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사건 현장에 더는 찾아오지 말란 소리야.”
시몬은 단호히 말했다.
“황태자의 명령이야. 사건은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그러니 현장에 찾아오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도록 해.”
시몬의 반응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건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했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시몬의 표정이 이상했다.
스스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말투는 왜 저렇게 까칠하단 말인가.
나는 우선 시몬의 완강한 마음을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몬. 왜 그러한 명령을 내리는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여긴 네가 오기 너무 위험해.
그리고 곧 가면 축제가 열릴 테니 바쁘잖아.”
“그 정도야 괜찮아. 하루 이틀 피곤한 것도 아니고.”
잠을 조금 줄이면 충분히 되는 일이다.
조금 자만심이 넘치는 말이지만 내가 돕게 돼서 사건이 빨리 해결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 사건에 대해서 나만큼 열성적인 사람은 없을 테니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 말에도 시몬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단순히 걱정만은 아닌 듯해 나는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시몬. 이 일에 내가 개입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어?"
“그런 것 없어. 단지… 이건 어디까지나 황실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게.….”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서 필사적으로 내 의견을 표현했으나 시몬은 내 말을 잘라 냈다.
“다프네. 이건 황실의 일이야.”
시몬의 눈빛이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이건 나를 걱정하는 친구의 눈빛이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은 게 있다.
는 듯 수상한 태도에 나는 짓고 있던 미소를 던져 버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다프네. 이건 어디까지나 황실 기사단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야. 더는 민간인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은 내 기분도 생각해 줘."
시몬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단순히 내가 서운함에 말도 안되는 일을 우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이 내 친엄마랑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끝까지 안 된다고 말하는 시몬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서는 시몬을 흘겨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더는 주변의 시선을 끌면 안 되겠지.'
체이너드 가문에 들어가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황태자와 다투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 하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한발 물러날 때였다.
나는 알겠다며 작게 고개를 숙이고, 이만 돌아가려 했다.
“정말 그뿐이야?”
“뭐가?"
그때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라그나르가 입을 열었다.
“정말 황실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출입을 금지시키는 거냐고.”
“그래. 그뿐이야. 왜? 아니라고 생각해?”
“응.”
시몬은 골치 아프다는 듯 라그나 르를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니,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 바쁘니까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 된 후에 이야기해.”
"너 지금 굉장히 이상해.”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시몬이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짜증을 꾹 참고서 낮게 읊조렸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굉장히 날카로워져 지켜보던 주변의 사람들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을 말리려고 했으나라그나르가 나를 저지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너 뭔가 숨기는 게 있는 표정이잖아.”
"하. 누가 보면 네가 내 표정을 다 읽는 줄 알겠다? 근거라도 있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근거가 아니라 감. 너 지금 내가 나스였을 때 표정이랑 똑같아.”
라그나르의 말에 시몬이 무어라 덧붙이려다가 자신의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그딴 짓 해 놓고서 할 말아닌 건 아는데. 말할 거 있으면 지금 말해. 괜히 마음속에 담아 두다가 끙끙 앓지 말고.”
시몬의 두 눈이 거센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짓고 있던 표정이 무너지면서 마치 울 것처럼 보였으나 찰나였다.
“그런 것 없어.”
“시몬.”
라그나르가 다시 시몬을 불렀으나 그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고민이 있어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야. 적어도 확실하게 해결될 때까지는 말할 생각 없어.”
“야, 너 지금….”
라그나르가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신 모제스오벤 인사드립니다.”
지난번에 보았던 엄마의 보육원동기이자 헤로니스 공작의 부관인 그가 사건 현장에 나타난 것이다.
공작의 명을 받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시몬은 불쾌한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무래도 사건이 사건인지라 공작님께서 최대한 전하를 도와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오라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하.”
하지만 그 표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시몬은 우리에게 향했던 것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불허한다. 이 사건은 어디까지나 황실에서 해결할 테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만….”
시몬은 오벤 백작의 말도 채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어느새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를 우리는 더는 붙잡을 수가 없었다.
***
추수가 이루어지고, 곧 있을 가면 축제 덕에 시끌벅적해야 하는 수도가 암울한 분위기에 둘러싸였다.
황실이 대대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있고, 경비대들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음에도 꾸준하게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시몬은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이후로 불면증과 함께 찾아온 끔찍한 스트레스에 머리를 짚었다.
“젠장.”
집무실에 홀로 있는 이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시몬의 마음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도장의 비밀을 확인하기 앞두고서 막연한 두려움에 불면증에 시달렸고, 괜한 죄책감에 불안한 마음만 쌓여 갔다.
'차라리 확인이라도 해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얼마 전 책상 아래에서 발견한 그 문양은 분명 다프네가 보여 줬던 도장의 문양과 똑같았다.
시몬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에 다프네에게 물어보는 작은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혹시 황실이 이 일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프레이르의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면 시몬은 더는 다프네를 볼 자신이 없었다.
옳지 않은 일이라 함께 분노하며 프레이르의 누명을 풀어 주는데 함께하려 했다.
시몬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최선을 다해서 다프네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황실과 관련되어 있다면 결국 황제, 즉 시몬의 아버지의 뜻으로 인해 묵인된 일이라면….
'존경하는 아버지를 내가 감히 거스를 수 있을까.'
시몬은 자신이 없었다.
성군이라 칭송받고,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더 잘살 수 있는지 고민하며 몸이 상할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으시던 분이셨으니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확인하면 될 것을 시몬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다.
'뭐가 황태자고, 뭐가 자랑스러운 친구야.’
시몬은 자신은 그저 겁쟁이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상처받은 다프네의 표정이 눈에 아른거리니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를 속였다고 라그나르에게 화를 내 놓고 결투까지 신청했으면서…. 나라고 다를 바 없구나.'
시몬은 지독한 자책감이 자신을 잡아먹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우정을 지킬 용기도 없고, 진실을 마주할 자신도 없다.
모든 것을 다 잊고 싶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던 것도 잠시, 창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노크를 하는 듯한 소리였다.
시몬은 복잡한 표정을 지우고서 옆에 있던 검을 쥐었다.
'요새 암살자는 노크하고 들어오나 보지?’
수도가 이 난리가 났는데 암살자를 보낼 정신이 있는 멍청한 놈이 있었단 말인가.
시몬은 검을 뽑아 창문가로 향했다가 건너편에 있는 자를 마주하자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라그나르,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라그나르가 창문에 매달려 시몬을 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밖에 추워. 빨리 문이나 열어.”
라그나르는 당당하게 창문을 열것을 요구했고, 시몬은 자기도 모르게 창문을 열어 버렸다.
'아뿔싸.’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까먹고 습관처럼 저지른 행동이었다.
어쩐지 분해 창문을 붙잡고 부들 부들 떨고 있는데 라그나르는 아무렇지 않게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경비대 좀 강화해야겠더라. 빈민가에 집중한 탓인지 황궁 경비가 허술해졌어.”
라그나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보았던 날카로운 반응과는 대비되는 모습에 시몬은 괜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냉기가 풀풀 흘러 어색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 찾아온 것이 분명 했기에 그의 가슴속에서 죄책감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분명히 빈민가의 일에 대해서 다시 꺼내려 찾아온 것이겠지.
시몬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완강한 거절을 하려 했다.
“그냥 술 한잔하고 싶어서."
“뭐?”
“요새 너무 바빠서 오래간만에 술을 마시고 싶어. 그런데 알다시피 내가 술 마실 친구가 없잖아."
라그나르는 품에서 와인 병을 꺼내더니 가볍게 흔들었다.
"한잔하자.”
"내가 술 마실 정신이 어디 있다고 그걸 가져와?"
“누가 많이 마시자 했어? 이거 다프네가 선물해 준 거라서 나도 많이 줄 생각 없어."
시몬은 다프네의 이름이 나오자 눈에 띄게 안색을 굳혔다.
창밖에 펼쳐진 밤하늘처럼 어두워진 얼굴빛에 라그나르는 모른 척 코르크를 따 집무실에 준비된 와인 잔에 가득 따랐다.
"자. 많이 마셔. 보니까 넌 그냥 술 좀 많이 마시고 자는 게 좋겠다. 안색이 별로야.”
"아주 고맙다.”
시몬은 거칠게 와인 잔을 잡고서는 쭈욱 들이켰다.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들이붓는 모습을 라그나르가 질렸다는 듯 바라보았다.
“주당인 거 티 내냐?”
"다 마셨으니까 그만 돌아가."
시몬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라그나르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라그나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 어댔다.
“술 마셨으니 좀 마음이 풀어지지 않아?”
“풀어지기는, 더 복잡해지는데.”
“도대체 어떤 비밀이길래 네가 그렇게까지 힘들어해? 빈민가와 관련이 있는 거야?”
“…적어도 모든 게 확실시되면 말하고 싶어.”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물었다.
"말할 생각이 있기는 하고?"
"......."
"물론 내 인생에서 다프네가 제일 소중하고, 제일 첫 번째 친구 이기는 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내 친구가 아닌 건 아니야."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굳게 잠겨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듯했다.
시몬은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다프네에게 비밀로 해줄게. 그러니 말해 봐. 아무리 무거운 비밀이어도 둘이 나누면 좀 가벼워질 것 아니야."
“용언으로 약속할게.”
라그나르가 결코 어길 수 없는 맹세를 입에 올리자 시몬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과연 라그나르는 자신의 말을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것을 숨기고 있었냐며 비겁하다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기운에 약해진 마음은 친구에게 마음의 짐을 털어놓으라 종용했다.
마침내 시몬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라그나르의 품에 들어 있던 아티팩트에서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라그나르! 다프네 아가씨가 쓰러지셨어!
이런 상황에서 넌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냐는 플뢰르의 외침에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상태로 멈춰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