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그러니 어서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보석금을 내든! 황실에 청원을 넣든!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준다면 이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갈 테니까!”
"해.”
"뭐?"
“하라고.”
시하브의 뻔뻔한 말을 계속해서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 일부러 몸을 숙여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였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서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악녀의 딸이라고 가서 말하라고.”
"내, 내가 못할 줄 아나 보지!”
시하브는 내가 겁먹지 않자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고 있나 모르겠네.”
“뭐를!”
나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짓고는 그가 새겨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발음해 말했다.
"프레이르가 누명을 쓰고서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시하브는 처음 듣는 소리였는지 나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네가 현실도피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프레이르는 피를 무서워해."
내 말에 시하브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더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피를 보면 무서워서 경기를 일으키는 여자가 피로 저주를 내려?"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같잖은 표정을 짓고는 굽힌 무릎을 펴 똑바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밝혀도 상관없어. 어차피 소문이 퍼져도 날 보호해 줄 사람들은 많거든.”
엄마도 오빠들도, 시몬도, 라그나 르도, 심지어 라몬트까지 모두 제 일인 양 나서줄 것이 뻔했다.
“그런데 넌 아니지 않나?"
마지막 남은 수단을 터트리고 나면 그 최후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내 비웃음에 시하브가 당당하게 들어 올렸던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내 어린 날 가장 무서웠던 악당의 비참한 말로였다.
* * *
감옥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가 보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두 사람이 오래 기다렸겠다 싶어 발걸음을 빨리 옮겨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 악셀리우스가 홀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엄마는요?"
내 물음에 악셀리우스는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낯선 사내와 대화를 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평범한 고동색 머리에 진한 푸른 색 눈이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양의 사내였다.
눈매가 날카롭고 입술이 얇아 조금 야비해 보이기도 해 딱히 신뢰가 가는 얼굴은 아니었다.
“누구예요?”
“클로에의 옛 친구.”
“보육원 동기?"
“동기이자 헤로니스 공작의 부관이지.”
악셀리우스의 설명에 두 눈을 깜빡였다.
“모제스 오벤. 공작의 충실한 개처럼 일하는 자야.”
“오벤 백작?”
내 중얼거림에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백작이 어떻게 보육원출신이라는 거지?'
내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났는지 악셀리우스가 설명을 해 주었다.
“사생아였단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인 선대 백작이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 보육원으로 갔다 들었어.”
"그렇군요.”
“그러다 후계자가 죽어서 선대 백작이 어쩔 수 없이 보육원에서 데리고 왔다더구나.”
인생역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덧붙이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상이 좋아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엄마의 동기라니까.'
엄마가 허튼 곳에 시간을 낭비할 사람도 아니기에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엄마가 잘 웃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서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재판 이야기를 하려나.'
지루함을 감추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쩐지 악셀리우스의 눈치가 보였다.
'남녀가 단둘이 저렇게 즐겁게 대화를 하는데…. 이게 연륜의 힘인가.'
질투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다가 라그나르에게 속삭였다.
“역시 어른은 다른가 봐."
“으음.”
하지만 라그나르는 내 말에 동의하기보다는 조용히 아래를 가리켰다.
악셀리우스의 주먹이 꽉 쥐어진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며 속으로는 조마조마하게 쳐다보고 있는 거였다니.
“난 아마 영원히 어른이 못 될 것 같아. 네 옆에 다가올 사람들을 질투하지 않을 자신이 없거든.”
라그나르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나만 봐."
“생각해 볼게.”
우리가 서로 속닥거리며 킥킥거리는 사이 어느새 살라메시까지 합류하여 대화를 이어갔다.
점점 초조해지는 악셀리우스의 기색이 느껴졌다.
"아저씨.”
내 부름에 악셀리우스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왜 그러니, 다프네?”
“결혼은 언제 하실 생각이세요?"
내 물음에 악셀리우스가 잘 못들었다는 듯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갑자기 결혼은 왜?"
"안 하실 생각이셨어요? 하고 싶은 줄 알았는데.”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악셀리우스의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먼저 하셔야 우리도 하죠.”
"우리? 우리라니! 다프네!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악셀리우스의 큰 목소리에 엄마와 살라메시 그리고 오벤 백작까지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그, 그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그냥?”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끄러운 듯 살포시 웃었다.
"가 "
“저도 이제 아빠가 갖고 싶어서요.”
그리고 내 말에 악셀리우스가 마치 돌처럼 굳어 버렸다.
“역시 이렇게 나이 먹어놓고 너무 어리광 피웠죠? 두 분 의사가 중요한 게 당연한데.”
나는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악셀리우스가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 아니. 노력하마.”
"정말요?”
“어디까지나 클로에가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나도 네 아빠가 되고 싶으니까.”
물론 나머지 두 사람의 아빠가 되는 것도 좋다며 덧붙이는 악셀리우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다행이라며 기뻐하려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엄마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표정이 흉흉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엄마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리고 나는 최대한 방긋 웃으며 모르는 척 말을 아꼈다.
라그나르와 연애를 하기로 시작했다지만 아무래도 소식이 밝혀지면 이래저래 놀랄 사람들이 많았다.
피곤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우리는 잠시 비밀연애를 하기로 했으니 당연히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휴우. 하긴. 네가 연애를 한다는데 라그나르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엄마의 안도 섞인 한숨에 나는 라그나르를 힐긋 바라보았다.
라그나르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우리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방이 라그나르인걸요.'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엄마, 미안해요. 나중에 알려줄 게요'
"이 아이가 네 딸인 건가?”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벤 백작이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다프네. 내 어릴 적 친구란다.”
“엄마는 언제 오벤 백작님과 친구가 되셨어요?"
정말 몰랐다며 꺄르르 웃어 보이고는 그를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합니다."
"모제스 오벤이라고 하네. 반갑네."
모제스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모제스의 손을 잡으니 그가 거침없이 위아래로 흔들며 즐거움을 표현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군. 빌어먹을 시하브 놈이 벌을 받게 되고, 오래간만의 친구들도 만나게 되고.”
시하브는 엄마와 살바토르를 번갈아 본 뒤 이번에는 내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그리고 친구의 훌륭한 딸도 만나게 된다니. 듣자 하니 이른 나이에 상단을 물려받았다지?"
“내 딸이 워낙 훌륭해서 성인이 되자마자 물려줬지.”
엄마의 자부심 넘치는 말에 모제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던전 사태도 다프네 양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는 데 일조했다 들었어.”
"아닙니다. 다 전하의 도움이 커서 그런 것을요.”
내 말에 모제스가 잠시 멈칫하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전하께서 없으셨다면 이렇게….”
모제스는 황실 쪽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에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비웃음에 가깝게 느껴졌다.
'시몬을 무시하는 건가?'
나와 라그나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히 가라앉았다.
악셀리우스가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내자 모제스가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번에 또 보자고."
모제스는 엄마와 살바토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악셀리우스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라그나르가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수 없는데.”
다행이라 할지 라그나르의 말은 나밖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시몬에게는 말해 주어야 할 텐데.’
다른 사람은 아니더라도 시몬에게는 우리의 관계를 먼저 밝힐 생각이었다.
'시간이 영 안 나네.'
황제 폐하를 면담한 뒤로 시몬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늘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 되겠지.'
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엄마를 바라보았다.
“일이 잘 해결돼서 축하드려요."
드디어 엄마의 숙원이 풀려가고 있으니 시원할 표정일 줄 알았는데….
엄마의 표정은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고맙구나. 네 덕분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처벌할 수 없었겠지.”
엄마는 내 말에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말이지 이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게 다 엄마가 포기하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
내 말에 엄마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피어났다.
앓던 이가 빠졌으니 속이 시원해야 할 텐데 엄마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지금껏 미뤄 왔던 말을 해야 할 때라는 걸 떠올렸다.
“저 엄마와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세 사람을 쳐다보며 말하니 그들끼리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먼저 마차로 돌아가 있을까?"
"네. 부탁드릴게요."
세 사람은 나와 엄마만 이곳에 남기고 먼저 마차 쪽으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엄마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 하는 걸까?”
엄마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입가에만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속시원하지 않으세요?”
“…글쎄. 분명히 통쾌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도 제 감정을 잘 모르겠다며 웃어 버렸다.
“이 엄마를 위로해 주고 싶었나 본데, 걱정하지 말렴."
엄마는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가가 붉어진 것이 보였다.
지금껏 단단하게 잡아 온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졌으니 낯선 감정을 추스르기 어려워 보였다.
머리가 흐트러지면 빗어내려 정리하면 된다지만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상단주 자리를 물려받고 나서부터 엄마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자 입을 열었다.
“마지막 소원을 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