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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49화 (148/185)

제149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커다란 거울에 금이 가 있는 것이 보였다.

“라라?”

혹시 나 혼자 빠져나온 것이 아닌지 놀라 라그나르를 찾는데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정말 다프네였구나.”

라그나르는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제 품으로 끌어당겨 힘껏 껴안았다.

뒤에서 안은 터라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라그나르의 이름을 다시 불렀으나 그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평소와 같은 씩씩한 모습과는 달리 두려움에 가득 차 보였다.

그렇기에 나도 그저 조용히 그를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다 들었어?"

“응.”

듣기야 다 들었지.

나는 라그나르의 등을 토닥여 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네 악몽이 나랑 연관될 줄 몰랐어. 그래서 조금 놀라기는 했는 데….”

“맹세코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내게 실망하지 말아 줘.”

라그나르의 침울한 목소리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난 언제나 널 믿는 거 몰라?”

내 미소에 라그나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라그나르?”

"어떻게 하지."

“응?”

라그나르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역시 포기하고 싶지 않아.”

“뭐를?"

"다 들었다면서.”

라그나르가 심술 난 표정으로 나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내가 오스왈드의 던전에서 너를 구했을 때 했던 말 기억해?"

"으음. 기억하지.”

나는 머릿속으로 그 날을 되짚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반려가 되어 달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어.”

"아.”

직설적인 말에 내 표정이 딱딱히 굳어 버렸다.

라그나르는 내 표정을 보고서 멈칫한 듯했으나 각오라도 한 듯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정말 형편없는 고백이었어. 그런 고백을 듣고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랄 순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라그나르가 부끄럽다는 듯 웃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라그나르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내 긴 속눈썹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처연해 보였다.

“좋아해, 다프네.”

"난….”

"내 처음과 끝이 모두 너였으면 좋겠어.”

라그나르는 부끄럽지도 않은지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듣고 있는 내가 더 부끄러워져 입술을 다물고는 괜히 손을 꼼지락거렸다.

"내 반려가 되어줬으면 해. 너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함께 행복 해지고 싶어."

가슴속을 간질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라그나르와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고, 섣불리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후에 그를 상처를 입힐까 봐 걱정되었다.

애초에 나는 연인 간의 사랑이란 감정을 잘 이해 못 하겠는걸.

서로 존중하는 부부 사이였으나 배신당한 내 친엄마를 떠올리면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없었다.

나를 향한 올곧은 이 마음을 돌려줄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쉽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 때문에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어색함을 털어 내고서 라그나르의 손을 꼭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야.”

"......!"

라그나르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어릴 때와 다르게 우리는 많이 자라났고, 너와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나는 부끄러워 괜히 먼 곳을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듯 물에 젖은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 아름다워 나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미소지었다.

“아직 내 감정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였다가 네가 상처입을까 봐 걱정돼.”

“응.”

“그러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 봐도 될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라그나르가 활짝 웃었다.

고백에 대한 확실한 답을 해 준 것도 아닌데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미소에 부끄러움이 밀려와 휙 고개를 돌렸다.

'우는 모습도 예쁘고 난리람.'

울면서 하는 고백은 또 처음 받아 보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는 어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헛기침을 하였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그나르의 의아한 눈빛이 내게 따라붙었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응.”

라그나르는 어린 시절의 환영처럼 행복한 미소를 보여 주며 더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꼭 붙잡았다.

* * *

“키키를 안 데려오기를 잘했다."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집에 두고 나왔는데 다행히도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운이 좋게도 라그나르를 구하느라 부순 거울이 던전의 마지막 핵심이라도 되었는지 던전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짝이던 거울도 모두 사라지고, 평평한 길을 걸으니 어찌나 마음이 편안하던지.

“이대로 일행을 찾고 다 같이 빠져나가자.”

라그나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주변을 살피며 걷는데 다행히도 곧 시몬의 무리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모두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얼굴 빛은 좋지 않았으나 멀쩡히 서 있는 모양새에 안심할 수 있었다.

"다들 무사하시네요.”

다행이라며 덧붙이고는 다가가는데 그쪽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아, 다행이네. 찾으러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몬 또한 나를 늦게 발견했는지 아는 척을 하며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굳게 찌푸려져 있던 표정이 풀리자 옆에 있던 기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수상한 사람을 찾아서 말이야.”

“수상한 사람이라니요?"

던전에 이상한 수작을 부리기라도 한 사람이 있는 걸까?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가는데 시몬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 오더니 어디엔가 고정이 되었다.

시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나와 라그나르가 꼭 붙들고 있는 손에서 멈추어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둘이 사이가 참 좋군."

“아…”

“아, 이건….”

내가 라그나르의 손을 놓으려고 하자 그가 힘을 꽉 주며 놓지 않으려고 버텨 댔다.

“라그나르."

"나 아직 무서워.”

“뭐?”

“괜찮아질 때까지 손 좀 잡아 주면 안 돼?”

라그나르가 울망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고, 나는 그 눈빛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뒤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무서워질 때 말해 줘야 해."

"당연하지.”

"과연 던전에서 나갈 때까지 그런 말 하는 걸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시몬이 빈정거렸으나 라그나르는 가볍게 무시하며 넘겼다.

“그보다 수상한 사람이라니요?"

“위협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이곳에 팔려 왔어요! 누가 저를 팔고서 이곳에 던져 넣었다고요!"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황립 보육원에서 얼마 전에 졸업한 아이예요!"

“보육원?"

그 말에 순간적으로 라그나르와 시몬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이를 먹어 헷갈리기는 했지만 왜 익숙한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제 이름은 스텐입니다! 보육원장이 일자리를 준다며 소개자를 따라가라 해서 따라왔는데 갑자기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스텐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치다가 마른기침을 거세게 토해 냈다.

“잠시만 그를 일으켜 세워 주세요.”

내 말에 시몬이 눈짓했고, 기사들을 재빠르게 그를 포박하던 손길을 떼어 냈다.

허리를 세워 일어나도 여전히 기침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가방 속에서 물통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물 좀 마시는 게 좋겠네요."

“가, 감사합니다.”

스텐은 허겁지겁 물 한 통을 빠르게 비워 냈다.

어지간히 갈증이 났는지 빈 물통을 아쉽게 보는 것에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지금 가진 건 그것뿐이네요. 역시 많이 부족하시죠?”

“아, 아닙니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스텐은 부끄럽다는 듯이 웃으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날 전혀 몰라보는군.'

스텐, 어릴 적 나를 악질적으로 괴롭혔던 소년 한 명을 떠올리며 나는 남몰래 표정을 굳혔다.

'일단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겠지.'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그가 다시 나를 보기 전에 다시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스텐 씨는 언제부터 이곳에 계셨던 거죠?"

“네, 네?”

“보육원장의 명을 따라서 이곳에 왔다면서요.”

보육원장이 언급되자 스텐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분노를 아끼지 않았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 친구들도 함께 왔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저만 살아남았어요!"

"흐음.”

스텐의 억울함이 가득한 호소에 라그나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내며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죽었다?"

“예.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놈들이 우리가 팔려 온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면 돈을 준다며 우리를 던져 놓고는 사라졌습니다!”

라그나르의 물음에 스텐이 허겁지겁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시몬과 라그나르에게 눈짓을 하며 따로 이야기를 하자며 신호를 보내 우리끼리 모였다.

"보육원 사람이 맞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시몬의 물음에 나는 별 것 아니라며 덧붙였다.

“어렸을 때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었거든. 나를 유독 심하게 괴롭혀서 그런지 쉽게 잊혀지지가 않네.”

내 말에 두 사람은 불쾌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새끼가?”

“저놈이?”

시몬과 라그나르의 말이 험악해졌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쟤를 이용해서 보육원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내 말에 두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수상한 사람들은 던전이 생겼던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

라그나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것도 보육원장도 함께 말이야.”

“그런데 황실에 보고를 안 했다?”

마지막으로 시몬이 화가 난 듯 차가운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아무래도 던전의 부산물을 차지하려 보육원 아이들을 이용한 모양이군. 황립 보육원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황실을 기만하다니."

시몬의 분노는 사라져 가는 던전안의 기운보다도 더 무서웠다.

“제, 제발 도와주세요! 시키시는 일은 모두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좀 살려 주세요!"

스텐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갑자기 내게로 달려들어 내 손을 꼭 붙잡고서 필사적으로 외쳤다.

우리 중 그나마 내가 상대하기 편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내게 좋은 기억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라그나르가 스텐의 어깨를 잡고 뒤로 밀어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반동으로 휘청이는 나를 자신의 품으로 받아 내었다.

그러고는 시몬의 옆에 조심스럽게 놓아주는 것이 아닌가.

“뭐야?”

“사정은 딱하지만 네게 손대는 건 별개의 문제지.”

“뭐?”

"저기는 내게 맡기고, 너는.….”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몬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손을 닦아 주었다.

“다프네는 내게 맡겨.”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작게 속삭인 뒤에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라그나르는 나만 볼 수 있도록 가볍게 윙크를 하더니 스텐에게 다가갔다.

"마음에 안 들지만 네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스텐이 지금까지보다 더욱 처참하게 비명을 지른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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