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이번에 저기 상단주가 쓰러졌다 면서요?”
“왜 요새 안 좋은 소문이 돌았잖아. 스트레스로 쓰러졌다는 말이 있던데.”
길거리 어디를 지나다녀도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번 축제 참 걱정이네요. 아직 빈민가 범인도 못 잡았다는데.”
"너무 대놓고 다녀서 못 잡는 건 아닐지 모르겠어요."
“왜 황태자 전하께서 상단주의 빈민가 출입을 금지했다면서요?
유력한 용의자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던데요?"
도가 넘는 발언이 나오자 갑자기 옆에서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자 엄마가 굉장히 불쾌한 낯으로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머나.”
“이런.”
이리저리 떠들던 이들은 옆에 우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지 곧바로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엄마는 그들을 향해 혀를 차며 말했다.
“앞에서 하지도 못할 소리를 뭐그리 자랑이라고 읊고 다니는지 모르겠군. 헛소문을 저렇게 퍼트리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지.”
엄마의 발언에 모여 있는 이들이 눈치를 보더니 빠르게 흩어졌다.
엄마는 여전히 불쾌한 눈빛으로 그들이 사라진 곳을 보다가 이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도 저런 허튼소리 들을 필요 없다.”
"괜찮아요.”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다정한 손길에 부드럽게 웃었다.
범인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혀서 일까.
예전만큼 크게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다만 내가 쓰러진 것이 부모님께 꽤 큰 충격이었는지 아빠와 엄마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엄마가 가면 축제의 일을 조금 도와주게 되었는데 내 옆께 다니게 되었다.
에서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함
'아마 이 소문들 때문이겠지.'
다 컸는데도 여전히 걱정만 시키는 것 같아 죄송했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함께 있으니 즐거운 마음이 가득했다.
어느새 가면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이 일도 끝나고 나면 바쁜 일은 얼추 정리되겠지.
물론 계속해서 일이 생기겠지만 가을만 하겠는가.
'그때는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야지.'
가족들끼리 함께 여행을 가도 좋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라 작은 미소를 지으며 엄마와 함께 거리를 돌았다.
“이틀 뒤 축제가 열리니까 노점들이 잘 자리 잡았는지 확인하고, 혹시 부족한 것이 없는지 미리 점검해 놔야 해.”
엄마의 조언을 열심히 새겨들으며 다시 상단으로 돌아왔을 때 집 무실 위에 처음 보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뭐지?”
수상한 편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뜯어보았다.
안에 적힌 내용은 짧았고, 강력했다.
내가 한참이고 편지를 붙들고 있으니 엄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편지를 읽고서 이내 나처럼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범인이 보낸 편지네요."
중심가에서 시체가 발견되면 어떨 것 같아? 사람이 많으니 몇 명 죽어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겠지?
놀리는 건가 싶다가도 그 아래 적힌 문장을 보니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편지가 구겨졌다.
곧 가면 축제라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겠네? 그때 다시 만나자.
나를 기습하고서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라니.
나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고서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경고장이네요.”
"경고장?”
“가면 축제가 열리면 그날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내용이니 경고장이나 다름없죠.”
내 말에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편지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불에 태워 죽이고 싶은 표정에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런 편지가 왔으니 축제를 중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구나.
악셀과 황태자 전하께 의논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니요.”
나는 빌어먹을 편지를 노려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직접 찾아오겠다는데 막을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엄마의 근심 섞인 목소리에 나는 안심하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모르니 이야기는 할 테지만…. 분명 두 사람은 계속 진행하자고 할 거예요."
"괜찮을까? 혹시 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엄마는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고, 나는 그런 엄마를 품에 끌어안고서 어리광 부리 듯 칭얼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 자리가 진범을 밝히는 자리가 될 테니까. 그러니 잘하라고 응원해 주세요.”
엄마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꼭 끌어안았다.
아주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
‘얼마 남지 않았어..'
불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무언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라 해도 언제나처럼 그것을 비틀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제 진짜 진실을 밝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드디어 가면 축제의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더욱 소란스럽고 요란한 중심가는 활기가 가득했다.
이 거리에 있는 많은 이들은 빈민가에서 있는 일 따위는 잊어버린 채로 신나게 즐기기 바빴다.
즐겁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신나게 장사를 하는 상인들, 가면을 쓴 채 움직이는 가족들.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 또한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썼다.
'가면은 참 오랜만이네.'
어렸을 적 썼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화려해진 나비 가면이 내 얼굴을 가려 주었다.
나는 거울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상단에 남아서 급하게 터지는 일들을 수습해야 하지만 그 일은 엄마가 도맡아주기로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이것뿐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다녀오렴.'
엄마가 먼저 그런 말을 꺼낸 것도 놀랐는데 끝까지 나를 배려해 주고, 챙겨 주려는 것에 가슴이 찡했던 것은 비밀이다.
나는 거리로 나와서 활기찬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혹시 상인들 간의 다툼이 일어나면 끼어들어 중재도 하며 열심히 주변을 관찰하였다.
그때 건너편 거리에 있는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 제복을 입고 있는 이였는데, 모르고 봤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시몬이였어?'
신분을 숨기고 몰래 주변을 살펴보겠다더니.
설마 기사로 위장해서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을 줄 몰랐다.
나는 지난밤 라그나르와 시몬에게 꺼낸 계획을 떠올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었다.
'시몬이 나를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자.'
그때 꺼낸 말에 두 사람은 처음에는 놀라며 반대하려 했으나 설명이 이어질수록 계획을 실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주변에서 범인을 나로 몰아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다 보면 어느 순간 범인도 안심할 거야. 그때를 노리자.’
'그때까지 완벽한 물증을 찾으면 된다는 거지.'
시몬의 말에 라그나르가 계획을 추가로 덧붙였다.
'그래도 현장을 검거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내가 빈민가를 돌아다녀 볼게.’
라그나르는 자신이 꼭 그 역할을 하고 싶다며 의지를 보였다.
형과 관련된 일이니 자신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 이유였기에 위험을 알면서도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라그나르는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라그나르가 빈민가를 돌아다닐 동안 범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계속해서 허탕을 치는 중이었다.
홀로 빈민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라그나르를 떠올리며 걷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시몬인가?'
조심스러운 손길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예상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마리아?"
“안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이 죠. 선배!”
마리아는 해맑은 미소로 내 주위를 빙빙 돌더니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가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이렇게 예쁜 가면은 처음 봐요.”
"고마워. 네 가면은 없네…?"
“가면을 쓸까 했는데 가족끼리 오래간만의 외출이라서 그냥 다 같이 안 쓰기로 했어요."
마리아의 말에 그제야 그녀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헤로니스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카스토르까지.
공작은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유니스는 아예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카스토르는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마리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좋은 오후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잘 지냈습니다."
카스토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말을 편히 하셔도 됩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시고, 이제는 엄연한 대공녀시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이렇게 예의 바르게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고맙다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넸다.
인사말이 끝나자 카스토르의 목표는 마리아가 되었다.
"누님. 갑자기 그렇게 튀어나가 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만 오래간만에 선배를 봐서 너무 반가웠는걸.”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빠르게 수긍하는 것에 카스토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누나를 신경 쓰느라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공작이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네.”
'인사를 받을 것도 아니면서 왜 다가와?' 참으로 맘에 드는 것 하나 없는 사내였다.
헤로니스 공작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더니 기분 나쁘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듣자 하니 요새 소문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는데.”
"어차피 헛소문이니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 소문이 괜히 도는 것은 아니니 윗사람으로서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지.”
다 큰 어른이 고작 자기 자식뻘아이에게 이리 구는 게 얼마나 유치한 줄 알아야 할 텐데.
나는 입가에 지은 미소를 유지한 채 활기차게 답했다.
“설마 공작님이 길거리에 떠도는 그런 소문을 믿으실 줄 몰랐네요.
공작님께서 소문에 휘둘릴 정도로 현재 사안이 심각하기는 한가 보네요.”
일부러 꾸며낸 내 밝은 목소리에 공작이 보란 듯이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에 지지 않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마리아가 갑자기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는 그런 소문 믿지 않아요!"
"......."
왜 이렇게 조용히 있나 싶더라니.
마리아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의 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건 헛소문일 뿐이에요! 선배가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
적어도 제가 본 선배는 그럴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공작을 우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나 보다.
마리아는 내게 얽힌 소문을 떨쳐 내려는지 누구보다 필사적이었다.
“그러니까 아빠도 그런 말로 선배를 더 힘들게 하지 말아 주세요.”
마리아의 눈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에 공작은 혀를 찼다.
“마리아."
“네?”
"나를 믿어?”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굳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의 눈에 가득 담긴 신뢰에 우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는 선배 믿어요. 선배가 악녀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거면 됐어.”
"네?"
영문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아의 손을 붙잡고서 나는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네가 믿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