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주변이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녹빛으로 물든 여름의 끝자락.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을 축하해 줄 생각인지 오늘따라 하늘은 맑고 깨끗했다.
따사롭게 비추는 햇살과 곧 가을 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듯 살랑살랑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뺨을 간지럽혔다.
날씨만큼 오늘의 내 기분도 최상이었다.
무엇보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되었으니 설레는 마음이 쉽사리 주체되지 않았다.
“다프네!”
누군가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레녹스, 리카르다. 둘 다 너무 오래간만이야.”
오늘을 위해 두 사람이 클레멘스로 돌아왔다.
외국에서 오는 것이다 보니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으나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기쁜 날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있으니 리카르다가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 너무 예쁜 것 아냐? 하객들이 다 다프네에게 반하면 어쩌지?”
“안 그래.”
단호하게 말했으나 진심인 듯 그의 얼굴에서 우려하는 표정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것보다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지?"
“물론이지. 잘 챙겨 먹고 있어.
오빠들이나 잘해.”
레녹스의 말에 피식 웃고는 고개를 슬쩍 움직여 그의 뒤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안녕, 카롤리나."
"안녕, 다프네.”
카롤리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장소가 어색한지 레녹스의 뒤에 바짝 붙어 있다가 내 부름에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나도 초대해 줘서 고마워. 클레멘스에 한 번쯤 와 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억이 될 것 같네.”
카롤리나는 주변에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 뒤로 보이는 신전을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거야?"
“아무래도 아저씨가 성기사다 보니까.”
동생의 결혼 소식에 기쁨을 숨기지 못한 황제가 황실의 그레이트홀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악셀리우스는 형의 호의를 거절하였다.
자신의 직위를 고려하면 신의 축하를 받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는 이유였다.
나중에 덧붙인 말로는 그편이 엄마가 덜 부담스러울 것이란 숨겨진 이유도 있었다.
“성스럽고 좋네. 신의 축하를 받는 결혼식이라니. 낭만적이야.”
카롤리나의 뒤로 속속히 아는 얼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엄마도 아저씨도 한창 준비 중이니 하객들을 맞이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찾아오는 하객들에게 인사를 해주며 간단히 대화하고 있자니 멀리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나무 아래 라그나르가 홀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 그늘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표정이 어두운 것인지 모르겠으나 당장 가서 살펴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다시 보니 내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지금까지 꽤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혹시 불안한 걸까.'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라그나 르를 향해 웃으며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불안하지 않도록, 이런 상황에서, 도 라그나르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니 언뜻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 것도 같았다.
'귀엽네.’
다시 주변에 시선을 돌리는데 바로 카롤리나와 눈이 마주쳤다.
“흐응.”
카롤리나는 흥미로운 것을 봤다는 듯 눈을 즐겁게 빛내며 라그나 르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여전히 사이가 좋네.”
"당연하지.”
“여전히 제일 친한 친구고?”
"당연한 소리를.”
제일 친한 친구고, 연인이다.
뒷말은 생략했을 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었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주변의 소란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찔리는 것이 있어서 그런지 귀에 잘 들어왔다.
나는 카롤리나의 말을 못 들은 척 다시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근황을 나누었다.
엄마와 아저씨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 드디어 찾아왔다.
* * *
“어머, 귀여워라."
누군가의 탄성 섞인 목소리에 키키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빳빳이 올라갔다.
키키는 작은 바구니를 입에 물고서 앞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엄마와 악셀리우스가 함께 손을 잡고서 행복한 표정으로 키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키가 두 사람의 앞에 도착하니 악셀리우스가 바구니 안에 있는 반지를 꺼내었다.
키키에게 고맙다는 인사 또한 잊지 않았다.
키키는 자신의 임무를 마치자마자 우리 쪽으로 다가와 내 다리에 머리를 기대어 편히 앉았다.
“사랑해, 클로에.”
"나도, 사랑해. 악셀리우스."
주례가 없는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다시 맹세하며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주변에서 성기사들의 아낌없는 축하가 이어졌다.
몇몇 귀족들은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주인공들이 즐거워 보이니 무어라 입을 열지 못했다.
"드디어 두 사람이 결혼했네."
“그러게 말이야.”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대단하다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박수를 쳤다.
“그럼 지금?"
"그래, 지금."
리카르다가 레녹스를 향해 눈짓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레녹스가 하늘로 무언가를 던져올리니 곧 작은 소리를 내며 주변에 아름다운 꽃잎이 널리 퍼져 나갔다.
“결혼 축하드려요!"
리카르다의 손짓에 주변에 빛이 아름답게 부서지면서 두 사람을 더욱 반짝이게 비추어 주었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엄마도,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악셀리우스도 상상 못 했다는 듯 입가에 가득 지어진 즐거운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악셀리우스와 엄마가 우리 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가족들이 인사할 수 있도록 주변의 하객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 순간 나는 오늘 꼭 해주어야 하는 말을 꺼냈다.
“결혼 축하해요, 아빠. 엄마랑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
악셀리우스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결국 참고 참던 눈물을 터트렸다.
엄마가 아빠에게 다가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작게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곧 이어지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결국 성기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가볍게 환호하며 두 사람을 축복해 주었다.
신전에 가득 찬 빛은 마치 신이 두 사람의 인연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 성스럽고 또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결혼식이 완벽하게 끝이 난 것 같아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에 앉아 있던 라그나르가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내 손을 깍지 껴 잡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저런 날이 올까?"
라그나르가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소란스러운 주변 덕에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 않았다.
나 또한 라그나르에게로 고개를 숙여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갓 연애를 시작했는데 너무 앞서간다.”
“언젠간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는 결혼식을 하고 싶어."
라그나르의 보라색 눈이 기대감에 반짝였다.
간절한 바람이 섞인 소망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사실 나도.”
내 말에 라그나르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에 작게 웃다 시선이 느껴져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하하."
카롤리나가 우리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신같기는.’
계속 지켜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지.
괜히 민망해져 어색히 웃음을 흘리니 그녀가 재밌다는 듯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나중에 할 이야기가 생겨 버렸다.
그래도 친구에게 연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즐거워져 나도 그녀를 따라 웃고 말았다.
"아. 시몬은 왔어?”
“요새 많이 바쁜가 봐. 주인공인 두 사람만 보고 돌아갔다 하더라고.”
라그나르의 대답이 끝나자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보육원 일도 어느 정도 끝났으나 던전의 여파로 인해 시몬이 신경써야 할 일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매우 바쁜지 요새 얼굴도 보기 힘들어 걱정이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사이도 말해 주고 싶었는데.’
많은 이들에게 비밀로 시작한 연애지만 시몬에게는 우리가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가장 먼저.
시몬에게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 두 사람의 동일한 의견이었다.
'그래도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주변을 따라 박수를 쳤다.
이제 곧 하객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축하의 인사말들을 전할 것이다.
요새 곧 열릴 가을의 축제 준비와 두 사람의 결혼식을 돕느라 바빴는데 뿌듯함이 밀려왔다.
“누가 보면 라그나르가 결혼하는 줄 알겠어.”
레녹스의 말에 리카르다가 동감한다는 듯 작게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그나르가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을 감동한 눈으로 시선도 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래간만의 형제의 재회를 할까 했는데 갑자기 우리에게 한 무리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솔라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라이언 영애.”
그녀의 뒤로 젊은 영애와 영식들이 섞여 우리에게 무리 지어 다가온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체이너드 가문의 영식과 영애가 생겼으니 탐날 법도 하지.’
자그마치 대공의 가문이니 떨어질 콩고물이라도 있을까 가까워지려는 것이 뻔했다.
"심지어 한 명은 연금탑주, 다른 한 명은 마탑주, 또 다른 사람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니.”
그들의 생각에 친해져서 나쁠 것 없는 줄일 테다.
“인기도 많지.”
뒤에서 카롤리나가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는데 그 무리 사이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오래간만이에요, 선배."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마리아와 카스토르였다.
두 사람 또한 결혼식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하객으로 찾아온 것인지 평소와 다르게 더욱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너무 축하드려요. 대공녀가 되셨으니 앞으로도 편히 선배라고 부를 수 있게 되어서 기뻐요."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자리를 좀 비켜 주면 좋겠는데.”
카스토르의 말에 주변에 모인 젊은 영식과 영애들이 난감한 듯 웃으며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빠르게 흩어졌다.
레녹스와 리카르다도 이때다 싶었는지 카롤리나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럴 때 도움이 되네.'
평소에는 귀찮기만 했었는데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리아를 보는데 그녀의 안색이 평소와 달랐다.
“마리아. 얼굴빛이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니?"
"네? 아. 요새 악몽 때문에 잠을 좀 설쳐서 그래요. 괜찮아요.”
“악몽….”
아무래도 던전에서의 그날 이후 지속적으로 악몽에 시달렸나 보다.
평소와 다르게 생기 없는 얼굴을 보니 좀 안쓰러워져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우으.”
고작 작은 손짓인데 무엇에 그리 감동하였는지 마리아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내 손을 꼭 끌어 잡았다.
“고마워요, 선배. 어쩐지 오늘 밤에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요.”
"누님. 실례입니다."
카스토르의 말에 마리아가 아쉽다는 듯 내 손을 놓았다.
“그 외에는 별일 없는 거지?"
그저 형식상의 물음이었는데 마리아는 진지하게 고민을 하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요새 저뿐만 아니라 엄마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그래도 곧 괜찮아지실 거예요."
“공작 부인께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걸까?"
하나도 걱정되지 않지만, 예의상물어보았다.
마리아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나만 들으라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엄마가 일기장을 잃어버리셨는데 소중하게 간직하셨나 봐요. 상심이 크신 모양이더라고요.”
“일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