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내 물음에 마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방에서 잃어버리신 거라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으니 속상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
"아시다시피 엄마가 다른 곳에서 오신 분인지라…. 아마 그때의 기억들이 담겨 있는 것을 잃어버리셔서 상심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마리아의 말에 내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일기장이라.’
고작 평범한 일기장 때문에 불면 증에 시달릴 리가 없을 텐데.
“누님.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너무 사적인 이야기다 싶었는지 카스토르가 나서서 마리아를 제지했다.
'어라?’
아직 늦여름의 기세가 남아 있다.
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닌데.
식은땀까지 흘리며 마리아를 말리는 카스토르의 모습은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혹시 카스토르는 일기장 내용을 알고 있는 건가?'
마리아와 대조되는 난처한 표정을 보니 분명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걸까.’
궁금해서 읽고 싶어졌지만 잃어버렸다고 하니 손에 들어올 리는 없겠지.
그렇다고 카스토르를 떠보기에는 위험할 것 같아 이 문제는 여기서 덮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 어머니가 많이 걱정되겠어.”
나는 이해한다는 듯 말하며 마리 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나는 네 어머니보다 네가 더 걱정되네. 어서 빨리 악몽이 달아나기를 바랄게."
내 말에 마리아가 다시금 감동받은 눈빛을 하더니 볼을 살짝 붉히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선배….”
“응.”
무언가 진중한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잠자코 기다리니 금방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아니.”
“아. 왜, 왜요?”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한 것 같지는 않아서.”
깔끔한 대답에 마리아가 눈에 띄게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가 서로 안아 줄 정도로 친하지 않단 것은 사실인데 너무 실망하는 것 아닌가?
'슬슬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서글퍼 보이는 마리아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카스토르가 옆에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마리아가 내 드레스 자락을 붙잡았다.
“그럼 더 친해지면 되잖아요.”
"어떻게?"
내 물음에 마리아는 희망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배를 저택에 초대하고 싶어요.”
수줍게 내뱉은 말에 나는 빙긋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언젠가 한번 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니까.’
“그래. 하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가을 축제가 끝난 뒤에 초대해 줄 수 있을까?”
“정말요? 정말 오실 거예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아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활짝 웃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해바라기 같은 맑은 웃음에 주변이 화사하게 물들어 갔다.
* * *
이만 돌아가자는 카스토르의 말에 마리아는 즐거운 얼굴로 동생의 뜻을 따랐다.
떠날 때까지 손을 붕붕 흔드는 해맑은 모습에 나도 작게 손을 흔들어줄까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무 정을 주지 말아야지.'
친엄마의 누명을 벗기고 나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는 아이니 정을 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답답해지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내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것이 보였다.
'결혼식장에서 신랑감 찾기라도 하는 건가.’
별생각 없이 지나치려고 하는데 여자들 사이로 우뚝 솟아오른 얼굴이 너무 익숙했다.
"라그나르?”
쟤가 왜 저기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 평범하게 다른 여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아픈가?'
나를 제외하고서는 다른 이들에게 말조차 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그러한 내 걱정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카롤리나에 의해서 깨졌다.
“내가 돌아다니다가 좀 들었는데 말이야. 라그나르 저 사람이 요새 사교계에서 유명하다고 하더라?"
“유명하다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예술재단을 설립하고, 황실에 막대한 기부금을 냈다던데.”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틀린 것 하나 없었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쳐다보자 카롤리나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던전 공략도 하면서 쌓은 업적이 있어서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던걸?
황태자 전하와 친하다는 말이 가장 유명하지만.”
시몬과 친한 것도 사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참다못한 카롤리나가 내게 짜증을 냈다.
"바보야. 돈 많고, 권력자와 친분이 있어 승승장구할 수 있는 젊은 나이의 미혼인 남자가 뜻하는 바가 뭐겠어?”
카롤리나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인기 많은 신랑감?"
“잘 아네.”
내 대답에 카롤리나가 그제야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귀족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애매한 신분이거나 낮은 신분의 아가씨들은 관심 가질 만한 상대지."
“그렇겠네."
“심지어 재산이 상상 이상으로 많다면 고위 귀족들도 손을 벌릴 수도 있고.”
카롤리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라그나르가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친분을 유지하면 좋을 것 같으니 저렇게 대화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목석같아. 어쩜 저렇게 안 웃어?"
카롤리나가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어딜 보아도 놀리는 말투였기에 내가 슬쩍 흘겨보자 곧 부채를 펴 들고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에 안 들지만, 대화는 이어가야겠고, 그런데 웃기는 싫고, 이 자리에서 어서 구해 줄 공주님을 기다리는 모습에 내 마음이 다 아프다.”
“카롤리나.”
장난도 적당히 치라며 무어라 말하려니 그녀가 눈썹을 들썩거리며 웃음을 참는다.
저 모습이 오히려 더 약올랐다.
"비밀 연애인 것 같은데 어서 밝히는 게 좋지 않겠어? 정말 이러다가 저 중 한 명이랑 결혼이라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
“그럴 리 없어.”
라그나르는 절대 그럴 사람, 아니 드래곤이 아니다.
내 확신에 찬 말에 카롤리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나 절대적이란 것은 없으니까 조심하란 소리야.”
"응원해 주는 거 맞아?"
어째 저주 같다.
내 말에 카롤리나는 표정을 펴고서는 부채를 살랑거리며 눈매를 곱게 휘어 웃었다.
새초롬한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는 미소는 뭇 사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 사내에게는 네가 아까우니 문제가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차 버리라고.”
진심이 가득 담긴 참으로도 따뜻한 조언이었다.
"내가 성격이 더러운지라 이런 조언밖에 해 주지를 못하겠네.”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나름대로 내 걱정을 해 주는 것이기에 오히려 이 상황이 조금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근처에 있는지도 모르고 처음 본 여자들이랑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꼴은 가만히 보고 싶지 않았다.
"라그나로.”
내 부름에 그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살피더니 곧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망설임 없이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여인들을 제치고서 내게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내 물음에 라그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라그나르 품에 안긴 키키를 받아 들고서는 가볍게 물었다.
“재미있었어?”
"아니.”
“그런 것 치고 꽤 길게 이야기하던데.”
“투자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내서 잠깐 대화하려 했더니 자꾸 말돌려서 안 그래도 그만하고 널 찾으려 했어.”
라그나르의 빠른 설명에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나는 한 팔에 키키를 꼭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카롤리나와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그래, 알겠어. 이만 가자."
“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라그나르가 당황하며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내 옆에서 카롤리나가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를 듣자니 민망함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질투해 버렸다.
* * *
시하브는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생기란 남아 있지 않았고, 오로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좌절만이 가득했다.
시하브는 처음에는 이 모든 상황이 꿈일 것이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며칠을 자고 일어나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그는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너져 내렸다.
곧 끔찍한 감옥으로 옮겨지고 나면 지금 받는 이러한 대우조차 그리워지리라.
시하브는 꼴사납게 눈물을 뚝뚝흘리며 저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원망했다.
'빌어먹을 연놈들 같으니라고, 똥물에 튀겨도 시원찮은 놈들.'
애초에 악녀의 딸이 살아 있어서, 이러한 일이 생기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그라들었던 분노가 다시금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분을 만나 뵐 수만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이런 형벌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혹시 자신을 구해 주지 않을까 하는 옅은 기대감에 도장의 출처도 끝끝내 비밀로 두었는데 이제와 보니 후회가 되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밝힐 걸 그랬나?'
아니, 아니다.
시하브는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디 그자가 보통 사람인가. 헛소리했다고 내 혀를 뽑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결국, 이러한 생각의 종점은 끔찍한 좌절이었다.
끈적끈적한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그때 그에게 마지막 동아줄이 내려왔다.
자신을 호송하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려는 것이 아닌가.
아직 도착지에 도착하려면 멀었다는 것을 알기에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를 속박한 것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기, 기사님?”
시하브가 당황과 기쁨이 섞인 눈으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분께서 네게 베풀어 주시는 마지막 은혜다.”
“저, 정말입니까? 제가 살 수 있는 겁니까?”
"다음 자비는 없을 테니 죽은 듯이 살아. 절대로 정체를 들키지 말아라.”
누구에게라도 정체를 들키는 순간, 네 목숨도 끝일 터이니.
기사의 살벌한 경고에도 시하브는 뭐가 기쁜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망설임 없이 마차를 끌고 다시 사라졌고, 시하브는 자유를 느끼며 눈앞에 있는 어두컴컴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부랑자들로 가득 찬 빈민가가 시하브를 맞이해 주고 있었다.
'빼돌려 놓은 돈만 있다면 이 제국이야 뜰 수 있어.'
시하브는 날이 밝는 즉시 몰래 숨겨 놓은 돈을 찾기로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거리에 발을 내디뎠다.
"커억!”
하지만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공격에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몸을 감쌌고, 다음 날 그가 눈을 뜨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
대공녀가 되고서도 내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아, 닭살 돋는 신혼부부를 바라보는 것이 이 일상의 새로운 점이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오스왈드에 있는 라몬트에게서 편지, 정확히 말하자면 초대장이 왔다.
곧 있을 건국제에 타국의 황족, 왕족, 귀족들을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마탑과 연금탑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함선에서 화려한 파티를 여니 기꺼이 초대에 응해 달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건국제를 핑계로 새로운 황제를 보여 주려는 거네.'
꼭 참여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는 오늘의 신문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신문에 실린 내용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빈민가에 다시 찾아온 비극!]
신문 헤드라인에 쓰여 있는 충격적인 기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