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오래간만의 밤 산책은 꽤 즐거웠다.
키키 또한 나와 같은 감정인지 신나게 뛰어놀기 바빴다.
"키키, 멀리 가면 안 돼."
나는 키키에게 주의를 시키며 조금 쉬어 가기 위해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동그랗게 뜬 보름달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으음, 어쩐지 피곤하네.”
피로가 쌓인 채 바로 일을 시작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며칠 동안 자야 할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도 산책을 나와서 그런 걸까.
'둘 다겠지.'
나는 혼자 킥킥거리며 웃고는 크게 하품을 했다.
피곤하다고 자각하고 나니 어쩐지 눈이 자꾸 가물가물 감기는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가서 자야 하는데.'
이 숲이 아무리 앞마당이나 다름없다지만 키키도 챙겨 줘야 하고….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이 서서히 의식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안 된다 생각하면서 감기는 눈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다프네?"
라그나르는 조용한 저택의 분위기에 집안 곳곳에서 다프네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라그나르는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났다면 화났다고 말하는 아이니까.”
라그나르는 집무실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와 키키마저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숲속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키키가 숲속에서 뛰어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키키, 이리와.”
키키가 오래간만에 보는 라그나르를 반기며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것이 보여 들어 올리니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래, 내가 요새 집에 없기는 했지.”
슬퍼하던 아이들을 보니 자신과다프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맡았던 일인데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다프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상단주가 된 후로 일에 치여 사는 모습에 걱정만 했었는데 직접 일을 해 보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라그나르는 키키를 한참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곧 기분이 좋아진 키키가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키키는 천재구나.”
어느덧 도착한 곳에는 다프네가 나무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피곤하면 일찍 자지."
자신을 기다릴 겸 일을 하다가 잠시 산책 나온 것을 알기에 라그나르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사소한 다정함이 자신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히 채워 준다는 것을 다프네는 모를 것이다.
라그나르는 웃으며 키키에게 더 뛰어놀고 오라며 보내 주었고, 다 프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으음...”
라그나르가 앉기 무섭게 다프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라그나르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받쳐 들었고, 어정쩡하게 멈춰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제 무릎 위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올렸다.
다프네는 몸이 크게 흔들렸음에도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피곤했던 거야.”
라그나르는 잠들어 있는 다프네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예쁘다.”
손가락 사이로 감겨드는 부드러운 느낌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무 예뻐서 어떻게 하지.”
라그나르는 조심스럽게 다프네의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달콤한 눈빛으로 웃었다.
오스왈드에서도 그렇지만 돌아온지 얼마 안 된 클레멘스에서도 다 프네는 유명한 존재였다.
라그나르는 새로 고용된 직원 중 한 명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그때 오신 분이 정말 베네디토상단주세요? 소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정말 아름다우시던데요.'
그 외에도 던전에 관련된 일이라 든가, 이번 던전 사태로 인해 힘들어진 그 지역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은 일에 대한 칭찬도 끊이질 않았다.
다프네가 잠깐 방문한 것을 또 어떻게 봤는지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고, 자신도 놀랐다고 말하던 직원의 모습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라그나르는 다프네가 황홀하게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이 모르면 좋겠다는 생각에 중얼거렸다.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둘 수도 없고.”
장난보다는 진담에 가까운 말이었기에 라그나르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프네가 잠결에 살짝 움직이는 것에 바로 굳은 표정을 폈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야지.”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프네의 행복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원망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라그나르는 다프네의 애정을 독점하고 싶을지언정,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프네를 사랑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함께 행복해지자."
다프네와 함께 행복한 순간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라그나르가 하고 싶은 사랑이었다.
두 사람 사이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환한 달빛과 따스한 봄바람, 그리고 피곤을 잊어버린 채 곤히 잠든 다프네.
라그나르의 추억에 새로운 행복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 * *
"으음….”
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잠에 빠져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더 자. 괜찮아.”
잠에서 깰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지 누군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다독여 주었다.
다시 무의식 아래로 가라앉으려는 찰나,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몽롱한 의식을 애써 깨우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가 점점 맑아지면서 선명한 달빛 아래 수려한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의 어둠을 머금은 듯 까만 머리카락 아래 달빛을 담아 놓은 영롱한 보라색 눈이 보였다.
무엇을 빤히 바라보고 있나 궁금해 그쪽으로 눈을 돌리니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철창하나가 보였다.
'라그나르가 있었던 곳.'
어린 시절 잠깐의 시간이라지만 라그나르가 지냈던 곳이었다.
저렇게 형편없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라그나르는 저곳에 갇혀 있던 순간을 행복한 시간으로 여겼다.
내가 원작을 믿고 불길한 미래에 얽매인 채 불안해하던 그때.
라그나르는 나의 두려움을 처음으로 알아주었고, 그런 나를 탓하지도 않고 보듬어 주었다.
'어쩌면….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나는 라그나르를 놓지 못할 것이 이미 정해졌을 수도 있겠네..'
아마 각인된 것은 라그나르가 아니라 나였던 게 아닐까?
아직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라그나르가 아닌 다른 이와 사랑을 논하며 속에 감추어 둔 마음을 완전히 꺼내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다시 라그나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내가 잠든 줄 아는지 추억에 잠긴 눈으로 철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라그나르의 눈은 아름다운 제비꽃의 색과 같이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어둡게 빛나는 자수정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아도 참 아름답고, 시선을 뗄 수 없는 색이었다.
그리고 저 눈이 오롯이 내게로 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라그나르를 불렀다.
“라그나르.”
달빛을 담아 두었던 보라색 눈이 내게로 향했다.
“언제 깼어?”
라그나르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으나 그것에 답하지 않았다.
라그나르의 눈 안에 내가 맺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내 입가에 만족스러움이 가득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 입 맞춰 주면 안 돼?"
“.…뭐, 뭐?"
라그나르의 당황한 목소리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으니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채화 물감이 번지듯 빠르게 붉어지는 얼굴이 참으로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네가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
"아니, 사실은 네가 없는 나는 상상이 가질 않아. 네가 없으면 안될 것 같아. 내게는 네가 필요해."
"다프네.”
“이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이지 않을까?”
낭만 없는 내 고백에도 라그나르는 환하게 웃었다.
꽃이 만개하듯 환하게 피어난 얼굴은 참으로도 아름다웠다.
그 웃음에 지금껏 거칠게 흔들렸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빈 가슴 속에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결론을 내고 나니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고민했던 시간이 너무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라그나르에게로 손을 뻗었다.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뺨을 매만지며 나는 물었다.
“우리 연애할래?”
“응.”
라그나르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나는 라그나르의 뺨을 감싸며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진심이 닿은 후 하게 된 입맞춤은 정말이지 너무나 달콤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행복한 추억이 새로이 새겨졌다.
* * *
엄마가 귀국하였다.
악셀리우스와 함께 돌아온 엄마는 우리를 만나자마자 이리저리 살펴보며 우리가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안 다쳤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악셀리우스가 나와 라그나르를 보며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악셀리우스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아저씨 못지않게 우리의 던전경력도 만만치 않답니다?"
장난스럽게 덧붙이 말에 악셀리 우스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오스왈드 지점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직원 중에 꽤 뛰어난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에 전담하고 왔지."
“오스왈드 사람이에요?"
“그래. 이왕이면 자국 사람이 운영하는 게 훨씬 좋을 테니까.”
진작에 은퇴할 생각이었다며 덧붙이는 말에는 퍽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면 엄마는 당분간 귀국할 생각이 없었겠지.
나는 엄마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곧 재판이 시작될 거예요. 어서, 가도록 해요.”
"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엄마는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일에 욕심이 많은 엄마가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귀국한 단 하나의 이유.
드디어 엄마의 숙원을 풀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금껏 잃어버릴까 봐 항상 들고 다녔었다며 내가 어린 시절에 가져온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게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주겠지?”
“그럼요.”
나는 받은 서류를 새로운 증거로 제출하며 엄마와 함께 재판장으로 들어갔다.
죄인들이 호송되어 나오는 모습에 주변에서 야유가 끊이질 않았고, 우리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신매매, 아동 학대, 노예 거래, 금품 청탁 등 여러 가지 죄목이 읊어지니 보육원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 또한 보였다.
결정적인 증거로 서류가 제출되자 보육원장의 눈이 터질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나는 보육원을 방문했을 때처럼 검은 베일을 쓰고 있었기에 그가 내 얼굴을 알아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죄인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고, 그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재판장은 엄숙한 목소리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 순간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아직도 도장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시하브의 청탁을 받은 이들 중 생각보다 눈에 띄는 고위 귀족은 없었다.
그러니 몰래 보관하고 있던 도장의 주인을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것이 자꾸 마음에 쓰였다.
그때 엄마의 손이 보였다.
긴장감에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보고는 엄마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합당한 벌이 내려질 거예요.”
엄마가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닌 그가 받아야 할 정당한 죗값을 받게 하는 것.
곧 재판장의 입이 열리며 죄인 시하브 프리다에게 선고된 형벌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