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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65화 (165/185)

제165화.

내 말에 마리아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쩜, 어쩌면 좋아요. 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다 봐도 네가 기분 좋은 걸 알 것 같은데.’ 목 끝까지 나올 뻔한 말은 집어넣고서 나는 마리아를 따라 기분좋게 웃었다.

'주인공이었어야 할 네가 내 운명을 믿지 않는다는데 기분이 안좋을 리가 없잖아.'

나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서 그녀가 새처럼 조잘거리는 말을 듣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네.'

유니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마리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즐거운 걸 보니 역시 내 성격이 나쁘긴 한가 보다.

나와 대화를 나누기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유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이후로 오래간만에 뵙네요. 부인.”

“그, 그러게요.”

“저번에 보내 주신 초대장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답니다. 축제가 끝난 뒤 공작 저를 방문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건.….”

유니스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마리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미 오기로 저랑 약속했잖아요. 꼭 오셔야 해요. 저 선배랑 마시려고 맛있는 차도 준비해 놨는걸요.”

“어머, 정말?"

기쁘다며 꺄르르 웃자 마리아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따라 웃는다.

언제까지 길거리에서 이렇게 대화를 이어 갈 수도 없으니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공작이 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 보니 대공께서는 잘 계신가?”

“네. 아버지야 언제나 잘 계시죠.”

아까부터 자꾸 귀찮게 하는 게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요새 성기사들과 함께 빈민가를 돌아다닌다고 하는데. 소득이 없으니 걱정이 되더군. 괜찮다고 하니 그나마 걱정을 덜 수 있겠어.”

소득도 없는 일에 언제까지 매달릴 것이냔 물음이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가 너무 존경스럽답니다. 은퇴하실 때도 됐는데 오롯이 국민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시니까요."

은퇴도 하지 않았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니?

내 말뜻을 느꼈는지 공작이 기가 찬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원래 평민이었다지. 이번 결혼으로 인해 신분이 상승하여서 좋겠어.”

“전 귀족이 아니었어도 지금처럼 행복했을 것 같은걸요. 귀족이 되어서 좋은 점은 마리아와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뿐이랍니다.”

공작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있으니 그의 입가에서 점점 미소가 사라졌다.

마치 내가 어렸을 적 매정하게 내쳤을 때와 같이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나는 더욱 환히 웃었다.

“그래도 대공녀가 됐으니 황실과 국혼을 올리는 건 물거품이 되어서 아쉽겠어.”

공작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그 말에 나는 오히려 이해가 안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국혼이라니요?”

"네 황금색 눈, 황가에 필요한 색이지 않나. 하지만 황태자 전하와 친척이 되었으니 그분과 결혼은 어렵게 됐을 테고. 그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께 섭섭하겠군.”

도대체 공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시몬이랑 결혼을 왜 해?'

아무래도 황금색 눈 때문에 뭔가 크게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웃어 보였다.

“저는 국혼 같은 걸 생각해 본적이 없답니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저는 연인이 있으니까요.”

더는 공작이 허튼 소리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을 잘라냈다.

"뭐? 연인이 있다고?"

“네.”

“맞아요, 아빠. 선배는 연인이 있는데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세요.”

옆에서 눈치를 보던 마리아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연인이 있단 발언이 충격적이었는지 공작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잔뜩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이었단 말이지?"

홀로 중얼거리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더 대화를 이어 가다가는 분위기만 망칠 것을 알았는지 마리아가 급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무래도 이만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또 봐요, 선배!"

“좋은 하루 보내, 마리아.”

마리아는 열심히 손을 흔들고는 가족들과 함께 빠르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헤로니스 공작가의 일원들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그제야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귀찮게 한다."

“그러게나 말이야…. 깜짝이야.

언제 왔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시몬이 내 반응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이랑 대화하는 게 어찌나 살벌한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봐 지켜보고 있었지.”

“그래? 그럼 마지막에 한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 나와 너의 국혼 이야기를 하던데?"

내 말에 시몬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슬쩍 눈을 피했다.

“시몬. 뭔가 알고 있으면 빨리 얘기해 줘.”

“예전에 약혼을 깰 때….”

“깰 때?"

“공작 영애보다 더욱 찬란한 금빛을 가진 아이가 있어서 약혼할 수 없다고 했어.”

시몬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여전히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때는 약혼하기 싫어서 꺼낸 변명인데…. 너도 모르게 너를 판거나 다름없기는 하네.”

나는 시몬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미 10년도 훨씬 지난 일에 대해서 화를 낼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참. 우리 대화를 들었다면 그것도 들었겠네.”

“응?”

"연인 말이야.”

연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시몬이 멈칫하고 굳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씁쓸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활기차게 웃었다.

“라그나르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뭐,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는 했지.”

시몬은 팔짱을 끼고서 섭섭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셋이 친구인데 둘이 연인이 될 수가 있어? 이게 바로 따돌림이라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다 보니까?"

“좋아져서….”

눈앞에 라그나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참 부끄러웠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어하자 시몬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어차피 너랑 나랑은 가족이니까 따지자면 지금은 라그나르가 외톨이잖아.”

“실은 제일 먼저 말해 주고 싶었는데 말해 줄 분위기가 생기지 않아서 늦어 버렸어, 미안해.”

내 말에 시몬 또한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너희를 피하기도 했었고, 요새 바쁘기도 했잖아.”

“그건 그렇지.”

“그리고 정말로 눈치채고 있었어. 라그나르의 불안한 모습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게 보였거든."

그건 처음 듣는 소리라 눈을 동그랗게 뜨니 시몬은 자신만 알 수 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중심가에 평소보다 경비대가 두 배나 되는 인원이 있으니 라그나르를 만나고 오는 건 어때?"

"응?"

"혼자 빈민가에서 외롭게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걱정될 것 아니야.”

시몬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중심가는 황실에 맡기고 라그나 르랑 빈민가에서 단둘이 데이트라도 하고 오라는 친구의 배려를 아직도 모르겠어?"

“그게 뭐야.”

시몬의 농담에 나는 입을 가리며 즐겁게 웃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 * *

'역시 가면은 벗고 올 걸 그랬나?’

나는 얼굴 위에 덧씌워진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빈민가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화려한 조명과 시끌벅적했던 축제에서 벗어난 이곳은 여전히 우울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경비병을 제외하고는 역시나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우선 라그나르를 찾아볼까.'

연락하면 좋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 거리를 둘러보기로 했다.

조용한 거리를 홀로 걷는 것은 무언가 색다른 기분인지라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데 저 멀리 노인 한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며 힘겹게 걸어오는 것에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누군가가 할아버지를 덮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위험해요! 피하세요!"

한 블록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지라 목소리가 제대로 닿을지는 모르겠으나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들린 소리는 내 예상과는 다른 소리였다.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에 나는 힘껏 달려가던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자신을 덮치는 수상한 인물을 향해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두른 것이다.

어찌나 위력이 강력한지 내려친 바닥이 깨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라그나르였구나.'

내 생각이 맞았는지 할아버지는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수상한 인물에게 지팡이를 마치 칼처럼 거침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은 간신히 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 공격을 피하고서 허겁지겁 도

'이상하다?'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 다르게 무겁고, 소심한 움직임이었다.

'라그나르의 형이라면 오히려 맞붙을 텐데.’

설마 공범과 함께하는 게 아니라 흩어진 걸까?

가만히 서서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주변에 있는 경비대원들이 듣기를 바라며 힘껏 소리 질렀다.

"여기 수상한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내 외침에 조용하던 빈민가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두려우면서도 범인이 궁금하기는 한지 집에 틀어박혀 있는 이들이 창문을 열며 힐긋 구경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경비대원들 또한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 이곳으로 달려오는 거센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라그나르를 밀치고서 황급히 내 쪽으로 뛰어 오기 시작했다.

“다프네!”

순간적으로 당황하였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허벅지에 메여 있던 리볼버를 꺼내 들어 쥐었다.

‘이번에는 안 놓쳐..'

범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나는 밀려오는 긴장감을 잠재우며 피하지 않고서 그를 향해 리볼버를 겨누었다.

"비켜!"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방아쇠를 당겼으나 사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나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설마 나를 장애물처럼 뛰어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깜짝놀라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슬쩍 뒤돌아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사내는 다시 힘껏 도약하여 이곳을 벗어났다.

“젠장.”

사내가 향하는 곳은 가면 축제가 한창인 중심가였다.

“괜찮아, 다프네?"

“응. 나는 괜찮은데 저기는 안괜찮을 것 같아.”

걱정할 시간도 부족했다.

사내는 어느새 모습조차 흐릿해질 정도로 멀어져 가고 있었고, 이대로 축제 속 인파에 숨어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다.

오늘을 놓친다면 범인을 잡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내가 뛰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어.’

달갑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라그나르를 향해 외쳤다.

“라그나르! 나를 안고 뛰어!”

"그 말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그나르는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고, 우리는 건물 사이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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