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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51화 (150/185)

제151화.

던전을 공략하며 빠져나오면서 던전 구석구석에 남아 있던 유골을 우리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다.

이곳에 팔려 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있다는 스텐의 증언에 신뢰가 더해졌다.

황실조차 몰랐던 던전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골.

제국에서 황실 모르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시몬에게는 꽤 충격이었다.

시몬은 황실로 돌아가자마자 스텐을 조사하였고, 조사 끝에 그를 황실에서 증인으로 보호하기로 하였다.

"수상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수색하도록 해라! 도망치는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고, 아이들은 보호하도록!"

그리고 이 사건은 자신이 담당할 것이라며 누구보다 투명하게 조사할 것을 내게 다짐해 보였다.

시몬을 믿기는 하지만 역시 걱정이 되다 보니 그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보육원이 탈탈 털리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시몬의 굳은 얼굴이 풀리지 않는 것에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직접 나서 줄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황실로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한 채 기사들을 이끌고서 보육원으로 향하는 시몬을 그의 부관들이 걱정하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이 일도 어느 정도 계획하던 것 이기는 했어.”

나 또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시몬을 바라보니 옆에 서 있던 라라가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재단을 설립할 때 시몬이 도와줬거든.”

“그럼 둘이서 나 빼고 보육원 건에 대해 상의를 했던 거야?"

깜짝 놀라 물으니 라그나르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도 나도 네게 나쁜 기억으로 물들어 있는 곳을 그대로 둘생각은 없었으니까.”

"너희는 진짜….”

평소에는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들이 가끔 이렇게 감동을 주었다.

"나보다 더 어른스럽다니까.”

고마운 감정을 쉽게 내보이지 못할 정도로 기뻐 살포시 웃으니 라그나 르가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끌려 나오는 보육원장이 보였다.

“이거 놓으십시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정말 죄가 없단 말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억지를 부리는 보육원장의 모습은 솔직히 꼴사나웠다.

기사들은 보육원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학대한 증거 또한 발견했다며 보육원 직원들 또한 모두 체포되었다.

"엉”

“흐어어엉."

흉흉한 분위기에 아이 중 한 명이 크게 눈물을 터트렸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옆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놀라 황급히 아이를 달래 주려고 다가갔다.

하지만 기사들이 주변을 수색하는 살벌한 모습이 기억에 남았는지 아이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주변의 아이들마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을 보고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온통 검은색뿐인 어두운 드레스에 검은 베일까지 쓴 수상한 사람이 등장하니 아이들은 기사들과 다른 의미로 두려운지 소리를 참은 채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주변에 어른들이라고는 기사 들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베일을 거두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베일이 거두어지고 내 얼굴이 나오니 아이들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울지 말렴.”

짧은 말이었지만 아이들이 뚝 하고 눈물을 그쳤다.

아이 중 한 명이 내 눈치를 보더니 슬쩍 물었다.

“기사님들이 선생님들을 다 잡아 갔어요.”

“그래. 잘못을 저질러서 그에 대한 벌을 받으러 가는 거란다.”

“그럼 선생님들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돼요?”

아이의 물음에 옆에 있던 기사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를 낼 때는 무서웠지만 그래도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분은 선생님들밖에 없는걸요."

아이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학대를 당해도 결국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것은 무서운 어른들이었으니 기댈 곳이 그들밖에 없는 것이겠지.

나는 무릎을 접어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조곤조곤 말해 주었다.

“너희를 아껴 줄 수 있는 새로운 선생님이 올 거란다.”

“저희를 아껴 주신다고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목소리로 묻는 것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라그나르를 향해 물었다.

“그렇지, 라그나르?"

차기 보육원장이 될 것이라 선언했으니 말한 것은 지키겠지.

내 물음에 라그나르가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만큼 좋은 사람도 많거든. 너희의 옆에 좋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게 이분이 최선을 다할 거란다.”

“정말로 그런 선생님이 올까요?"

아이의 질문에 이번에는 내가 답하지 않고 라그나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시선에 라그나르가 어색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들을 뽑을게.”

투박하지만 아이들을 향한 진실한 약속이었다.

아이들은 그것이면 되었다는 듯 다행히도 금방 웃음을 꽃피워 냈다.

* * *

“갑자기 폐하께서는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걸까.”

내 물음에 시몬이 답해 주었다.

“던전에 다녀왔으니 공을 치하해 주시려는 것이 아닐까?"

그 말에 라그나르는 이런 장면을 어디선가 읽어 본 적이 있다며 별것 아닌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그럴걸. 역사서 보면 그러던데.”

“넌 세상을 책으로 배우는 그 버릇을 좀 고쳐야 해."

시몬의 지적에 라그나르는 뜨끔한 표정을 짓더니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레어에 갇혀 있는 동안 책밖에 못 읽어서 그런 걸 어떻게 해?"

“그러니 이 기회에 더 밖으로 돌아다니고 그러라는 친우의 진심이 담긴 충고야.”

“두 사람 다 그만해. 그리고 시몬 너도 일만 하지 말고 적당히 쉬면서 해. 적어도 산책이라도 좀 하면서 바깥 공기를 쓰라고.”

안색이 안 좋다며 걱정하는 목소리에 시몬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라그나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여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시몬의 말이 틀린 건 아냐.”

내 말에 라그나르 또한 시몬을 따라 머쓱하게 말을 아꼈다.

셋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폐하의 침실에서 면담하게 되다니.”

황제의 사적인 장소에 출입할 수 있단 건 영광스러운 일이겠지.

“요새 아바마마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셔서.”

그래서 시몬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에버하르트도 만나 봤는데 긴장할 게 뭐 있어.'

드래곤이라 그런지 모르겠다만 라그나르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몬이 노크하자 안에서 허락이 떨어졌고, 곧 문이 열렸다.

화려한 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침대에 누군가가 등을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클레멘스의 태양을 뵙습니다."

내 인사와 함께 옆에 있는 라그나르 또한 나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인자한 목소리로 고개를 들라 허락하였다.

“시몬의 친구들이라 들었네. 이만 고개를 들고, 친구의 아버지를 본다 생각하고 편히 대하게.”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들었고 황제는 가까이에서 본 내 얼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을 …

“…프레이르 황녀?”

역시나 이 물음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익숙하다는 듯 자기소개를 하였다.

“제 이름은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이런. 아무래도 내가 많이 늙긴 한 모양이야.”

황제는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시몬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관찰하니 과연 시몬이 조금 보였다.

'악셀리우스 아저씨는 인상이 무서운데 형인 황제 쪽은 아니네.'

시몬의 선한 외모는 황제를 쏙 빼닮아 있었다.

악셀리우스와 다르게 선이 곱고, 부드러운 인상의 황제는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꽃을 닮은 사내였다.

"어릴 적부터 사귄 친우들이라더니 이제야 보여 주는구나.”

황제의 섭섭한 목소리에 시몬이 헛기침을 하며 우리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 나가 있던지라 소개해 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시몬이 우리를 끝까지 붙잡지 않았다면 이러한 친구 관계도 유지 되지 않았겠지.

“그래도 제 소중한 친우들이니 어여쁘게 봐주셔야 합니다."

“그럼, 그렇고말고.”

시몬에게 가진 이 고마운 감정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이좋은 부자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자니 황제가 우리를 향해 말했다.

“이번 던전 문제에서 큰 공을 세운 이들이라 들었네.”

“황태자 전하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덕분에 시몬의 입지도 더 튼튼해졌겠지. 좋은 친구들이야.”

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곧 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상을 줄까 하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황급히 말을 얹어 보았으나 황제는 단호했다.

“부끄러워 할 것 없이 말해 보게. 괜찮으니.”

“생각해 본 것이 없는지라….”

내가 말끝을 흐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라그나르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청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래, 그래. 말해 보아라."

'라그나르가 청하고 싶은 것?' 물욕도 없고, 권력욕도 없고, 나를 제외하고선 어떤 것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던 라그나르가 웬일일까.

시몬 또한 마찬가지인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라그나르를 응시했다.

라그나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에 황립 보육원의원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시몬의 도움으로 시하브 프리다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원장 자리를 박탈당했다.

라그나르는 황실에 막대한 기부 금과 함께 원장직에 오르고 싶다며 청하였고, 시몬의 도움으로 빠르게 그 자리에 오른 것 또한 소문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 들었네.”

“황립 보육원의 직원은 황실에서 선정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있지만?”

“새로운 보육원의 직원은 제가 직접 보고 뽑고 싶습니다."

황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째서?”

“좋은 선생님들을 뽑아 주겠다고 아이들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 말에 울고 있던 보육원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때문에 마지못해 꺼낸 말인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원을 청하는 것이 어쩐지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보육원장 자리에 진심으로 임하려는 거였구나.'

황제는 라그나르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좋아. 그러도록 하려무나. 그대와 같이 좋은 이가 원장직에 앉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군."

“황태자 전하께서 이끌어 갈 황실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라그나르의 본론이 끝났고 황제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신중한 것도 좋은 법이지."

황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그나르가 바빠졌다.

나 못지않게 바빠졌다.

낡아 빠진 보육원을 전체적으로 보수하고, 손수 이력서를 살피고 면접을 보며 새로운 직원들을 뽑는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주는 것 또한 빼먹지 않으니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나는 자정이 넘어가는 시계를 보다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키키가 서류 위에 올라탄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더 일하지 말라는 거니?"

키키 -

짧은 웃음소리가 귀여워 웃으며 키키의 말을 따라 주기로 했다.

“어차피 라그나르가 오기 전까지는 깨어 있을 생각이니까… 자기 전에 가볍게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키키는 좋다는 듯 신나는 목소리로 캥캥 울었다.

나는 키키를 품에 안은 채 달밤의 산책을 즐기기 위해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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