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유니스는 근래 자신을 뒤덮은 지독한 불면증에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아무리 진정하려 노력해도 마음속깊이 가득 차오른 불안감에 그녀는 쉽사리 평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도 보여 줘서는 안 되는 그 책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알고 싶었다.
'하필 내 이름을 적어 두어서….'
애초에 자신의 방에서 가지고 나갈 일이 없을 테니 걱정 없이 적어 둔 것인데 잃어버리고 나니 이제야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자각이 되었다.
'괜찮아. 솔직히 일기와 다름이 없잖아.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유니스는 죄 없는 손톱을 깨물면서 위태로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부인, 모제스입니다. 요새 부인께서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소문을 듣고 공작님의 명으로 유명한 연금술사를 데려왔습니다.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유니스가 잘못해서 살을 짓씹어 버렸다.
손끝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이내 피가 비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와요.”
평소와 다르게 까칠한 목소리가 나왔으나 모제스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유니스가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콘란드가 보냈다고요?"
유니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요 며칠 자신의 행보를 돌이 켜 보았다.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 콘란드라면 걱정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수소문했을 것이 눈앞에 선했다.
모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했으나 사내가 그를 막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유니스는 순식간에 불안감이 잠재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남편이 보내 준 선물을 받으려 했다.
연금술사가 꺼낸 책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유니스는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거 네 것이지?"
“…그, 그게 왜!”
건방지게 말을 함부로 놓았다고 화를 내기에는 꺼낸 물건이 심상치가 않았다.
유니스는 순간 놀란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였다.
그러나 연금술사는 유니스가 모른 척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실은 길에서 주웠는데 주인을 찾아 주려고 보니까 앞에 네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
"......."
사내는 책을 가볍게 휘리릭 넘겨 보이며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는 가득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내 책이란 것을 알고서 찾아온 모양인데. 원하는 것을 말하면 들어줄 테니 조용히 책을 두고 나가게.”
유니스는 애써 여유로운 척 말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타이르는 듯한 말투에 사내는 입가에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라는 점이다."
사내는 잠깐의 고민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는 본론을 꺼내었다.
“이 책에 적힌 내용을 아주 꼼꼼하게 읽어 봤는데 평범한 로맨스소설이더라고.”
“그래. 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숨기고 있었던 취미일 뿐이니 어서 내놓게.”
유니스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서렸다.
“소설이라고 하기엔 실제로 일어난 일이던데. 심지어 초반의 이야기는 부인께서 주인공이셨고 말이지.”
사내의 말에 유니스의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뒤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는 공녀가 주인공이었지? 그런데 내가 아는 이야기랑 조금 아니, 많이 다르던데.”
유니스가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결국 뒤에 이어진 사내의 말에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내놔!”
물론 사내는 유니스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빠르게 몸을 움직여 피했다.
갑작스럽게 목표가 사라지자 중심을 잡지 못한 유니스가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뭐가 다르단 거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다 거기에 적힌대로 흘러가고 있단 말이야!"
사내의 말이 유니스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상대가 더 묻지도 않았지만, 유니스는 지금껏 쌓아 놓았던 마음 속의 혼란을 털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입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 정해진 대로 흘러갈 뿐이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 책에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고? 그럼 내 동생이 네 딸과 사랑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니던데.”
유니스의 말에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으나 그 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유니스는 사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저 괴롭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사내는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유니스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모제스가 황급히 사내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베르돌트, 이분은 그대가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분입니다.”
“..… 베르돌트?"
의아하게 되묻는 유니스의 목소리에 베르돌트와 모제스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눈물이 순식간에 말라 있었다.
"어째서 베르돌트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호오.”
유니스의 혼잣말에 베르돌트가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녀에게로 뻗던 팔을 내렸다.
"어째서 라그나르의 손에 죽지 않은 거지? 도대체 왜… 정말로 이야기가 변하고 있단 거야? 어째서?"
유니스는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머리를 잡으며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베르돌트는 울컥 올라온 짜증을 가라앉히며 유니스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으나 표정은 서로 대비되고 있었다.
유니스는 눈물을 참으며 즐겁게 미소 짓는 베르돌트를 바라보았다.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고? 별것 아닌 네가 공작 부인이 된 것처럼?"
“........”
베르돌트는 미련 없다는 듯 유니 스의 앞에 책을 떨어트렸다.
“있지, 부인. 이 책 어디서 샀어?
".......”
"이상하지. 이 책 내용은 모순투성이고 그저 삼류 로맨스 소설일 뿐인데. 무시하기에는 너무 쓸데없는 부분에서 자세하고."
유니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손으로 제 앞에 떨어진 책을 품에 꼭 안았다.
마치 부적이라도 되는 듯 두려운 눈빛을 하면서도 절대로 놓지 않을 기색이었다.
"내가 그 책을 꼼꼼히 읽어 봤는데 말이야. 거기서 두 번째 남자 주인공이 자신을 학대한 형을 죽이는 내용이 나오더라고.”
베르돌트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형이 나인 것 같거든? 그러니 그 책대로 흘러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려 줘야 할 거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살기에 유니스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이 말을 잘못 놀리면 앞에 있는 사내는 불쾌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저를 죽일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해 왔다.
“아는 걸 모두 이야기한다면 네 앞날에 해가 되지 않도록 협력할 생각도 있고.”
“부인.”
모제스까지 재촉하듯 말을 얹자 유니스는 굳게 다물린 입을 열었다.
“못 해.”
"뭐?"
“절대 얘기 못 해.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어!"
필사적으로 소리치는 유니스의 눈에 가득 독기가 서려 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다정한 공작 부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표독스러운 눈빛에 모제스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베르돌트는 그런 유니스의 눈을 한참이고 마주 보더니 이내 굳은 표정을 풀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오늘은 주인에게 책을 돌려주려 모제스한테 부탁한 거고."
베르돌트가 친한 척 모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는 밝게 웃자 모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사람은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던 거지?”
모제스가 입을 열려고 하자 베르돌트가 그의 어깨를 부러질 듯 꽉 잡고서는 대신 말했다.
“그쪽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 우리도 입을 다물어야지."
베르돌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려다가 잊은 것이 있다며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전대 공작 부인이 비참하게 쫓겨나 죽었다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이번 대 공작 부인도 그렇게 쫓겨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지, 안 그래?”
그 말에 유니스의 고개가 고장이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더니 간신히 베르돌트에게 닿았다.
"이러다 공작 부인 자리에 저주가 걸렸단 소문이 날지도 모르겠군.”
“잠시만,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니스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베르돌트에게로 다가갔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돼.'
처음에는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나 분명 자신이 아는 베르돌트라면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다른 꿍꿍이가 가득할 터였다.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공포감이 서렸다.
유니스가 베르돌트를 잡으려 했으나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가 방을 빠져나가는 것이 빨랐다.
“후회하지 마, 이건 네 선택이니까.”
문이 닫히며 들려오는 그 소리가 즐겁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리라.
* * *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각, 시몬은 집무실에서 홀로 서류를 보다가 머리를 짚었다.
“노예가 불법인 제국에서 이리 인신매매가 자주 일어났었다니."
황실 몰래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이 벌써 수십 년이 넘어가고 있었고, 실종자 수 또한 상당하였다.
'빈민가에서 실종된 이들도 이 범죄에 얽혔을지도 모르겠어.'
시몬은 답답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다프네의 어머니가 이 범죄에 대한 누명을 쓴 걸지도.'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보아하니 전대 보육원장의 뒷배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공작이겠지.”
자신의 불륜을 당당하게 사랑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이용한 것이 분명했다.
시몬은 기지개를 쭉 켜면서 의자에 편히 몸을 기대어 앉았다.
“그 도장이 뭔지 밝혀내기만 한다면 수월할 텐데.”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시몬은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짜증 난 욕설을 내뱉었다.
“요새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야.”
휴식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니 친구들도 만나기 힘들었다.
일만 하다 쌓인 스트레스를 어서 풀어 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공작의 멱살을 잡고 자백하라고 소리 지를지도.'
시몬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며 피식 웃고는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앞에 있는 일을 모두 처리해야 원하는 휴식도 갖고 얼굴 보기 힘든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라그나르에게 부탁해서 여기에도 마법진을 좀 그려 달라고 할까.'
원할 때 쉽게 오고 갈 수 있게 좋지 않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시몬은 펜을 들려 했다.
"오, 이건 일을 하지 말라는 신의 뜻일지도.”
미끄러진 손길에 펜이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도 없는 집무실이니 괜찮겠지 싶어 시몬이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책상 아래로 굴러간 펜을 줍기 위해 고개를 조금 내렸을 때 시몬은 무언가를 잘못 본 사람처럼 눈을 깜빡였다.
'책상 아래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마치 바닥에 각인과 비슷한 문양이 있었다.
문양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흐리게 그려져 있었다.
시몬은 그것을 더욱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시몬이 바로 허리를 세워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무실에 자신 말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몬은 창백하게 질린 낯을 숨기려 애썼다.
“그럴 리가 없잖아.”
시몬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평소의 선하던 인상이 무서워 보일 정도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못했다.
시몬의 마음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이 머릿속에서 자라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 시몬은 그 두려움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