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다음 날, 신문에 실린 기사로 인해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어젯밤 현장에 기자가 있었는지 내 말을 토시 하나 빠지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은 기사에 사람들은 분개했다.
지금껏 알고 있던 악녀가 사실은 무고한 피해자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전에 이 잔악한 짓을 한 진범을 찢어 죽여야 한다는 말들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환상 속에서 깨어나 현실을 마주한 사람처럼 이제야 모든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며 공작가에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생겼다.
“진범이 헤로니스 공작의 부관이라더군.”
“애초에 진범으로 몰린 이는 전 처였다지?”
“불륜을 꾸미기 위해서 죄 없는 전처를 범인으로 만든 거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소문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 황실 또한 사람들의 지지에 힘입어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책임을 묻겠다는 뜻을 발표했다.
보통 가면 축제 이후 축제의 열기가 식지 못해 떠들썩할 때는 있어도 이런 식으로 거리가 시끌벅적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충격을 받은 것은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귀족 사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쉬지 않고 올라오는 상소에 시몬이 머리를 부여잡다 결국 그만 좀 하라며 화를 냈다지.
'미안해지는걸.'
정작 소문의 주인공인 나는 아주 평화로웠다.
어제의 일이 끝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간 나는 오래간만에 엄마와 같은 침대에서 단잠을 잤다.
'심지어 꿈에서는.….'
드디어 프레이르의 누명이 풀려서였을까.
생전 꿈속에 등장한 적도 없던 내 친엄마가 꿈속에 나타났다.
꿈속에서의 나는 따스한 햇볕 아래 커다란 나무를 등지고 앉아 친엄마의 무릎을 베고서 잠에 빠져 있었다.
'고맙구나, 다프네.'
괴롭게 공작을 찾던 목소리와는 달리 평화롭고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
수고했다며 부드럽게 도닥여 주는 손길은 오래간만이라 꿈속에서도 단잠에 빠졌었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의 결과가 후련하기는 했나 보다.
잠을 깨우는 새소리조차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대공저 또한 소란스러웠지만, 이제부터는 어른들의 일이라며 부모님이 나선 덕에 오늘 하루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모두의 눈을 피해 잠시 외출을 감행했고, 목적지는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지 않는 보육원이 되었다.
“다프네, 일어나서 점심 먹어야지.”
내 뺨을 쓰다듬는 시원한 손길에 움찔하고 몸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렇게 자고서도 피곤했는지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것이 낮잠 한번 길게도 잤다.
빛에 적응하느라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데 앞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리니 라그나르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라그나르는 뭐가 그리 좋은지 글싱글 미소를 짓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내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촉하고 맞닿는 소리가 부끄러워도 좋아 가볍게 웃고 있으니 그가자느라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 해 주었다.
“잘 잤어?"
“어떻게 자도 자도 피곤한 것 같지?”
“그동안 고생해서 그래. 더 자도 되긴 하지만 밥은 먹고 자자.”
딱히 입맛은 없었으나 라그나르가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왔다며 내밀자 결국 받아 들고는 한입베어 물었다.
“맛있네.”
센스 있게 딸기 주스도 준비해온 것에 감동하여 야금야금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깨끗하게 비었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니 라그나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다시 일 시작해야지. 서류 처리 할 게 은근히 많네."
“방해 안 할게.”
“금방 끝나.”
라그나르는 내 이마 위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말했다.
누가 봐도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지만 일이 미뤄지면 오히려 나중에 더 피곤해질 것이다.
'드래곤이 피곤해지기는 할까?'
잠시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나중에 물어보자며 쓸데없는 생각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좀 더 쉬어.”
"으응, 아냐.”
나는 하품을 하며 누워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두툼한 담요가 스르륵 하고 내려가자 한기가 올라와 살짝 몸을 떨었다.
라그나르가 황급히 자신의 자켓을 벗어 둘러 주려 해 그것을 막고서 탁자에 올려진 신문을 챙겨들었다.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서 가만히 못 있겠어.”
과연 헤로니스 공작가는 어떻게 난리가 났을까.
불안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을까.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은져야 할 텐데.
물론 쉽게 빠져나가게 할 생각은 없다.
역시 얼굴을 보며 직접 대화하며 무너져 가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참을 필요가 있나?"
"당연히 없지.”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뭐든지 걱정 없이 하라는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안 돼. 걱정되니까.”
“일은?”
"너 혼자 보내면 어차피 걱정돼서 손에 안 잡힐 일이야."
그래도 쌓인 서류를 보면 그렇게 쉽게 결정 내릴 일이 아닐 텐데.
기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에 힐긋 하고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니 라그나르가 그 앞을 막았다.
“어차피 드래곤은 1, 2년 안 잔다고 타격입지도 않아.”
“그래? 그렇다면야."
나야 함께 가 주면 든든하고 좋으니 더는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겸사겸사 궁금증이 해결되었네.'
마리아가 건네준 초대에 응할 때가 되었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그가 내민손을 꼭 붙잡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헤로니스 공작저였다.
***
'여기가 헤로니스 공작 저.'
어쩌면 내 집이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저택에 대한 감상은 기대 이하였다.
'대공저가 훨씬 낫네.'
고풍스러운 로비를 지나 안내된 응접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느낀 생각은 참으로 고요하다는 것.
처음에는 내 방문을 막으려 했지만, 마리아가 직접 초대해 줬다는 말에 그들은 내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다지 신기할 것도 없기에 내부를 구경하지 않고 응접실에 가만히 앉아서 마리아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응접실로 찾아온 것은 마리아가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카스토르가 켕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인사를 하자마자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누님께서는 조금 늦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기다릴게.”
이쪽이야 오늘 하루 휴가를 받았으니 시간이야 넉넉하다.
내 답에 카스토르는 불편한 표정과 함께 침묵으로 답했고, 우리 사이에는 묘한 적막이 가득 찼다.
그리고 한 10분 정도가 흐르자 카스토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앞뒤 맥락 따위는 없는 사과.
하지만 이 사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자가 내가 알던 카스토르가 맞나?'
아카데미에서 보았을 적 당당하다 못해 건방지던 모습은 사라진 상태였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그가 얼마나 착잡해 하고 있을지 통감됐다.
그렇기에 나는 마리아 때처럼 말했다.
“네게 받아야 할 사과는 아닌 것 같은데.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 물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가 악녀의 딸로 살아오면서 제일 억울했던 점이니 이에 대해서는 더 듣지 않을게.”
악녀라는 단어에 카스토르의 어깨가 흠칫하고 움직였다.
“애초에 나야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혀 고생하며 살았지만 넌 하룻밤 사이에 그런 소식을 듣게 되었잖아.”
"놀란 가슴부터 추스르라고 하기에는 다음 날 바로 찾아온 사람으로서 조금 양심 없는 조언인가?"
내 물음에 카스토르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카스토르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싶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죄책감을 덜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이렇게 뜸을 들일까.”
카스토르는 다시 망설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어머니의 방에서 이상한 책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름이 적혀 있어 일기장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그럼?”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길거리에 흔한 소설 같았죠. 두 개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부모님께서 등장하셨고….”
카스토르의 말에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서 말해 보라며 그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제 누님과 그쪽….”
카스토르의 시선이 라그나르에게로 향했다.
라그나르는 팔짱을 낀 채로 카스토르를 쳐다보다가 그가 자신을 지목하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
“처음에는 어머니가 자신의 일대기를 글로 쓰신 줄 알았는데 두번째 이야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카스토르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혼란스러운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누님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게 제가 가치 있게 사는 이유라 생각했고요."
나는 답하지 않고 묵묵히 카스토르를 응시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그 책에서 다프네라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었고, 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 책에 나오는 악녀의 딸은 빈민가에서 맞아 죽었다고 했습니다. 짧게 서술되어 있었지만, 똑똑히 기억해요.”
하.
기가 막힌다는 내 웃음소리에 카스토르는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그 책을 잃어버리시고 한참이나 찾았습니다."
“그 책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
“…던전 사태 때 몬스터의 독극물에 던져 폐기했습니다.”
솔직히 카스토르가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지는 잘 몰랐다.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것이 맞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믿기지 않기도 하고.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이 소설의 내용을 나 말고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 해봤는데,
“카스토르, 내게 미안하니?"
“예?”
내 질문에 카스토르가 놀라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일을 이렇게 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 해도 부모님을 배신하는 것 같아 양심에 찔릴 텐데.”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카스토르의 바른말에 오히려 할말을 잃고 말았다.
“부모님은 분명히 잘못한 것을 쉽게 인정하려 하시지 않을 겁니다.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보면 그럴 것이 분명하죠."
죄책감을 운운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답안이었다.
하지만 카스토르의 곧은 눈을 보니 저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식인 제가 나설 때라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불효자라 욕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잘못한 일을 감싸 주는 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누가?"
"누님께서요.”
마리아의 말이 카스토르를 이렇게 바꿔 놓은 걸까.
어찌 됐든 도와주겠다 하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네 어머니를 좀 봐야겠어. 안내해 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