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소원?”
엄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되묻는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이니 말해 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부끄러워 귓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서 말하고 돌아가자는 생각에 엄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내 소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엄마는 오랜 시간 상단주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위치에서 살아왔다.
그와 함께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의 수모를 잊지 않고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다.
그리고 그 목표에 다다른 순간 엄마는 마치 길을 잃은 사람처럼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자신의 행복을 새로운 목표로 삼으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런 소원을 빌 것이라고 생각 못했는지 엄마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해 보여 나는 환히 웃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고, 그냥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꼭 쥐었다.
놓고 싶지 않다는 듯 꼭 붙잡고서, 부끄러움을 이겨내고서, 지금껏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아낌없이 전했다.
“그러니까 상단주로서, 엄마로서 말고….”
“클로에로서 행복해질 때도 되었잖아요.”
엄마는 허를 찔린 듯 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 말하고 나니 역시나 민망함이 몰려와 뺨을 긁적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으나 엄마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민망함을 물리치며 다시 말했다.
“제 마지막 욕심이에요. 엄마가 클로에로서 행복해지는 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마는 한껏 찌푸려져 있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엄마는 감정이 복받친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눈물을 한 방울흘려내었다.
"너희가 있는데 내가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잖니.”
엄마는 나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따스한 품에 안기니 긴장감에 요동치던 가슴이 진정되며 편안함이 밀려왔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입을 열었다.
“다프네. 사랑스러운 내 딸. 하늘이 내게 준 소중한 선물.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 * *
조용한 숲속의 저택.
모두가 잠든 시각 클로에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행복이라.'
지금껏 인생의 반 이상을 한 상단의 상단주로서 살아왔고, 아이들의 엄마로서 살아왔다.
지금껏 목표하며 달려온 일이 끝났다 생각하니 막상 후련함보다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클로에는 턱을 괴고는 앞에 있는잔.
와인 잔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뒤숭숭한 제 마음과도 같이 보여 피식 웃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클로에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러다 흘려."
악셀리우스가 와인 잔을 테이블위에 올려 두고는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오랜 시간 보았는데도 변치 않는 모습에 클로에는 푸스스 웃었다.
가끔 악셀리우스와 함께 있으면 익숙해지지 않는 달콤함에 헤어나기 어려운 감정에 빠져들고는 했다.
"어쩐 일이야?"
“그냥. 걱정돼서.”
“뭐가 걱정돼.”
클로에는 별 걱정 아니라며 악셀리우스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악셀리우스는 뒤로 물러나더니 클로에의 옆자리에 앉았다.
“모든 게 끝났는데도 표정이 좋지 않았잖아.”
“너도 그렇게 보였어?"
"누가 또 그렇다 했어?”
클로에는 조용히 와인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향긋한 와인 향에 기분이 좋아질 법한데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다프네가 그랬어.”
“다프네가?”
악셀리우스의 물음에 클로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대.”
“으음.”
“상단주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나 클로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데.
그게 자기 소원이라 해서 알겠다.
고 답했는데 역시 잘 모르겠어."
클로에는 빈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평생을 상단주로서 살아왔고, 또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왔잖아.”
“그렇지.”
“클로에로 살아간다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는지 클로에는 바로 말을 이었다.
“보육원 일도 끝내고 나니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
클로에가 말을 마치자 악셀리우스가 클로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음 한구석이 빈 것처럼 공허한 기분이야.”
악셀리우스의 손이 클로에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머리끝에 입술을 맞추었다.
야릇하면서도 달콤한 악셀리우스의 눈빛에 클로에가 시선을 떼지 못하니 그가 불쑥 클로에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깍지를 끼고서는 놓지 않겠다는 듯 힘 주어 쥐고는 말했다.
“그럼 나랑 사랑을 해 보는 건 어때?”
"뭐?"
악셀리우스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우리는 이미 나이도 많이 먹었고, 주변에서 주책이라고 욕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악셀리우스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클로에, 나의 사랑. 너와 결혼하고 싶어.”
"......."
클로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악셀리우스가 황급히 덧붙였다.
“함께 있다 보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네가 싫다면 거절해도 좋아.”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자신 있다.
고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클로에 가 눈을 깜빡였다.
'혼자보단 둘이서 행복해지는 게 더 빠를지도.’
클로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악셀리우스의 마음도 결혼도 모두 부담스럽다는 말에 그 후로 친구로서 뒤에서 우직하게 서 있어줬던 남자.
자신이 힘들 때면 늘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옆에 있어 주었던 남자.
어느 순간부터 굳게 닫힌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도록 도와준 남자.
“그럴까?”
"뭐?"
클로에의 말에 악셀리우스가 놀라 새된 소리를 뱉었다.
믿기지 않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해 클로에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남자라면, 아니 악셀리우스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악셀이 내 옆에 영원히 있다면 행복할지도.’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올곧은 이 마음을 부정하는 짓은 행복을 걷어차는 일일 것 같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아름답거든."
"내가 아름다워?"
악셀리우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중증인 듯했다.
잊고 살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지금껏 참았던 만큼 아낌없이 보여 주겠다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응. 세상에서 제일."
클로에는 소중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옅은 핑크빛으로 물든 볼이 참으로 사랑스러워 악셀리우스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이 맞물리는 질척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은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듯 껴안았다.
한창 농밀한 키스를 주고받던 중 악셀리우스가 힘겹게 입술을 떼고서는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나랑 결혼해 줄 거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마치 이 순간이 꿈이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 담긴 모습에 클로에는 부끄러움도 잊고서 아쉽게 떨어진 그의 입술을 탐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
허억, 허억.
마리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얼굴빛이 나쁜 것이 누가 보아도 악몽을 꾼 모습이었다.
마리아는 곁에 있는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울컥하며 수건을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얼굴에 두 손을 묻고서는 나올 것 같은 눈물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던전에 다녀온 뒤로 지독한 악몽이 자꾸만 자신을 따라다녔다.
꿈은 참으로 지독했다.
첫눈에 반했던 라그나르가 나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좋아하는 마음을 확실히 접었음에도 꿈에 나온 자신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마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행복한 것도 잠시, 다프네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너는 내 것을 모두 뺏어가는구나.”
다프네는 마리아를 경멸하듯 바라보면서 이내 피눈물을 흘리며 흐려져간다.
마리아는 아니라며 그녀를 붙잡고 싶었으나 다프네는 그렇게 그녀의 꿈속에서 지워지듯 결국엔 말끔히 사라지고 만다.
“정말이지 최악이야.”
어차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 생각하며 마음속에서 잊은 지도 오래인데.
“끔찍해."
다프네가 마리아를 바라보며 슬퍼하는 것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저 악몽임에도 불구하고 끈질 기게 괴롭히는 것이 정말이지 던전은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아는 해가 져 깜깜해진 하늘을 보고는 잠시 기분전환 겸 산책이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고 복도를 걷던 중 마리아는 오벤 백작과 마주쳤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영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잘 지냈죠. 오벤 경도 잘지내셨나요?”
마리아의 물음에 모제스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아빠는요?”
“공작님께서는 아직 황실에 계십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고 부인께 직접 전해 달라 하셔서요.”
“아아.”
마리아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모제스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감싼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뒤에 계신 분은?"
"아. 부인이 요새 잠을 설친다고 전해 들어 연금술사 한 분을 소개해 드릴까 해서 데려왔습니다.”
모제스는 물론 공작과 공작 부인의 허락 또한 받았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리아의 시선이 향하자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악몽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기에 마리아의 입에서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리 부모님의 허락이 있다.
한들 얼굴도 드러내지 않는 이를 들일 수 없어요.”
마리아의 단호한 말에 모제스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하하. 그렇지요. 이봐, 어서 영애께 얼굴을 보여 드리도록 하게.”
그의 말에 사내가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반갑습니다, 아가씨."
사내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깨 언저리에 흔들리는 회색 머리카락과 짙은 검은색 눈, 그리고 창백한 피부와 수려한 외모.
분명히 호감 가기 충분할 텐데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쩐지 암울한 기운이 가득 맴도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마리아는 애써 어색히 웃어 보였다.
마리아가 경계심을 거두지 못하자 모제스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수면에 좋은 향을 추천해 드릴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리아는 마지못해 옆으로 비켜주며 말했다.
"그럼 어머니를 부탁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모제스와 사내는 늦었다며 걸음을 서둘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못 들었네.'
마리아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사람 라그나르 씨를 닮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