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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62화 (161/185)

제162화.

"괜찮으신가요, 아가씨?"

“응, 난 괜찮아.”

차가운 가을밤의 바람은 꽤나 거세 플뢰르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플뢰르를 안심시켜 주고는 슬쩍 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나와 플뢰르는 지속해서 순찰하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빈민가로 숨어들었다.

'레녹스가 준 물약을 먹고서 어느 정도 기척이 줄었기는 했다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 없겠지.'

"아가씨. 피곤하시면 빠르게 돌아가셔야 해요.”

"알겠어.”

플뢰르는 점점 줄어드는 내 수면 시간이 걱정되는지 다시 첨언했지만 지나가는 경비대를 발견하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가 말이야. 이렇게 돌고 돌아도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건지 모르겠어.”

“빨리 범인 녀석 잡고 퇴근하고 집에 가고 싶다.”

“그런데 이 정도 소문이 도는데 상단주라고 했던가? 그 여자를 잡아다 조사해 봐야 하는 것 아니야?”

경비병들이 떠드는 소리에 플뢰르가 살벌하게 그들을 노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것들이….”

자칫하다가는 그들에게 달려들 기세였기에 플뢰르의 손목을 붙잡고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왜 이번에 대공 전하와 결혼하신 분, 그분의 자녀라고 하더라고."

“대공녀라서 조사가 쉽지 않나 봐.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도 의심하시는 것 같지 않았나?"

"아무리 그래도 악녀의 귀환이라 는데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 대충 주변을 살피고는 사라졌다.

어느새 그들이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우리는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들의 말따위 흘려들어 주세요, 아가씨.”

“저런 말에 상처받을 정도로 약하진 않단다.”

“이럴 때 라그나르가 있었더라면 저놈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나는 플뢰르가 작게 중얼거린 것을 모른 척 흘려들었다.

‘라그나르가 있었더라면 오히려 내가 절대 못 나오게 했을걸.'

갑작스럽게 도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점차 거세지는 항의, 일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줄어들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서 요새 라그나르는 나를 굉장히 과보호하고 있었다.

밤에는 꼭 일찍 자라고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지만, 오늘은 그 약속을 깨고 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비밀을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

라그나르도 시몬의 친구니 어느 정도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상태이니까.

나 때문에 둘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플뢰르를 다독이면서 로브를 고쳐 썼다.

살인 사건으로 인해 거리는 한적했고, 빛이 들지 않는 외진 곳은 음침함이 맴도는 것 같았다.

나와 플뢰르는 발소리를 죽이며 혹시 주변에 수상한 이가 없는지 살피기 바빴다.

'이 짓도 벌써 나흘째네.’

소문이 돌고 나서부터 시작했는데도 아직 수상한 이도 그럴싸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틀에 한 번꼴로 피해자가 나타나고 있으니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어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오늘 무슨 일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

그 점은 플뢰르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약속한 듯 다시 입을 다물고서 거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정말이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사내가 술에 취했는지 자신의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뒷모습인지라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행색을 보아하니 빈민가의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이 밤중에 아직도 돌아다니는 이가 있다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겠지. 혹시 모르니 뒤따라가 보는 게 좋겠어.”

위험할지도 모르니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사내는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잡고서는 골목길로 들어갔고, 우리도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곳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그리고 오른쪽 골목으로 돌았을 때 사내는 순식간에 사라진 상태였다.

"......."

"......"

나와 플뢰르는 황급히 뛰어 골목끝까지 향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내가 사라졌다.

“플뢰르! 주변을 샅샅이 찾아봐!”

"예!"

내 명령에 플뢰르가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나 또한 골목에서 벗어나지 않고 혹시 사내가 어디 쓰러져 있지는 않을까,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끄으으.”

그때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괴로워하는 목소리 같았는데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꼭, 끄윽.”

숨이 넘어갈 듯한 위태로운 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예민해졌다.

마침내 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아챈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린 채 고통을 호소하는 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있는 힘껏 몸부림치다가 지쳤는지 축 늘어져 가는 것에 깜짝 놀라 황급히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인질이 잡혀 있기에 함부로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내를 붙잡고 있던 이가 고개를 들더니 내 존재를 눈치챘다.

“뭐야?"

낮은 목소리에 평범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소름이 끼쳤다.

죽음을 이끌고 다닐 만큼 기분 나쁜 목소리였고,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던 소리 같았다.

“당장 그 사람을 풀어 줘."

나는 로브를 뒤집어쓴 이에게 리볼버를 겨눈 채 경고했다.

하지만 그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더니 갑자기 쥐고 있던 것을 놓았다.

“으헉!”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손을 놓자마자 사내가 내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함께 쓰러졌는데 내 위를 덮친 사내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스텐?'

분명 던전에서 구출된 후로 황실에서 보호해 준다고 들었던 스텐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내가 놀라 굳어 있는 사이 수상한 자가 내 앞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황급히 스텐을 치우고서 뒤로 물러났고, 수상한 자와 정면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재밌지만 귀찮네. 알아서 해결해.”

“뭐?”

내게 하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황급히 뒤를 돌아봤으나 누군가가 내 머리를 거세게 내려치는 것이 더 빨랐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고, 아찔한 느낌과 함께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윽.”

내가 휘청거리자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수상한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다시 나를 내려치려고 했다.

“아가씨!”

하지만 멀리서 달려오는 플뢰르의 외침에 짧게 혀를 차더니 나를 내려친 무기를 내던지고서 담을 넘기 위해 재빠르게 반대로 뛰어갔다.

나는 흔들리는 머리를 붙잡고서 뒤늦게 도망치는 수상한 녀석을 향해 리볼버를 겨누었다.

'젠, 장….'

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지자 더는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도망치는 놈이 뒤를 돌면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지독한 통증과 함께 나는 빠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

아무래도 그동안 쉬지 않고 일만 해서 벌을 받나 보다.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지독한 몸살에 걸린 것 같았다.

몸 전체가 콕콕 쑤시는데 그중에서도 공격당한 머리가 제일 아팠다.

요새 내 주위를 떠도는 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식사도 거르는 일이 많아서였을까?

속도 좋지 않았다.

아니 그냥 전체적으로 아팠다.

".........”

힘들게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팠을 때 혼자가 되니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속상함에 눈물이 찔끔찔끔 나왔다.

지금까지 분명 괜찮았었는데.

애초에 시몬이 그곳의 출입을 금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아니, 내가 몰래 나갈 일도 없었을 텐데.

평소라면 다른 이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아파 빙글빙글 도는 머리는 옳지 않은 결론을 내었다.

수상한 비밀을 만드는 시몬에게도 서운했고, 아픈데 내 옆에 없는 라그나르에게도 서운함이 밀려 왔다.

이러한 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은 라그나르밖에 없는데 그 라그나르가 지금 내 옆에 없다.

"아가씨! 정신이 드셨나요?"

플뢰르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는지 내가 앓는 소리에 황급히 내쪽으로 뛰어왔다.

“라그나르….”

“네?”

“라그나르가 보고 싶어….”

"맙소사.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가씨. 제가 당장 라그나르를 불러 올게요.”

아픈 와중에 내가 무어라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몽롱한 정신에도 라그나르를 데리고 와 준다는 말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서는 미소를 지었다.

"라그나르! 어디에 있어!"

플뢰르가 라그나르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에 빠져든 것 같다.

* * *

'아, 머리야.'

다시 일어나도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정말 컨디션이 최악이네.'

나는 머리를 붙들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 위에 올려진 물수건이 아래로 떨어졌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눈앞에 물 잔이 나타났다.

커다란 손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의 손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라그나르가 멋쩍은 표정으로 물 잔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미안해, 다프네. 난 네가 아픈 것도 모르고 막 외출이나 하고."

서글픈 목소리에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약한 양심이 찔려 왔다.

'멋대로 나간 내 탓인데.'

라그나르 뒤로 시몬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프네?”

“응. 난 괜찮아. 그냥 조금 무리했나 봐.”

시몬까지 왔다면 나갔다 온 것을 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 쓰러진 것으로 하기에는 지금보다 더 과보호할 것이 걱정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곰곰이 고민하는데 시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사가 그러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쓰러진 것 같다더라.”

"아아. 요새 소문이 좀 안 좋게 돌아서 신경이 쓰여서 그래.”

“소문?”

“몰라?"

시몬이 처음 듣는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어 라그나르를 보자 그도 모르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둘 다 소문을 못들을 정도로 바빴던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인들이 전해 준 소문을 알려 주니 두 사람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거지?"

"......."

시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그래서 요새 항의가 많이 들어와. 신경 쓸 일거리가 많아져서 그런 거야.”

나는 시몬을 살펴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떻게든 잘 막고 있으니까."

"........"

“그러니까 시몬. 네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든지 털어놔도 되니까 괜찮아지면 말해 줘. 다른 것보다 그게 더 중요하니까.”

시몬의 두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불안해 보이는 표정에 혹시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일까 싶어 라그나르를 보는데 그저 조용히 우리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혹시 몰래 나간 걸 들켰나?'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을 안 하려 했는데.

솔직하게 털어놓고 사과를 할까 싶은 그 순간.

시몬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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