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라그나르는 주변에 있는 건물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지붕을 넘나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 틈에 섞이면 안 돼...
오벤 백작을 현장에서 검거하지 않는 이상 아마 끝까지 억울하다며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다.
'분명 공작의 보호 아래서 어떻게든 죄를 벗어나려고 할 거야.'
나는 귀에 걸린 아티팩트를 두드리고는 곧바로 외쳤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사람을 쫓고 있어요! 짙은 회색 로브를 쓰고 있고, 덩치는 평균보다 조금 작은 남자예요. 오벤 백작으로 추정돼요!”
축제가 시작되기 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모두와 연결해 놓은 아티팩트였다.
아티팩트 너머에서 곧바로 음성이 들려왔다.
-위치는 어디야?
시몬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외쳤다.
“지금 축제 현수막이 걸린 입구를 통과했어!"
-거리에 사람들이 많으니까 주변이 트여 있는 광장 분수대 앞으로 유인해!
눈으로는 계속 오벤 백작의 뒤를 쫓으며 알겠다 답했다.
갑작스럽게 거리에 기사들이 섞여 들기 시작하자 오벤 백작이 당황한 듯 뛰면서도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비켜!"
광장으로 향하는 길을 제외한 모는 길목에서 기사들이 불시로 검문을 하자 오벤 백작은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라그나르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확인하고서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지붕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어머, 저거 뭐예요? 사람인가?”
“사람인데요?”
“뛰어가고 있어요!"
많은 시선들이 우리에게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소란에 오벤 백작 또한 뒤를 돌아보더니 더욱 발에 박차를 가한다.
'네가 아무리 빨리 뛰어 봤자 독안에 든 쥐야.'
어느덧 넓게 트여 있는 광장이 나타났고, 나는 그곳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순간 리볼버를 제대로 쥐었다.
라그나르가 뛰느라 목표물을 포착하기 어렵다고?
'조금 전에 쏜 탄이 어떤 탄인데.’
오벤 백작은 첫 탄을 맞고 내 총이 위협적이지 않다 생각하겠지만 그를 방심시키려는 나의 의도는 모를 것이다.
카롤리나가 새로 개발한 탄은 스치기만 해도 다음 탄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사격으로 이 탄은 완성이 된다.
첫 번째는 표적을 설정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망설임 없이 표적을 향해 명중하는 탄.
“넌 끝이야.”
방아쇠가 당겨졌고, 곧 총구에서 빠른 속도로 탄이 날아갔다.
그리고 정확하게 오벤 백작에게 닿음과 동시에 크게 펼쳐졌다.
“뭐야?”
오벤 백작은 순식간에 거대한 그물에 갇혔고, 당황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로 많은 이들이 감싸고 있는 분수대 앞에서 말이다.
“젠장!”
그의 입에서는 듣기 싫은 비속어가 튀어나왔고, 어느새 기사들이 사람들을 보호하며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됨을 느낀 그가 더더욱 필사적으로 몸부림칠 때.
라그나르는 가벼운 몸짓으로 그의 앞에 뛰어내렸다.
탁- 깔끔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앞에 나타난 발에 오벤 백작이 화들짝 놀랐다.
“두 번은 안 놓쳐.”
기사들 사이로 어느새 환복을 한 시몬이 등장했다.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에 주변이 더욱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고, 시몬은 망설임 없이 그물속에 손을 넣어 로브를 거두었다.
로브가 벗겨지자마자 나타난 얼굴에 주변에서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벤 경?"
마리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희망이라도 되는 양 오벤 백작이 주변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핍박하다니!"
“죄 없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현행범일 텐데.”
라그나르의 목소리에 주변에 싸늘한 침묵이 돌았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오싹함에 입을 다물었고, 오벤 백작은 지지 않고 당당한 얼굴로 라그나르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 그러지?
나는 그저….”
“그저? 어디 계속 말해 봐."
오벤 백작은 라그나르의 시선을 피하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뒤에서 수상한 인물이 쫓아와 도망갔을 뿐이야. 단지 그것뿐인데 갑작스럽게 범인으로 몰아가다니?"
“네가 노인을 덮치려는 것을 보고 뒤쫓았는데 죄가 없다?"
"오해겠지. 나는 그저 도와주려 했을 뿐이라고.”
“웃기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데.”
오벤 백작의 뻔뻔한 목소리에 라그나르의 기운이 점차 사나워졌다.
오벤 백작은 여전히 라그나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애초에 수상한 사람이라면 너희가 제일 수상한 것 아닌가! 대공녀라 한들 전하께서 빈민가에 출입을 금지했는데 그리 당당하게 명령을 거부하다니!"
"......."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오벤 백작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모두를 향해 호소하며 말했다.
“전하, 충신으로서 고합니다! 소문이란 게 괜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으니 소문이 돌겠죠!"
시몬이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자 오벤 백작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소문의 주인공인 대공녀부터 조사를 해 봐야 한다 생각합니다!"
오벤 백작에게 힘을 실어 주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맞아요. 소문은 괜히 도는 게 아니죠.”
목소리의 끝에는 유니스 헤로니 스 공작 부인이 공작의 만류에도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빈민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에게 끔찍했던 지난날을 되새겨 주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악몽을 심어 주고 있죠.”
공작마저 자신의 부관을 편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접 나서다니.
갑작스러운 유니스의 개입에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등장할 시기를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은 못 한 것일까?
언뜻 보았을 때는 당당하게 오벤백작을 감싸 주는 듯했지만, 그의 결벽을 밝히기보다는 소문의 진실 성을 검증하는 것에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저는 그 사건을 해결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전하께 청하고 싶습니다. 혈연에 연연하지 않고 수상하다 생각되는 이들을 거침없이 수사해 주세요.”
"흐음.”
시몬의 침묵에 유니스는 자신의 소문과 걸맞은 다정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애초에 전하께서 빈민가에 대공녀의 출입을 금지하셨잖습니까.
전하께서도 수상히 여겨 그리하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분명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기에 몰래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유니스의 도움에 오벤 백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벤 백작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외쳤으나 시몬은 그저 피식 웃고는 싸늘히 고했다.
“무언가 있다라….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시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출입은 내가 허락했네.”
“예?”
"내가 허락했으니 문제가 없지.
진짜 문제는 자네일세."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분명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내뱉는 멍청한 말에 시몬이 실소했다.
“늦은 밤 오벤 백작 그대가 수상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다.
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규칙적인 발소리가 이곳을 향해왔다.
제복을 갖춰 입은 성기사들이 일련의 자세에 맞춰서 이곳에 온 것이다.
선두에 있는 제복을 차려입은 아빠의 모습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전하의 명으로 황실 기사단과 성기사단의 협동하에 오벤 백작저택을 조사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제보대로 수상한 점이 있었나?"
"예. 오벤 백작의 저택 지하에 과거 빈민가 사건과 같이 끔찍한 고문 현장이 발견되었습니다.”
"무, 무슨 소리야! 아니야!"
아빠는 오벤 백작의 외침에 말을 바꿨다.
“정정합니다. 그보다 더욱 끔찍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사람의 뼈로 보이는 수많은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피가 묻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 더 쉬울 정도로 지독했습니다."
"그리고?”
“시체의 상태를 보아하니 대략 10년 전에 살해당한 이들이 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니야!!”
오벤 백작의 처참한 외침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귓가에는 쨍그랑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상함에 주위를 슬쩍 둘러보는데 더는 내게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없었다.
마치 나를 범인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할 운명이 깨진 것처럼 사람들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10년 전이라니요?"
“그럼 그전부터…?”
“하지만 예전 일은 이미 범인이 잡히지 않았습니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오벤 백작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무언가 잘못됨을 인지한 듯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은 전혀 안쓰러워 보이지 않았다.
“예전 사건의 진범이 프레이르가 아니라면 말의 앞뒤가 들어맞겠네요.”
내가 꺼낸 한마디에 주변이 약속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고, 그것이 악의인지 혹은 호기심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였으니까.
“사람들이 악녀라 부르던 프레이 르 헤로니스, 아니 프레이르 오스왈드 황녀는 혈액 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
좌중에 찾아온 경악.
화려한 축제와 어울리지 않는 소름끼칠 정도의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두근거림에 거세게 뛰고 있는 내 심장 소리였다.
“혈액 공포증이 있는 그녀가 어떻게 많은 이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황실에 저주를 내렸을까요?"
나는 오벤 백작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앞을 막고 있던 이들이 서서히 자리를 비켜 주었고, 그의 앞에 당도했을 때 보인 창백한 낯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벤 백작이라면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내가 어찌 알아!”
"누명일지 아닐지?"
“이 건방진! 이게 바로 누명이란 것이다! 당시 공작 각하와 공작부인께서 진범을 확실하게 잡으셨는데! 애초에 혈액 공포증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겁에 질려 허겁지겁 내뱉는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려 헤로니스 공작 부부를 바라보았다.
“공작님이라면 알고 계시겠네요.
전대 공작 부인께서 혈액 공포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
오벤 백작과 다르게 굳어 있는 표정에는 어떠한 동요함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노련한 귀족다운 모습이었다.
흔들림 없는 모습에 오히려 즐거워졌다.
진실에서 도망치고 발버둥 칠수록 결국 밝혀지는 순간 추악한 모습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 순간이 너무 기대가 되었다.
“혈액 공포증? 그딴 우스운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오스왈드 황제 폐하께 직접 들었습니다.”
다시 찾아온 정적.
황제라는 단어에 공작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전대, 현대 황제 폐하 두 분 모두 프레이르 황녀님의 형제셨으니 모르실리가 없죠. 그리고 그녀의 부군인 공작님 또한 마찬가지고요."
"......"
"모르셨어요? 정말로?"
창백하게 질려가는 낯과 함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3년이나 같이 살았는데?"
하하.
“불쌍한 프레이르, 억울하게 누명이 씌어서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해 비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네.”
작게 터진 내 웃음소리에 공작이 정신을 차렸는지 마치 적을 노려보듯이 살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이런 표정을 지으면 뭐한담.
나는 진작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 한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애초에 네가 무엇이라고 이 상황에 끼어드는 것이냐.”
"내가 누구냐라….”
아주 간절히 바라 왔던 이 순간.
직접 말해 주고 싶어 얼마나 애가 탔던가.
짧아진 해로 인해 평소보다 더 어둑해진 거리.
낮과는 다르게 신비한 보랏빛과 푸른빛이 섞인 조명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프레이르, 나의 친엄마가 자신의 누명이 벗겨지는 이 순간을 지켜보기를 바라며 나는 천천히 가면을 벗어 들었다.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모두를 향해 처음으로 당당히 내 신분을 밝히리라.
"너희들이 악녀라고 칭한 프레이 르의 딸. 그게 바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