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59화 (158/185)

제159화.

“빈민가에서 다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면서요?”

"이게 무슨 일이래요?"

“세상에나. 끔찍하기도 하지. 그 악녀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이!"

빈민가 근처를 둘러싼 사람들은 사건의 정황에 대해 너도나도 떠들어 댔다.

이리저리 떠도는 소문들은 크게 부풀더니 이내 이러한 소문마저 떠돌기 시작했다.

"악녀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지 뭐야!”

"아니야! 죽은 악녀의 원념이 너무 강해 빈민가의 사람들을 죽이는 거라더군!”

귀신의 짓인지 사람의 짓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인해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집중되었다.

결국, 악녀의 짓이라고.

과거 이와 유사한 사건에서 범인으로 몰려 비참하게 죽은 자.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워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욕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웠다.

'일단 상황을 좀 살펴보기 위해 오기는 왔는데.'

나는 빈민가 근처에 마차를 두고서 밖을 살펴보았다.

구경꾼들은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이리저리 잘도 모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쉽사리 얼굴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라그나르와 플뢰르가 우선 나가서 상황 파악을 하는 중이었다.

“짜증 나네.”

그때 마차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밖을 보니 플뢰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사건 현장에 들어가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그나르는?"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았니?"

“예.”

그렇다면 망설일 것도 없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베일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았다.

프레이르의 얼굴을 아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처음에는 당당하게 드나들 생각이 없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굳이 숨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알면 알라지.'

신경 쓰지 않으리라.

나는 마차에서 내려 플뢰르와 함께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체이너드 가에서 오셨군요."

플뢰르의 제복에 달린 가문의 인장을 본 기사가 내게 인사를 한 뒤, 미리 지시를 받았다며 슬쩍 옆으로 비켜 주었다.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시몬은 근처에 있는 경비대를 보고는 크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건가?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쉬쉬하며 덮으려 해?"

차분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 안에 핀 노기가 강렬하여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기엔 타이밍이 좀 그렇지.’

오래간만의 만남이라 반가운 것과 별개로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시체를 살펴보고 있는 라그나르에게로 향했다.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가 황급히 다가와 내가 시체를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보기에 좀 안 좋으니까 다른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

라그나르의 표정 또한 조금 전에 본 시몬처럼 좋지 않았다.

우리는 현장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해 멀리서 현장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시몬이 많이 화난 것 같은데.”

“피해자만 벌써 열 명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경비대에서 사건을 묻으려고 했나 봐.”

“뭐? 제정신이래?"

라그나르도 한심하다며 말을 덧붙였다.

“변명을 들어 보면 던전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혼란스러워질 것이 두려워 상부에 보고 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

라그나르는 말을 마친 뒤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설이는 것도 잠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체 중에 그 녀석이 있더라.”

“그 녀석이라니?"

“시하브 프리다."

"......."

보육원장의 이름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도대체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당황함이 몰려와 순간 머리가 굳어졌다.

누군가가 황실에 침입하여 호송해 가는 시하브를 빼 준 것이다.

빈민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만 해도 충격적인데 시하브의 일까지 겹치니 시몬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이번 일도 시몬이 위임받고서 주도하겠다고 하는데….”

라그나르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다가 황급히 내 앞을 막았다.

“이 악녀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와!"

빈민가 사람으로 보이는 이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온 탓이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는데 주변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왜 또다시 우리를 죽이려고 해!

죽었으면 곱게 꺼질 것이지 왜 다시 나타나 우리를 괴롭혀! 왜!”

분에 받친 목소리에 나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그 사람을 바라볼수밖에 없었다.

악을 쓰며 화를 내고 있지만 사내는 두려워하고 있다.

지금 자신들에게 처한 상황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 낼지 몰라 막 연한 불안감이 든 것이다.

다음 피해자가 자신이 될 수 있으니 무서움에 벌벌 떠는 거겠지.

나를 삿대질하고 있는 검지가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놀란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지.”

사내의 등장에 갑자기 소란스러워지자 시몬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고귀한 황족의 등장에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던 이가 억울한 목소리를 내며 간절히 말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악녀가 잡혀가는 그 순간을 똑똑히 봤기에 기억합니다! 저 얼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 질수록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더해졌다.

시선만으로도 칼로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프레이르는 잘못도 없이 이러한 시선을 견뎌야 했던 거겠지.'

사랑만 받고 고귀하게 자란 이가 한순간에 지옥에 떨어졌으니 미치는 것이 당연할지도.

입안이 참으로도 썼다.

그때 라그나르가 가만히 듣다 말고 사내의 말을 잘라 내었다.

"너는 이번 봄이 참으로 보내기 편했을 거야.”

“뭐, 뭐?”

“배곯는 시기인 봄에도 식량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겠지.”

라그나르의 낮은 목소리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이 많이 생겼을 거야. 그늘막이 진 곳에서 너는 더위를 피하며 이번 여름은 시원하다 느꼈을 테고.”

라그나르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가을에 들어서서 바람이 차가워졌지. 너는 작년과 다르게 유독 좋은 옷을 입고서 찬 바람을 막을 수 있을 거야.”

사내는 문득 제 옷을 내려 보더니 소중하다는 듯 꼭 쥐었다.

빈민가 사람들의 옷은 보통 낡고 추레하여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은 달랐다.

적당히 도톰하고 평범한 재질의 옷.

이곳의 사람이라면 쉽게 찾아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그뿐일까. 던전이 발생하여 엄청난 폭우로 인해 피해를 보았을 때도 구제 활동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도 기억하고 있을 테고."

라그나르는 사내를 무생물 바라보듯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 베네디토 상단에서 지원해 줬다는 걸 여기 있는 이들은 모르지 않겠지.”

“그, 그게 지금 이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네가 악녀라 욕하며 손가락질하는 이 여자가 베네디토 상단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라그나르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놀란 듯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힘들어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베풀어 준 것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죄 없는 이를 악녀로 몰아가?”

라그나르의 목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주변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공께서 빈민가에 베풀어 준 은혜를 생각하면 그대들은 대공녀를 이리 대해서는 안 될 텐데!"

플뢰르마저 말을 얹자 사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곧바로 내 앞에 무릎을 꿇고서 사죄를 하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죄송합니다. 너무 닮으셔서 아니, 아닙니다. 제가 큰 착각을 했던지라!”

나는 사내와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내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던 이들이 주춤거리며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고작 이 정도 호의에 의심을 접어 버린다니.'

빈민가 사람들에게 계절마다 호의를 베풀고, 지원해 준 것은 의도치 않게 이 상황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화를 내고 싶지만, 주변을 생각해서 어울려 줘야겠지.’

라그나르도 검을 빼 들지 않고 말로 먼저 타일렀으니 나 또한 참아야 했다.

나는 사내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따사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무어라 덧붙어서 안심시켜 줘야 하는데 위로의 말이 나가지 않는다.

무서우니 그럴 수 있다고, 다독여 주며 이 기회에 호의를 쌓아야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짜증 나.’

나는 굳게 다물린 힘을 간신히 떼어 냈다.

"나 또한 이 일에 대해 크게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정말 화가 난다.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이리 달려올 정도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또한 그대들이 더는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최대한 도움을 줄생각이니 이만 일어나도록 해요."

사내는 엉거주춤 일어나 다시금 내게 몇 번이고 사과를 한 뒤에야 꽁지가 빠지게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니 주변에 모인 사람들도 다시 조용히 흩어졌다.

소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정리되니 시몬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면목이 없네.”

“무슨 소리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 알지?"

내 말에 시몬이 멈칫하고 굳더니 이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단호한 말에 시몬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화난 것 같았다.

“또다시 이런 일로 잘못도 없는 네가 악명에 휩싸이는데 괜찮다고?"

“응.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조금 전에도 라그나르가 아니었다면, 혹은 혼자였더라면 분노에 휩싸인 저들이 무슨 짓을 벌였을지도 모르는데 괜찮다고?"

시몬은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히 말하던 모습과 달랐다.

조금 초조해하는 것도 같았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겠지.'

안 그래도 보육원 사태로 인해 나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니 더더욱 미안해하는 것이리라.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관련이 있는 자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것이라면 잘못 선택한 일이야.”

“뭐?”

“오히려 난 이 일로 내 어머니의 누명을 벗길 생각이거든. 그러니 괜찮아.”

“......."

신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가는 자를 사랑한다.

그러니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 고자 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테지.

피해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일은 신이 내게 준 기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니 두려울 것도 없다.

내 말에 시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몬의 안색은 평소와 다르게 참 피곤해 보였고, 언뜻 보니 다크서 클 또한 깊게 내려온 것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뒤늦게라도 괜찮은지 물어보려는데 시몬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프네. 너는 앞으로 현장에 출입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아니, 앞으로 출입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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