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눈앞에 많은 사람이 죽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슬퍼하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에 보았던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라그나르를 제외한 모두가.
“미안해, 미안해. 다프네,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너의 소중한 사람들을 내가….”
라그나르는 나를 껴안은 채 죄를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 울부짖었다.
라그나르의 몸 곳곳에 튀어 있는 피가 내게 병처럼 옮아와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라그나르의 사과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눈물을 머금고서 하는 고해들에 결국 참다못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라그나르를 밀쳐 내었다.
“가증스럽게 왜 네가 울고 있는 거야?”
"......."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그 자리를 네가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니야, 나는!”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눈물을 흘리고는 두렵다는 듯이 몸을 벌벌 떨며 라그나르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라그나르가 내게 다가왔을 때와는 다르게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뒤로 물러났고 어느새 생겨난 낭떠러지 끝자락에 서 있었다.
라그나르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으나 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 더 빨랐다.
"다가오지 마!”
“다프네, 위험해.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나는, 나는..….”
"네가 가진 그 역겨운 감정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나는 기겁하며 소름 끼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가 최악이었어! 내가 왜 암살자에게 자비를 베풀었을까!”
"......"
“그 후에도 마찬가지야. 우리 집에 얹혀살았으면서 날 죽이려고 해?”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나스의 모습으로 나를 속이고 몰래 떠나 버리더니 어떻게 뻔뻔하게 나를 다시 만나러 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자 라그나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심지어 그 아이랑 같이 오다니.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넌 아니잖아. 넌 다 알고 있었잖아!"
“다프네, 미안해. 네가 보고 싶어서 그 아이의 힘을 빌려서라도 만나고 싶었어. 내가 정말 미안해.
위험하니까 제발 이리로 와.”
“가까이 오지 마!”
내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뒤로 가자 라그나르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라그나르와 대치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그 아슬아슬한 자리에 서 있었다.
“던전에서도 그래. 뻔뻔하게 마리아를 따라오고, 나를 구하면서, 한다는 말이 사실은 내가 드래곤이었다고? 반려가 되고 싶다고?"
내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치를 떨고 있는 나의 모습은 스스로에게조차도 너무 낯설었다.
“역겨워."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추억으로만 남겨 놓지 그랬어. 너와 행복했던 시간마저 모두 끔찍한 기억으로 변해 버렸잖아.”
나는 날카로운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 이게 네가 바라는 행복이야? 내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죽여서 내게는 너밖에 남지 않는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러지 않으려 했어!”
“생각은 해 봤다는 소리구나. 이게 드래곤과 인간의 차이인가 봐.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니. 하하. 그런 네 옆에 어떻게 계속 있을 수 있겠어.”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니 내 앞에 있는 다프네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과 같아 보였다.
그만큼 위태로워 보였다.
“이건 다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오롯이 너 때문에.”
나지막이 내뱉는 말은 마치 저주같았다.
라그나르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저 가만히 악몽 속 다프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소중한 사람이 너밖에 남지 않는다니. 그것보다 끔찍한 게 어디 있겠니.”
다프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럴 바엔 그냥 죽을래.”
그리고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프네!!!”
라그나르가 소리를 지르며 그곳을 향해 뛰어갔지만 떨어지는 다 프네의 손을 붙잡지 못했다.
"나 때문에 다프네가, 다프네가 죽었….”
라그나르의 눈에서 결국 참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네 옆에 있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하기를 원치 않았어. 정말로, 정말로”
라그나르의 외침은 그가 바라보는 다프네에게 닫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널 좋아해서 미안해. 내가 네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라그나르는 죄책감에 빠져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이게 라그나르가 가장 두려워한 악몽인가.
내게 버려지고, 자신의 잘못으로 내가 희생되는 것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니.
'그날의 대화로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괜찮아진 것은 나뿐이었던 거겠지.
'이게 라그나르의 가장 두려운 악몽이라면…. 내가 이 환상을 깨주면 돼.’
나는 쥐고 있던 손을 펴고서 라그나르의 이름을 외쳤다.
“라그나르!”
큰소리로 외쳐도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괴로워하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자책할 뿐이었다.
"내가,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내가…."
아무리 불러도 라그나르에게 내 목소리가 닫지 않으니 답답함에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화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고, 답답함이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울고 있는 라그나르를 바라볼수록,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라그나르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라그나르.”
나는 주저앉아 있는 라그나르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난 네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다프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가 닿았다.
라그나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물이 가득 잠긴 그의 눈에 내가 맺혔다.
드디어 우리의 시선이 마주치자 라그나르는 더욱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터트렸다.
라그나르는 내게로 손을 뻗다가 차마 닿지 못한 채 빠르게 손을 내렸다.
"내가, 내가 네 소중한 사람들을 죽였어. 미안해, 나는, 나는!"
“진정해, 라그나르."
"네 옆에 내 자리가 없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 난 아직 어리숙하고 부족한데 너는 누구에게나 환하게 빛이 나니까….”
나는 라그나르를 내 품으로 끌어 당겼다.
라그나르의 고백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다.
"네 옆에 내 자리가 없을까 무서워서 그들을 질투했어. 내가 버려질까 봐, 혼자 남겨질까 봐 너무 무서웠어.”
“라그나르.”
“그래도 네 소중한 사람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았어. 네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라그나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제발 죽지 말아 줘. 나 때문에 네가 죽는다면 나는……."
붉게 짓무른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 주어도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미안해.”
"또 미안한 게 남았어?"
"내가 널 좋아해서 미안해.”
"......."
고백 뒤에 사과가 덧붙여졌다.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라그나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게 다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널 상처 줄 일따위는 없었을 텐데.”
“......."
“내가 네게 부족한 사람이라 미안해.”
나는 라그나르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간절하게 내뱉는 말에 내가 무어라 말을 덧붙어야 할지 고민하는 찰나 라그나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환하게 빛나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그, 그만.”
“내게만 환히 빛나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라라."
나는 오랜만에 라그나르의 애칭을 입에 담아 보았다.
어색하기도 했고 조금 낯가지러운 느낌도 들었다.
말없이 라그나르를 안고 있자니 어느새 그가 부드럽게 나를 품에서 떼어 냈다.
두 손으로 내 양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라그나르는 내 이마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나 때문에 죽었음에도 너는 이렇게나 다정하지. 그런 널 위해서 마지막으로 선물을 줄게."
내가 이마를 만지며 당황하는 사이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죽으면 넌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뭐?”
"고맙고, 정말로….”
라그나르의 몸이 조금 전 내가 뛰어내린 낭떠러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게 다짐한 듯, 그의 표정과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보이지 않았다.
“자, 잠시만!”
나는 라그나르를 잡으려 했으나 어느새 흐려진 그의 몸이 스쳐 지나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고, 어느새 라그나르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었다.
라그나르는 뛰어내리기 전에 나를 쳐다보고는 조금 전 뛰어내린 환영 속의 나처럼 환히 웃었다.
“사랑해.”
반짝이는 미소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이 나 때문에 목숨을 버리다니 비록 현실이 아니었지만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그와 동시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나는 힘껏 도약해 라그나르에게로 몸을 던졌다.
손을 잡을 수 없다면 옷이라도 잡아야겠다는 집념으로 라그나르의 어깨를 거칠게 휘어잡았고, 그를 뒤돌아 세웠다.
눈물을 흘리며 내게 고백하는 모습에 저지른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후회할까?’
라그나르의 놀란 눈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그의 옷깃을 붙든 채 내게로 힘껏 끌어당겼다.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그저 마음이 흐르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가까워진 우리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물렸다.
라그나르의 눈이 화들짝 놀라 크게 떠졌다.
'첫 키스에서는 달콤한 맛이 난 다던데.’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으나 삭막한 악몽 속에서 잠시나마 꽃이 떠다니는 것 같은 달콤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그가 떨어질세라 더욱더 내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깊게 맞물린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그나르의 볼이 탐스러운 장미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누구의 심장 소리인지도 모르겠는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고, 마치 세상을 가진 듯 황홀한 기분이 차올랐다.
한참 동안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떼어 내자 내 입가엔 미소가 화사하게 피어났다.
"내가 말했잖아. 널 버리지 않겠다고.”
“다프네…?”
“널 무서워하지 않아. 역겹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난….”
"너를 이곳에 두고 가지도 않을 거야.”
어느덧 우리를 감싼 이곳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의 입맞춤이 라그나르가 깜짝 놀랄 만큼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나 또한 충동적이었으나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꿈인가?”
“꿈?”
“네가 나에게 이런, 이런 걸 할 리가 없으니까.”
라그나르는 제 입술을 매만지며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바보야.”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너랑 더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고?”
그때 라그나르의 뒤에서 괴로운 신음이 들려왔다.
“라그나로, 너 때문에 죽은 날두고 떠날 거야?"
조금 전 낭떠러지로 떨어진 내 환영이 보이자 라그나르의 눈에 혼란스러움이 차올랐다.
둘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그 표정에 나는 지금껏 참고 있던 화를 터트리기라도 하는 듯 망설임 없이 리볼버를 겨누었다.
“적어도 내 흉내를 낼 거면 라그나르를 죽이려고 하진 말았어야지.”
내가 악몽 속 환영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붙이자 짧은 비명과 함께 거울이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두 번 다시 너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거든."
라그나르는 놀란 눈으로 그곳을 보더니 나를 보고서 서서히 경악에 빠졌다.
이제야 현실을 자각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나는 속 시원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함께 이 악몽에서 빠져나가자.”
라그나르가 붉어진 얼굴로 한줄기 눈물을 떨어트렸다.
“너와 함께라면 악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구나.”
고백보다 더 부끄러운 말에 난감한 듯 미소를 지으니 드디어 라그나르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어느덧 우리를 감싼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