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69화 (169/185)

-제169화.

“어머니를요?"

“적어도 내가 만날 수 있는 자격은 있지 않을까?"

카스토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어머니께 물어보고서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타인을 만날 준비는 해야 할 것 같다며 덧붙이는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설마 아파서 드러누워 있기라도 하니?”

“아프신 건 아니지만….”

카스토르의 망설이는 목소리에 나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억지로 문을 열지는 않을게. 다만 문 앞까지는 같이 가도 되겠지?"

카스토르는 이번에도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망설일 것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마리아는 나올 기미가 없는지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거니 는데도 만날 일이 없었다.

'괜찮은가.’

아무래도 조금 마음이 쓰이는 찰나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 유니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

카스토르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조용한 복도에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울렸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안에 계세요?”

카스토르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유니스를 다시 불러보았으나 여전히 답은 없었다.

“어머니께서 외출하셨나?"

“아닙니다. 마님께서는 식사도 드시지 않고 방에 계신걸요."

문 앞에 서 있는 하녀장에게 물어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안에 있다는 것이었고, 카스토르가 창백한 표정으로 문을 몇 번이고 두드렸으나 역시나 조용했다.

"어머니!”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려도 들려오는 말이 없어 카스토르는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따로 피해 달라는 말이 없었기에 우리는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방안의 광경을 보았다.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유니스는 어젯밤에 보았던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유니스는 미친 사람처럼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펼쳐진 페이지가 잉크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 또한 책만큼 잉크로 뒤덮여 있었지만, 손을 닦을 정신은 없어 보였다.

“저 책이 왜 여기에.…?"

카스토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으면 안 될 것을 본 듯 충격에 빠진 모습에 나는 그를 제치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당황하는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사라졌다는 책이 다시 나타났다는데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유니스는 내가 자신의 앞에 도달했음에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이었다.

방해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손쉽게 유니스의 손에서 그 책을 뺏을 수가 있었다.

“앗!”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알아차리지 못하더니 책이 사라지자 놀랍게도 바로 반응이 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인 켕눈빛 아래 짙은 그늘이 그녀가 어떤 밤을 보내줬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내, 내놔!”

유니스가 냉큼 손을 뻗어 책을 가져가려 했으나 잠을 자지 못해 피로한 몸으로는 나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유니스는 오랜 시간 주저앉아 있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 책을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봄에도 이상하게 눈에 익는 붉은색 표지.

1, 2부의 이야기가 있다고 하기에는 생각만큼 내용이 많지 않아 하루만 투자하면 가볍게 읽을 정도의 두께.

'확실해.’

원작 소설이다.

도대체 원작 소설이 어떻게 유니 스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녀의 손아귀에 이 소설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응?'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책을 훑어보는 도중 어찌나 오랫동안 펴 놓았는지 넘어가던 책장이 자연스럽게 한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처음 보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악녀의 귀환으로 인해 떠들썩해진 빈민가. 악녀와 꼭 빼닮은 외모를 가진 사람이 등장하자 악녀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애초에 2부에서는 빈민가에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고 하지만 처음 보는 문장이란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제일 아래에 적힌 문장을 보고서 나는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야말로 악녀의 확실한 죽음이었다라.”

꽤나 술술 읽히는 문장은 앞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정말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의심이 피어올랐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어?"

라그나르는 내가 가만히 책만 보고 있자 신경이 쓰였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유니스는 라그나르를 보자마자 몸을 파르르 떨면서 자신을 부축해 주는 카스토르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저 초췌한 몸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는지 희번뜩이는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뭐?"

라그나르는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가만히 들어보자..'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를 하고서, 유니스가 계속해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왜 네가 마리아가 아닌 저 여자 애 옆에 있는 거냐고! 왜 악녀의 딸과 함께냐고 묻잖아! 왜! 정해 진대로 흘러가지 않는 거지?”

“어머니!”

유니스가 우리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깜짝 놀란 카스토르가 재빠르게 다시 그녀를 붙잡았다.

“이 책을 읽었었구나. 그래서 상단에 방문했을 때 놀란 거고.”

내 목소리에 유니스가 씩씩거리며 계속해서 우리를 노려보았다.

아니 정확히 나를 노려보았다.

핏발선 눈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카스토르가 붙잡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내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 모양새였다.

"네 탓이었어! 죽었어야 할 악녀의 딸이 살아 있으니까! 마리아가 가져야 할 것을 왜 뺏어 간 거야!

왜 내가 정한대로 죽지 않는 거냐고! 왜!”

유니스는 주변의 시선 하나 신경쓰지 않고 목청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외쳤다.

그리고 나는 그 외침에 섞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네가 정한대로라고?”

“그래, 내가 정한대로!"

유니스는 자신이 지금 무어라 내뱉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카스토르의 표정이 우리와 같이 이상해졌다.

이제야 어질러진 퍼즐 조각들이 제대로 맞추어진 것을 느꼈다.

'오스왈드 아카데미의 교환 학생때도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허락해 줬다 했지.'

그것뿐일까.

상단에 와서 나를 보며 놀랐던 점도, 어젯밤 축제에서 헤로니스공작이 내게 시비를 걸어도 말리지 않고 마치 죄인처럼 내 눈을 피했던 점도.

그리고 지금 라그나르를 향해 망설임 없이 손가락질하며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고 화내는 이 모는 점이 하나로 뭉쳐져 확실한 결론을 만들어 냈다.

"네가 이 소설의 작가였구나."

쿵.

마치 그러한 소리가 내려앉은 듯 유니스의 비명이 멈추었다.

그늘이 가라앉은 듯 어두워진 얼굴, 그리고 사정없이 떨리는 두 눈동자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답이었다.

* * *

유니스의 멍청한 표정을 응시하다가 카스토르를 향해 말했다.

“둘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둘만은 조금….”

"네 어머니도 그게 편할 텐데."

카스토르는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잠깐이면 돼. 둘만 남아야 진솔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가령 이 책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거듭되는 내 말에 카스토르는 여전히 안 된다 주장하였으나 이번에는 유니스가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카스토르, 단둘이 이야기를 하게 너는 나가 있으렴.”

“하지만, 어머니.”

"나가.”

평상시 다정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냉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카스토르는 다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사랑하는 아들의 흐려진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유니스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라그나르, 너도 잠시만 나가 있어.”

“불안한데.”

“설마 여기서 내가 저 여자를 죽이겠어 무얼 하겠어.”

“저 여자가 덤벼드는 선택지는 생각지도 않는구나.”

라그나르는 나를 향해 못 말리겠다는 듯 웃다가 유니스를 향해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날 잘 아는 것 같은데.”

"........"

"만약에 다프네가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라그나르의 눈에 얼핏 살기가 맴돌았다.

"그러니 조심해.”

짧은 경고였지만 공포에 질린 유니스의 얼굴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얘기 잘 하고 나와."

라그나르는 나서기 전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카스토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유니스는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감싼 채 나를 있는 힘껏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작가라면 프레이르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그녀의 누명을 벗겨 주지 않았어?”

“그게 내가 정한 이야기였으니까. 네 말대로 작가인 나는 정해진 이야기대로 흘러가게 할 의무가 있어!”

유니스는 겁에 질려 있어도 지지 않겠다는 듯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죄 없는 프레이르가 가엽지도 않았어?”

“가여웠지. 하지만 어떻게 해?

그건 이미 정해진 흐름인걸."

“네가 바꿀 수도 있었잖아. 소문으로 나를 몰아 죽이려 했던 것처럼.”

유니스는 억울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히며 입술을 물었다.

고생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고운 얼굴이 비참하게 죽어 가던 프레이르와 겹쳐 보이자 불쌍하긴커녕 가증스러워 보였다.

그때 유니스의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는 희미한 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는 물었다.

“그럼 다 알고서 일부러 공작에게 접근했어?”

“뭐?”

갑작스럽게 자신의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유니스는 조금 놀란 듯 말을 더듬었다.

"내가 그랬어? 공작이 좋다잖아!

자기 부인보다 내가 더 좋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잖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터진 기세에 나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내가 당황한 모습에 유니스는 멈추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이 세상이 괜찮다고 하는데 안될 이유가 뭐가 있어."

“뻔뻔하기도 하지.”

“어차피 내가 만든 이야기고, 결국 소설 속 세계야. 가짜 세상 속에서 내 멋대로도 못할 이유가 없잖니.”

드디어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차분하게 나를 타이르는 목소리에 돌려줄 수 있는 것 비웃음뿐이었다.

“그래? 가짜 세계라. 하나만 더 묻자. 당신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는 했어?”

“........

“부정을 저지르면서도 애절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를 받아 줄때 어떤 마음이었어? 이 이야기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그건….”

“프레이르의 억울함을 모른 척한 것처럼 그것도 의무였니?”

다시 프레이르의 이름이 나오자 유니스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딴 게 중요해?""

히스테리가 섞인 외침에 나는 입가를 가리고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중요해.”

“사랑?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정해진 흐름을 따르기 위해서 마음을 받아 준 것뿐이야.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잖아, 그런 가짜 따위를.”

"그렇구나.”

유니스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친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다가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내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는데요, 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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