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여기는…?"
찬 공기가 얇은 옷을 타고 흘러 들어 왔다.
익숙한 숲을 보고 있으니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샘솟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거짓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단 점이 조금 전 내 환영과는 다른 점이려나.'
나는 눈앞에 있는 작은 아이들을 보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라그나르를 이렇게 직접 보게 된다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너와 함께 있는 게 제일 좋아.”
어린 라그나르가 어린 나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장성한 모습과는 달리 볼이 오동통한 어린 라그나르를 보는 것은 조금 색다른 기분이었다.
말랑해 보이는 저 뺨을 만져 보고 싶었으나 라그나르의 환영 속이어서 그런지 만질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다른 이들도 나를 못 보는 것 같았다.
어린 우리는 한참이고 별것 아닌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라그나르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작고 추운 감옥 안이면서, 그것도 철창을 사이에 두고서 고작 몇 마디 떠드는 것인데.
라그나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아마도 요새 어두운 표정을 많이 봐 왔기에 비교가 되는 걸까.
눈을 몇 번 깜빡이는데 갑자기 주변이 변했다.
이번에는 따스한 봄이었다.
따스한 기운과 성스러움이 가득한 이곳이 어디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신전이네.’
어린 나는 책을 골라 와 앉아 있었고, 내 옆자리에 시몬이 이미 도착해 앉아 있었다.
시몬과 라그나르의 첫 만남이 있던 날인가보다.
'라그나르는 어디 있지?'
라그나르는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런 얼굴 처음 봐.'
어린 라그나르의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어찌나 심통이 났는지 소중한 장 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라그나르, 왜 그래?'
위로를 해 주고 싶었지만 당연하게도 내 말소리는 라그나르에게 닿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곧 표정 관리를 하더니 어린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웃었다.
어린 시절 자주 보았던 해맑은 미소였고, 내가 그를 따라 웃으니, 더더욱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꽉 쥔 주먹이라든가 구겨진 책이라든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이라든가.
예전과 다른 불안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주변이 일그러지더니 이번에는 숲속에 있는 집으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창밖을 보니 어두컴컴한 것이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인 듯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라그나르의 방으로 향했고, 정말 운이 좋게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 틈새 사이를 슬쩍 바라보니 라그나르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책을 바라보고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여 내린다.
그것을 한참이고 반복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랐으나 곧 내가 안 보인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편하게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엄마?'
클로에가 라그나르의 방에 노크하더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고 운이 좋게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이 시간까지 공부하지 말고 자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다프네가 내일 시몬한테 편지를 보낸다고 했으니까 나도 답장을 써야 해요.”
“천천히 써도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단다. 꼭 퀴즈의 답을 쓰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클로에가 단호히 말했으나 라그나르는 지지 않았다.
"아니요. 난 다프네의 첫 친구니까 두 번째 친구보다 부족해선 안돼요. 내가 노력해야 해요."
“다프네는 네가 어떤 걸 잘하는지 못하든지 신경 안 쓸 거야. 오히려 네가 피곤해하는 걸 보고 걱정할 순 있겠구나.”
“하지만 난 가족이 아니니까. 가족 다음에 가장 중요한 첫 친구라는 자리를 지키고 싶단 말이에요.”
“하지만 시몬과도 친구가 맞지 않니? 시몬은 단순히 네 경쟁자일 뿐이니?”
엄마와 라그나르의 대화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내 표정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
라그나르가 자신의 자존심이 아닌 나 때문에 저렇게 밤새워 가면서 공부를 했는지는 몰랐으니까.
고작 나 때문에….
"너무 걱정되니까 제발 잠 좀 거라. 어릴수록 더 많이 자야 쑥쑥 큰단다.”
엄마가 라그나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했다.
“하지만….”
곧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휙 문을 열었다.
“라그나르, 코코아 마실….”
리카르다가 기운차게 들어오다가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는 엄마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늦은 밤에 간식을 주면 안 된다했던 것 같은데.”
“공부할 때 조금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하하하."
리카르다가 어색히 눈을 굴리며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뒤따라온 레녹스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다.
“라그나로, 네가 부탁한 책….”
엄마는 레녹스마저 그럴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 아들들은 왜 다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우리도 처음에는 말렸는데 하고 싶다는 걸 계속 막기도 조금 그래서요.”
리카르다가 애써 변명을 해 봤지만, 엄마의 눈만 세모꼴이 될 뿐이었다.
“저는 이 책을 주면서 그만 자라고 말하려고 찾아왔어요.”
"와.”
레녹스가 그럴싸한 변명을 하자리카르다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레녹스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곧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라그나르가 소리를 내어 웃었기 때문이다.
“다들 고맙습니다."
“가족끼리 그렇게 예의 갖출 필요 없다.”
클로에의 말에 라그나르의 입가에 더욱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내게 보여 주던 해맑은 미소에 세 사람을 감싼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레녹스가 라그나르의 책을 덮어버렸고, 리카르다가 라그나르를 번쩍 안아 침대로 옮겼다.
라그나르가 발버둥 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다시 신전이었고, 시몬과 라그나르가 사람들을 물리고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네 눈. 난 신경 안 써."
"........”
“다프네 말고 너도 내 친구잖아.
그냥 나 빼고 비밀을 만드는 것 같아서 속상해서 그랬어.”
“난…. 모두가 내 눈이 혐오스럽다 해서 너도 그럴까 봐 걱정돼서.
말 못 했어.”
"바보냐. 친구 사이에 그럴 리가 없잖아.”
“친구.."
아마도 납치 사건이 있고 난 뒤인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은 따로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친구, 우리 친구잖아."
“…맞아. 친구지.”
라그나르의 얼굴에 긴장감이 풀리고 시몬을 향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이렇게 웃어 주네.”
시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라그나 르의 목에 팔을 껴 장난스럽게 조이며 말했다.
“아주 다프네한테만 그렇게 웃어주는 줄 알았더니. 서운해 죽을 뻔했다.”
“아니야. 너도 친구 맞으니까.
아, 미안해. 아파!"
“아프기는!”
두 사람이 투덜대는 모습은 딱 그 나잇대 소년들처럼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몰랐어. 라그나르가 시몬에게 저 때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웃어 줬다는 걸.’
"나 행복해.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가족과 같은 사람들도 생겼고, 다프네도 있고, 너도 있으니까.”
“민망하게 뭐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사람은 활짝 웃었다.
시몬을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가라앉았던 라그나르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지더니 마침내 활짝 피어났다.
'아직은 행복한 기억인건가?'
무슨 의도로 보여 주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역시 라그나르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부분이겠지.
'슬슬 주변이 다시 변하려나.'
그리고 내 생각처럼 주변이 변하려는 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와 라그나르는 꽤 많이 자라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와 같이 함께 있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어두운 곳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서 환히 웃고 있는 나를 그저 빤히 바라볼 뿐.
쉽게 다가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혼자 교내를 산책하는 나를 훔쳐보는 라그나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나를 보며 한참이나 고민을 하더니 마침내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뿐, 내게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선배!”
제롬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는 플뢰르도 함께였다.
“부회장이 회의를 앞두고서 어디를 간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모시러 갔었어야 했는데.…."
라그나르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미안한 듯 웃으며 제롬을 토닥였고, 플뢰르를 위로했다.
아카데미에서 보던 평범한 모습이었다.
“회의를 까먹은 거야?”
이번에는 렉시우스가 껄렁거리며 다가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짜증을 낸다기보다는 장난스럽게 타박하는 목소리였다.
의외의 모습에 놀라 하는데 그 뒤로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모두와 인사를 하고 함께 이야기를 했다.
렉시우스의 뒤로 카롤리나와 마리아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선배!"
“다프네!”
두 사람은 내 앞으로 뛰어오더니 호승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둘 중 누가 더 너랑 친한 거야?”
“우리 둘 중 누구랑 더 친해요?"
동시에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은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외쳤다.
“어머, 당연히 나인 것 아냐?”
“당연히 저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자 앞에 있던 내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모르겠으나 행복해 보였다.
“미안하지만 두 사람보다 나와 더 친하고, 나를 더 좋아해서 말이야."
그 뒤로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시몬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가볍게 팔을 올렸다.
“그렇지, 다프네?”
“당연하지. 내 가장 소중한 친구는 시몬인 걸.”
'어쩐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것 같네.' 한군데에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 참 신기해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이상한 기분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그나르는 한층 죽은 눈으로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생기가 가득 한 눈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더더욱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한참이고 나와 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멈췄던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라그나르를 발견한 플뢰르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아가씨의 호위는 나로도 충분하다고 했을 텐데!”
플뢰르의 경계 어린 모습에 주변에 있던 모두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다프네의 친구는 나뿐이면 충분해.”
카롤리나가 제 화려한 금발을 쓸어 넘기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제롬도 말을 얹었고, 마리아가 투덜거리며 자기도 귀염받는 후배가 될 거라며 포부를 밝혔다.
“다프네의 가장 소중한 소꿉친구는 나뿐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시몬 마저 말을 얹었다.
“애초에 그렇게 떠난 네가 이렇게 당당하게 다프네의 앞에 나타날 자격이 있나?"
"나는…!”
라그나르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걸음 더 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끝내 세 번째 걸음마저 막혀 버렸다.
이번에는 그들의 중심에 서 있던 내가 나온 것이다.
“라그나르.”
“다프네….”
"나 더는 네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아.”
“........."
그 말에 간신히 짓고 있던 라그나르의 미소가 깨졌다.
“소중한 가족들도, 친구도, 후배도 가득한걸! 난 더 이상 예전처럼 너의 빈자리를 느끼며 울고, 외로워질까 봐 두려워하는 멍청한 아이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라그나르를 경멸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이제 내 인생에 너는 필요 없어졌어. 그러니 앞으로 내 앞에 그만 나타나 주겠니?”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는 부끄러운 소녀처럼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라그나르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주변이 이상하게 흐려지면서 깜깜한 어둠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다른 분위기에 이상함을 느끼던 찰나 다시금 이곳이 변해 버렸다.
라그나르의 악몽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