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유니스는 눈앞에 펼쳐진 책을 바라보며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삼켰다.
베르돌트의 말이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많은 것이 바뀌었어.'
계속해서 부정한다고 한들 책에 적힌 내용과 밖에서 펼쳐지는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유니스는 자신을 감싸는 불안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갑자기 빈민가 살인 사건은 왜 일어나는 거지?'
유니스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빈민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을 해결하기 위해 콘란드와 함께 움직여 범인을 잡아냈다.
'프레이르…..'
사실 유니스는 프레이르가 범인 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애초에 진범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유니스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유니스는 이를 악물고는 운명에 휩쓸리던 그때를 떠올렸다.
'범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어. 어떤 증거도 없었으니 억지로 주장한다면 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게 당연하잖아.’
여러 증거가 프레이르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많은 이들의 외면 속에서 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끔찍하게 죽었지.”
그것이 프레이르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던게 당연하잖아.'
무엇보다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게 하기 위해선 유니스가 나서서는 안 되었다.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유니스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필 펼쳐진 페이지는 프레이르의 죽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유니스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세라 급히 자신의 눈가를 꾹 눌렀다.
처음에는 운명을 거부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유니스는 결국 이야기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프레이르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것도 그래서였다.
어차피 유니스에게 주어진 것은 사랑과 행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책의 내용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면 과연 앞으로 남은 운명도 행복일까?
이야기 그대로 흘러갔더라면 살인 사건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마리아도 정해진 대로 행복했을 것이다.
애초에 이미 라그나르의 손에 죽었어야 할 베르돌트가 살아 있다.
는 것부터가 큰 변화였다.
'베르돌트의 말이 너무 신경 쓰여’어째서 베르돌트는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인지, 도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그 불안감에 유니스는 주먹으로 책을 내려쳤다.
베르돌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이 꼭 자신을 범인으로 몰거라고 경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그 불안감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유니스는 글자가 빼곡한 책을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기회가 남아 있잖아.'
유니스는 페이지를 넘겨 아무 곳에나 잉크를 떨어트렸다.
곧 잉크가 책에 스며들더니 그 페이지가 순식간에 백지로 변했다.
“이번에도 확실한 범인이 나타나면 되니까. 그렇다면 내가 범인으로 몰릴 일도 없겠지.”
유니스는 천천히 종이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악녀의 귀환으로 인해 떠들썩해진 빈민가….”
유니스는 글을 적어 내리다가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가 있었지.'
애초에 이야기가 비틀린 중심에는 새로운 베네디토 상단주가 있었다.
'다프네 베네디토라고 했던가.'
기분 나쁘게도 죽은 프레이르를 쏙 빼닮은 얼굴이 생각나 저절로 유니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꼭 프레이르가 살아 돌아와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애가 없으면 마리아도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악녀와 꼭 빼닮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등장하자 악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니스는 글자를 적어 내리며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을 가지고 소설 속의 세상에 떨어졌을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세계에서 유니스는 죽고 말았으니까.
갑작스럽게 이곳에 떨어트린 대가로 신은 유니스에게 한 가지 특권을 주었다.
이 세상의 이야기를 만든 유니스가 정해진 운명을 한 번 비틀 기회를 말이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지금 사용하는 것이 두렵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치 않았다.
그래, 이것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결국, 정의로운 이들에 의해 악녀의 정체가 밝혀지고 말았다. 그녀의 최후는 결단코 죽음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죽음이었다.”
마지막 문장까지 써 내려가자 드디어 유니스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났다.
'그래.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야. 나에 이어서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있을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게 맞아. 그래야 해.'
그것이 작가인 자신이 이끌어 가야 할 이 세계의 정해진 운명이니까.
* * *
시몬이 금지령을 내린 뒤 나는 정말로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문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라그나 르의 출입마저 막아 버렸다는 것이다.
여전히 시몬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분명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상단의 집무실에 홀로 남아 생각에 잠겼다.
곧 가면 축제가 열릴 테고 상인들과 조정하면서 맞춰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지만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된단 말이야.”
물론 시몬도 사람이니 우리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를 보았던 그 표정에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그때 건물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플뢰르?' 분명 문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어야 할 목소리가 건물 밖에서 들려 왔다.
무엇보다 플뢰르가 저렇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자세히 들어 보니 어서 문을 열어 달라, 상단주를 만나게 해 달라.
이런저런 요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상단의 건물 앞에서 플뢰르와 대치하고 있는 상인들이 보였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아무리 내가 나이가 어린 상단주라고 한들 이들은 나를 존중해 주던 사람들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좋은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마친 것 같은데 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가않았다.
“무슨 소란이냐는 것은 우리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흉흉한 소문 때문에 걱정되어서, 잠을 못 자겠습니다!"
억울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호소하는 것에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이번 빈민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악녀가 돌아왔다고 한 것은 들어 보셨겠죠.”
낮고 굵은 목소리가 모여 있는 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가면 장인?'
이번 축제에 가장 중요한 인력이자 우리 상단에 소속된 가면 장인들의 대표인 노인이었다.
'악녀의 이야기라면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사건이 정리되지 않아서 다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걸까?
“그 사건이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 있는 것과 관계가 있나요?"
“그 악녀가 상단주님의 몸을 빼앗아 기생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어제까지 멀쩡했던 내게 갑자기 그런 소문이 들러붙었다고?
적어도 소문이란 작은 곳부터 시.
작해서 점차 커지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내게 이상한 소문이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늘 예민하게 신경 쓰며 그런 소문이 돌 것 같으면 바로 조치를 취했단 말이다.
'분명 어제까지 이런 소문은 돌지 않았어.'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노인 또한 목을 가다듬고서는 말했다.
“우리도 그런 소문을 믿고 싶지 않지만, 이번 축제에 불매 운동을 할 것이라는 말들이 오고 가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 없더군요.”
“고작 얼굴이 조금 닮았다는 이유로 그런 소문을 믿는 사람이 있나요? 정말 믿기지 않네요."
내가 불쾌해하자 노인은 조금 미안한지 조금 전과 다르게 기세를 누그리며 말했다.
“저희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문이란 것이 어느 순간 진실이 될 수 있으니 두려울 뿐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는 가면 축제로 밥벌이하는 놈들입니다. 그러니 이 축제가 망쳐지는 것을 원치 않고요."
그것은 나 또한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부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범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 주시어 가면 축제가 무사히 열리도록 힘써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난동을 피우며 찾아와 놓고서 나름 진중한 부탁이었다.
"저 또한 가장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이렇게 무작정찾아오지 마시고 미리 연락을 주시면 좋겠네요.”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깊이 사죄드립니다.”
모여 있는 상인들은 의외로 쉽게 사과를 하고 돌아갔다.
간간이 나를 향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고, 미안한 눈빛으로 끝까지 사과하며 나가는 이들도 있었다.
모두 빠져나가자 집무실은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조용해졌다.
“플뢰르.”
"예, 상단주님.”
"내가 기억하기론 어제까지 이러한 소문이 돈다는 것을 보고받은 적이 없는데.”
플뢰르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또한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지다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플뢰르 또한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 플뢰르는 어제까지 소문에 신경을 썼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하루 만에 내가 모르는 소문이 돈다고?'
그것도 모두가 알 정도로?
마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당연하다고?'
무언가 머리를 거세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원작의 영향인 걸까?'
악녀의 딸인 나를 뒤늦게라도 죽이기 위해서 원작이 강제적으로 발동하는 것이라면?
‘끝난 게 아니었나?'
그러한 생각을 하고 나니 몸을 타고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팔을 매만지면서 이리저리 날뛰는 복잡한 생각을 다잡았다.
분명 내가 읽었던 책에는 빈민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이 사건은 원작에 없는 내용이었다.
만약에 이 사건이 악녀의 딸인 나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두려움을 느낀 것은 찰나였다.
'상관없어.”
이미 어릴 적부터 숱하게 죽음을 피해 왔다.
다 큰 이 순간 무서워 할 것이 뭐가 있는가.
또다시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나는 책상으로 걸어가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카타리나가 선물해 준 리볼버와 총탄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 개발한 신제품이야. 마탑과 연계해서 만든 것인데 네가 써보면 좋을 것 같아서.'
결혼식에 참석한 카롤리나가 새롭게 주고 간 총탄을 만지작거리다 손에 꼭 쥐었다.
이미 많은 것은 바뀌었고, 앞으로도 더더욱 바뀔 것이다.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범인을 찾아야 했다.
“플뢰르.”
“예, 상단주님.”
내 부름에 플뢰르가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그녀는 무슨 명령을 내리든지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니까 할 수 있어.'
시몬을 생각해서라도 이 일은 황실에 일임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안 될 것 같다.
가족들도, 라그나르도 모르게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해 볼 필요성이 생겨났다.
나는 리볼버와 총탄을 집어 들고서 플뢰르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부터 함께 빈민가에 잠입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