굴에 죄책감이 서리자 나는 빠르게 손을 저었다.
"아니야. 충격이 큰 게 당연하지.
난 너보다 먼저 일어나기도 했고."
“얼른 그 약해 빠진 놈 데리고와 주라. 제일 마지막에 깨어났다고 열심히 놀려 줘야겠어."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시몬은 흐트러진 제 머리를 정리 평소와 같은 미소에 그제야 확실하게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시몬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쪽에 마리아와 기사들이 있으니까 그곳에 가 있어야 해. 혼자 있지 마.”
“걱정하지 마. 나 한두 살 먹은 애 아니니까.”
나는 시몬을 뒤로한 채 다시 빠르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찌나 넓고 복잡한지 아무리 걷고 걸어도 라그나르는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으로 입이 바짝 말라 갈 때 한쪽에서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있던 곳과는 확연하게 다른 기운에 나는 리볼버를 손에 쥐고서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도착한 곳에는 아주, 아주 커다란 거울이 있었다.
근처에 놓여 있던 거울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찌나 커다란지 천장부터 땅까지 내려오는 벽을 가득 채운 크기에 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그나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그나르!"
라그나르는 커다란 거울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이미 의식이 끊겼는지 아래로 떨구어진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라그나르의 이름을 몇 번이고 큰 소리로 불렀으나 그에게 닿지 않는지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서서히 거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힘껏 뛰었으나 손이 닿기도 전에 라그나르의 모습은 거울 속으로 사라졌다.
충격에 빠진 얼굴로 라그나르를 삼킨 거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도 거울이 하나씩 있었지.’
기억을 되새겨 보니 늦게 깨어난 사람일수록 거울과 가까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라그나르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거울에 잡아먹힌 걸까?
“젠장!”
나는 화가 치솟는 것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들어가야 했다.
들어가서 라그나르를 구해 줘야 했다.
라그나르는 언제나 내가 가장 힘들 때 내 곁을 지켜 줬다.
그러니 이제 내가 그를 구해 줄 차례였다.
나는 긴장감에 날뛰는 심장을 침착하게 가라앉히고는 거울 위에 손을 얹었다.
마치 먹잇감을 반기는 짐승처럼 거울은 나를 자신의 안으로 빨아들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환한 빛이 내 시야를 감쌌고, 그 빛이 사라져 눈을 떴을 때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