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헤로니스 공작 옆에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유니스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공작과 한참이고 눈을 마주쳤다.
보랏빛 조명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금안을 보고 공작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말로 당신은 나를 기억에서 지워 버렸구나.”
“어떻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마치 이곳이 내게 주어진 무대 같았다.
헤로니스 공작 부부가 지금껏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꾸몄던 연극의 연장선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들뜬 가슴을 가라앉히며 마저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모두가 악녀의 딸이니 내가 죽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죽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죽기는 싫었어요."
나는 천천히 말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피한다.
누군가는 진실이 밝혀지는 이 순간을 응원하고 있기도 했다.
아, 역겨워라.
이게 바로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서야 보이는 장면이었더란 말인가.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다가 의문이 들지 뭐예요. 과연 프레이르는 정말로 죄를 지었을까? 그 죽음이 정말 타당한 것일까?"
공작의 굳게 다문 입이 열리는 말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무슨 표정을 짓는지도,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도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그저 해야 할 이야기를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꺼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혈액 공포증이 있다고 하는 것 있죠? 말도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까요?"
"......."
"모르겠지. 그럼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진범은 누구일까?"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웃었다.
"왜 누명을 쓰게 된 걸까?”
차마 웃지 않고는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웃었다.
“누군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뒤집어쓰게 된 거겠지.”
"네가… 내 딸이라고?"
왜 가만히 있나 싶더라니.
내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나 보다.
“헤로니스 공작 각하. 헛소리 하지 마세요. 제 아버지는 오로지 체이너드 대공뿐이니까요."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하였고, 이 정도 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다들 알아차렸겠지.
얼추 상황이 끝났다 생각했는지 라그나르와 시몬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얼굴이 잔뜩 경직된 것이 아무래도 터질 것 같은 화를 참는 것 같았다.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갑자기 주변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오벤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어깨를 치는 것도 거리 끼지 않고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를 뒤쫓으려는 찰나.
"어딜.”
엄마의 손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오벤 백작을 바닥에 거칠게 내리 찍었다.
안면이 바닥에 갈린 것도 모자라 거세게 박혔으니 아마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고작 바닥에 얼굴이 부딪혔다고 순식간에 기절한 모습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엄마는 흥하고 콧바람을 내뿜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신이 덮고 있는 숄을 내 어깨에 걸쳐 주며 말했다.
“네 말을 못 알아들은 멍청이들은 더는 없을 거란다. 그러니 이만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네, 엄마.”
황실 기사단이 기절한 오벤 백작을 끌고 갔고, 아빠는 성기사들과 함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움에 가득 찬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상황을 정리한다.
하지만 기사들이 직접 나서서 정리하려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건네준 숄을 붙잡고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나를 향해 굳은 믿음을 보내 준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 내게 힘을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의 친엄마 프레이르.
모두의 앞에서 나로서 당당해졌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나는 떠나기 전 헤로니스 공작가가 모여 있는 곳을 힐긋 바라보았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공작과 그 자리에 주저앉은 유니스, 카스토르는 멍하니 부모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리아는 넋이 나간 듯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떠나다 말고 다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축제를 즐겨요.”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평상시와 같이 즐기기를.
"언제나처럼.”
어차피 너희는 죄책감 따위 가지.
지 않을 테니까.
그래, 다른 이들의 죄책감은 필요 없다.
이제부터 진짜 죄책감에 시달릴 사람은 따로 있을 테니까.
* * *
오벤 백작이 긴급 체포되고, 모여 있던 사람들도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흩어졌다.
넓은 광장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동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헤로니 스 공작 일가뿐이었다.
마리아는 평생을 살면서 이토록 혼란스러워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지?'
마리아에게 지금 이 상황은 겨우 가라앉은 악몽이 현실로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혹시 연극인 걸까?'
가끔 광장에서 연극이 열리던 것을 생각하면 얼추 그럴싸한 추측이었으나 이것은 연극이 아니었다.
'애초에 선배가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닌걸.’
마리아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가면을 벗고서 시원하게 미소를 짓고 있던 다프네의 얼굴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속 시원하게 오랫동안 숨겨온 진실을 토해 내는 모습.
자신에게 향하는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
기대와 열망이 가득한 그 모습에는 언뜻 희열도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언제나 무표정으로 응대하는 다프네에게서 가장 보고 싶었던 표정 중 하나일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인가.
결국, 마리아의 악몽은 현실에서 실현되고 말았다.
어느덧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고, 그나마 정신을 차린 콘란드가 황급히 유니스와 자신의 자녀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차에 올라탄 후에도 공작 부부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방책을 떠올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충격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멍청한 모습.
'아니, 멍청한 것은 나일지도 몰라.'
마리아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을 뽑자면 자신이라고 크게 소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프네 베네디토, 아니 정해진 대로 흘러갔다면 다프네 헤로니스가 돼야 했을 사람.
콘란드와 유니스는 언제나 서로를 사랑했고, 아껴 주었으며 그들 아래에서 마리아와 카스토르도 행복하게 자라났다.
'하지만 선배는?'
억울하게 쫓겨난 프레이르에게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생활을 했을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심지어 불륜이라는 죄를 지은 자들은 모두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모든 것이 밝혀질 때까지 20년을 가까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 부부에게서 태어난 마리아는 다프네와 친해지고 싶어했고, 거리낌 없이 다가갔다.
자신의 세상을 바꿔 줄 사람이라 생각해 선배라 부르며 그녀를 존경하면서 함께하는 시간을 아껴왔다.
'선배에게 내가 무슨 말들을 했더라..'
- 선배님은 제가 싫으신 거죠?
멍청한 마리아.
많고 많은 질문 중에 왜 하필 그런 것을 물어봤을까.
마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무치는 부끄러움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난 널 좋아하지 않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지.
-넌 잘못한 게 없으니까.
마리아의 머릿속에 자신의 멍청한 질문에 답을 해 주던 다프네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재생되었다.
마리아는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를 떠올리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아는 순진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눈을 반짝였다.
'멋있다고 생각했어.'
당시에는 다프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다만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와중에도 꿋꿋이 자신의 말을 내뱉는 다프네의 모습이 참으로 멋있다 생각했었다.
마치 다프네의 의지에 동조하듯 붉게 물든 석양이 그녀를 비추어주었고, 그녀는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이 빛이 났다.
그리고 마리아는 지금에서야 다 프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
마리아는 다프네를 만나고 나서야 세상을 둘러싸고 있던 거짓에서 깨어나 스스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된 삶에서 깨어났을 때 보인 것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현실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역겹게 엮여서 이미 빠져나오기에는 늦어 버린이 진창 속에서 마리아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차마 고개를 들고서 다프네를 향해 이 모든 것이 사실이냐고 물을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묻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다프네를 보고 눈에 띄게 놀라며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이 사실은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하니 역겨움에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비겁해.'
어떤 수많은 비밀이 섞여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망치는 이 상황은 비겁하다 느껴졌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에 들어설 때까지 변명의 말조차 들려오지 않는 것에 마리아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세요?"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려던 두 사람의 발길을 잡은 것은 마리아의 목소리였다.
헤로니스 공작도 공작 부인도 다 프네의 말에 무어라 대꾸를 하지도 못한 채 상황이 종료되고 말았다.
적어도 자식들에게만큼은 상황에 관해서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잘못했으면 했다, 억울하면 억울하다. 뭐라고 말씀이라도 해 보세요.”
화려한 공작 저.
많은 사람의 응원 속에서 피어난 사랑.
화목한 부부 아래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마리아와 카스토르, 이 모든 것이 부모님이 만든 연극이었다니.
마리아는 자신이 느낀 절망감을 참지 못하고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
“아버지도 어머니도 부끄럽지 않아요? 정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으신 거예요? 제가 아는 부모님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평소의 마리아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언성을 높이자 로비에 모여 있던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숨을 죽였다.
"누님, 아직 혼란스러운 상황이지 않습니까. 상황이 정리되고 난 후에 이야기를 해 보아도…."
“정리? 정리할 게 뭐가 남았는데?"
".......”
카스토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리아의 물음에 목이 막힌 듯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카스토르에게 향한 시선을 움직여 주변에 모여 있는 고용인들을 훑어보다 다시 공작 부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만 창피한가 봐요."
기가 막힌다는 웃음소리 뒤로 이 어지는 지독한 적막.
“선배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를 옆에 두었었네요. 도대체 나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누님, 제발….”
“얼마나 최악이었을까요? 선배는 내게 당당히 누렸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기고 행복마저 강탈당했죠.”
마리아는 자신을 말리는 카스토르의 팔을 내치고 모두를 향해 외쳤다.
“매년 열던 연극은 뭐예요? 새로 돌던 소문은 뭐고요? 도대체 뭐가 그리 당당해서 과시했어요?"
“마리아."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 이에요. 나는 두 분의 잘못을 감싸줄 생각이 없어요."
“마리아!”
참다못한 콘란드가 입을 열었으나 마리아는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죄 없는 이들을 절망 속에 빠트려 놓고 뭐가 그리 당당하세요."
마리아의 대답에 답해 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역겨워요. 이 모든 것이, 심지어나 자신조차 너무나도 역겨워서 미칠 것 같아요."
결국, 악몽이 실현되었다.
아니, 이것은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