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50화 (149/185)

제150화.

플뢰르는 거친 수풀을 헤치며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깔끔히 베어냈다.

눈 하나 찌푸리지 않고 거침없이 몬스터를 처리해 내는 모습에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감탄을 내뱉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지 끊임없이 놀라기 바빴다.

플뢰르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 주변의 몬스터는 이놈들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예? 어떻게 아십니까?”

기사들의 존칭에 플뢰르는 예의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던전이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던전의 기운이 사그라들고 있네요. 아마도 곧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건!”

“황태자 전하께서 던전을 무사히 공략하셨다는 거군요!"

'정확히는 다프네 님이겠지만.' 플뢰르는 굳이 쓸데없이 논쟁을 일으킬만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서 미소를 짓자니 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신나는 얼굴이 되었다.

“다행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시겠죠?”

“그분이 어떤 분입니까. 당연히 무사할 겁니다.”

기사들끼리 제 주군에 대해 칭찬을 주고받는 것을 바라보며 플뢰르는 던전에 있을 제 주인인 다프네를 떠올렸다.

'괜찮으시겠지.'

옆에 라그나르도 있으니 무사할 것을 잘 알면서도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이 몬스터는 독이 있었나 봅니다.”

선에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공자님께서도 먼저 가서 쉬고 계시지요. 설마 저와 대련하기 위해 남아서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비꼬는 말투가 이어졌으나 카스토르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빤히 플뢰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복잡한 눈빛에 호승심은 없었다.

"너는….”

“너는?”

카스토르는 무언가 심각한 것을 고민하는 듯 한참이고 말을 아끼다 의문스럽게 물었다.

“…왜 상단주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거지?"

“기껏 한다는 고민이 그거였습니까?"

별것도 아닌 걸 심각하게 말한다.

며 플뢰르가 카스토르를 보며 웃었다.

평상시였더라면 답해 주지 않았겠으나 평소와 달리 얌전한 모습에 이 정도야 흔쾌히 말해 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 누구도 내게 내 삶을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기회라니?”

“상단주님은 제가 도저히 버틸수 없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분입니다.”

“가장 힘들 때 도와줘서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건가?”

"아니요.”

카스토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더욱 마음에 들었기에 플뢰르는 다문 입을 다시 열어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분 덕분에 저는 제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었거든요.”

“소중한 것? 그게 뭐지?”

“저의 신념이요.”

던전의 기운이 사라지자 조금은 미적지근한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 오기 시작했다.

플뢰르는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고는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들고 싶었습니다.”

“… 지키기 위해서?"

"네."

카스토르는 잠시 멈칫하더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도 필요 이상으로 대련을 하려 들지 않았지. 공격할 때도 칼등으로 하고 말이야.”

“버릇인지라. 자세히도 관찰하셨네요.”

"라이벌…. 라이벌이 될 수도 있다 생각했으니까.”

“네?”

카스토르의 말에 플뢰르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 정말 공자님 맞으십니까?

오늘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플뢰르의 말에 카스토르는 어이 없다는 듯 픽 웃었다.

“내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이상한 것인지 모르겠군.”

카스토르는 죽은 몬스터의 시체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간히 고민이 많은 듯한 표정 인지라 플뢰르는 이대로 보내기에는 찜찜한 기분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왜 검을 드시나요?”

“뭐?”

“저는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듭니다. 공자님께서는요?"

플뢰르의 질문에 카스토르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 그런 건 생각해 보지 못했어. 그냥 어디서나 최고가 되어야 했으니까.”

“왜요?"

“…최고가 되어야.”

카스토르의 눈에 물들어 있던 당황은 사라지고 우울함으로 가득차올랐다.

“그래야 누님을 지킬 수 있으니까.”

“공녀님을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든 겁니까?"

“검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누님처럼 아껴 주실 것 같았어. 하지만 실패했고….”

카스토르의 풀 죽은 목소리를 듣자 검술 선배로서 조언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 자신을 위해서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까?"

카스토르는 한참이고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퍽 우울해 보이는 것이 이제는 안쓰러움까지 몰려올 정도였다.

“이 일로 누님에게 화도 내고 나왔네. 쓸데없는 자격지심이었는데 말이야.”

'의외로 스스로를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네.' 플뢰르는 일부러 표정을 딱딱히 굳히며 말했다.

“그럼 검을 잡는 게 싫습니까?"

“싫지는 않아. 조금 즐거운 것 같아. 아니, 즐거워.”

제가 콜로세움에 갇혀 있을 때도 억지로 검을 들고 휘둘렀으니까.

이유도 명분도 없이 다른 사람의 유흥을 위해서 검을 들었었다.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시킨다고 검을 듭니까?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이유를 만들어 보세요.”

“검을 드는 나만의 이유?"

“예,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카스토르는 영문 모를 표정만 짓다 민망한지 더는 묻지도 않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검을 사랑하게 된다면, 공자님께서 검에 진심을 담을 수가 있다.

면 그땐 대련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죽어도 안 해 줄 것처럼 굴지 않았나.”

“명분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검에 진심을 담은 그 순간부터는 제 라이벌이 될 거잖아요.”

당돌한 플뢰르의 말에 드디어 카스토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약속 지켜.”

조금 전과 다르게 한결 가벼운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이 한결 위로가 된 듯해 플뢰르 또한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조금 더 둘러볼 테니 이만 천막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아니, 금방 따라가지."

"마음대로 하세요.”

플뢰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그곳에 카스토르를 두고 다시 숲길을 헤쳐 나갔다.

카스토르는 감히 평민 주제에 건방지게 제게 조언을 남기고 간 플뢰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위해서 노력해 보는 게 맞겠지.'

누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해서.

카스토르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공작저에서 마리아와 싸웠을 때 뒤쪽에 숨겨 놓았던 작은 책이었다.

유니스가 간절히 찾던 그녀의 일기장이기도 했다.

“애초에 어머니의 방에 왜 이런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카스토르는 그것을 처음 읽고 났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며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누님이 주인공이라면서 누님 옆에 있어야 할 기사도, 남자도 모두 다른 여자에게 가 있지 않은가.

‘다프네라는 여자는 이 책 속에 나오지 않았었는데.’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위축된 나머지 건방지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는 있어서는 안될 존재 같다고 생각하니 막연히 두려움이 생겼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벗어난 개척자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탓이라며 카스토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어머니께서 지어낸 소설이겠지.”

괜히 주변에 화풀이하지 말자 다 짐하며 카스토르는 찝찝한 얼굴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당사자들이 보면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

카스토르는 유니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가족들이 본다면 분명히 충격에 빠질 것 같으니 미리 예방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몬스터의 시체 위로 책을 던졌다.

끈적한 액체 위로 떨어진 책이 금세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카스토르는 그것을 확인한 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 * *

“던전이 사라지다니 이게 무슨 일인지.”

베르돌트는 험난한 산 중앙에 서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머물기 좋았는데 말이야.”

베르돌트는 짐짝처럼 들고 온 사람 한 명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니, 그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생을 마감한 시체였다.

죽기 직전까지 두려움에 떨었었는지 끔찍한 모습이었다.

“이제 몇 명 남았더라."

베르돌트는 입맛을 다시며 무미건 조한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공기가 맑아진 산맥을 거니 는데 근처에 널브러진 몬스터 시체 사이로 무언가 떨어진 것이 보였다.

“뭘까.”

이상하게 눈길이 가는 것이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베르돌트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주워 들었다.

책은 반 이상이 녹아내려 엉망이 되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읽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지만, 베르돌트는 별로 놀라지 않고 그 위에 마법진을 그려 넣었다.

잠시 후 책은 언제 녹아내렸냐는 듯 멀쩡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몬스터 시체 더미에 버려진 채 녹아내린 책이라.….”

수상해서 더더욱 흥미로웠다.

부디 짜증이 치미는 이 상황에 화를 식힐 만한 유희거리면 좋겠는데.

베르돌트의 중얼거림은 주변에 있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하?"

그리고 베르돌트는 책을 읽자마자 간신히 짓고 있던 미소를 입가에서 지워 버렸다.

“왜 여기에 내 사랑스러운 동생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베르돌트의 표정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베르돌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표지에 쓰인 이름을 보고서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헤로니스 공작 부인이라…. 새로운 동업자가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베르돌트는 누가 보면 겁에 질릴 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옛 동업자를 만나러가 볼까. 슬슬 크게 사건 하나 터트려 줄 때가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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