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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70화 (170/185)

제170화.

헤로니스 공작의 멍청한 표정을 지켜보던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다, 당신이 이 시간에 어떻게…."

유니스는 경악에 가까울 정도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신이 걱정되어서 일찍 돌아왔는데….”

유니스의 충격적인 발언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공작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바빴다.

'운이 좋았네.’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 갑자기 공작이 방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다.

공작의 방과 공작 부인의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몰랐고.

유니스의 뒤에서 조용히 들어오던 공작의 모습에 일부러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운명이든, 이야기 속이든, 혹은 사랑이든.

공작이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한 답은 놀랍게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나는 입을 가려 미소를 감추며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을 꺼내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자리는 피해 드릴게요.”

내가 무어라 말하는 두 사람은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본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엉망이 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파멸을 맞이할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아! 이걸 잊을 뻔했네요."

나는 공작에게 다가가 들고 있는 책을 손수 손에 쥐여 주었다.

'계속해서 잉크를 쏟아붓는 것을 보니 어차피 더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았지.’

애초에 이야기가 바뀌어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기에 딱히 미련도 없었다.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고, 나오자마자 문 앞에서 라그나르와 대치 중인 마리아를 발견했다.

“당장 비켜요.”

“안 된다고 했어.”

두 사람은 내가 나온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선배는 날 만나 보러 왔다고 들었어요. 나도 선배와 할 이야기가 있고, 지금 어머니는 누굴 만날상황도 아니에요.”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으니 조금 기다리는 게 그리 어려운가?”

“선배가 걱정되니까 그렇죠! 누가 봐도 어머니가 지금 멀쩡한 상황이 아닌데!”

“이럴 상황에서 너희 어머니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누굴 걱정하는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도대체 이 둘은 왜 싸우고 있는 걸까.

카스토르는 말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머리를 짚고서 깊게 한숨 내쉬고 있었다.

나는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이 뭐 해?"

“서, 선배!”

"이야기는 끝났어, 다프네?"

아, 조금 전에 했던 말 취소다.

깜짝 놀란 마리아와 다르게 라그나르는 내가 나온 것을 알고 있었는지 여유롭게 인사를 건네었다.

아무래도 일부러 마리아를 도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

마리아의 풀죽은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상태는 카스토르나 유니스와 마찬가지로 지난번 보다 더욱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초대에 응했을 뿐이야.”

"초대…. 아!”

가면 축제가 끝나고 시간이 날 때 찾아와 달라고 했던 약속.

그것을 떠올렸는지 마리아의 얼굴에 희미하게 분홍빛이 서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저, 그러니까 선배…. 저는….”

"아무래도 오늘은 이야기할 분위기가 영 아닌 것 같지.”

“네?”

평소와 다름없는 내 목소리에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집안 분위기가 안 좋은데 손님이 오래 머무는 것도 실례니까.”

"아….”

마리아의 표정이 자꾸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넌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니? 나 때문에 이렇게 집안이 엉망이 되었는데?”

내 말에 마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이 상황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어김없이 보여 주었다.

오늘은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는데 저런 반응을 보아하니 다음에, 만날 때까지 힘들어 할 것이 눈에 보였다.

“선배야말로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선배는 제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었잖아요.”

마리아의 목소리가 울음이 섞이며 미세하게 떨려 왔다.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모른 척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말했잖아.”

"........."

“난 널 좋아하지도 않지만 싫어 하지도 않는다고."

“아…."

내 말에 마리아가 휙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어진 눈가에 고여 있는 눈물이 금방 떨어질 것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울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모습에 나는 어쩐지 안도가 되었다.

‘적어도 이 두 사람은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서 나를 원망한다면 창피함이란 것을 제대로 알려 주려 했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은 정작 죄를 지은 이들보다 죄의 무게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아직도 같아.”

“…뭐가요?”

“너희는 잘못이 없다는 것.”

마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더는 참을 생각은 없는지 한껏 찌푸린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선배는 바보예요.”

“앞으로 더 힘들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생각이라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거든.”

그 뒤로 마리아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었다.

여기서 위로를 해 주어 봤자 눈물은 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면 됐겠지.'

적어도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부끄러움을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상황에 개입하여 나를 막을 생각이 없단 것만으로도 알찬 하루였다.

'아니지. 공작 부부간의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겠구나.'

나오기 전까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두 사람을 떠올리며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감히 행복을 꿈꾸지 말아라.'

너희들의 행복은 이제부터 산산조각이 날 테니 말이다.

* *

“전대 공작 부인의 억울함을 규명해 달라는 상소가 끊이질 않는 단 말이지.”

콘란드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시몬을 향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황실 또한 이 일을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단 걸 전하기 위해 그대를 불렀다네.”

"......."

“민심 또한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공작이 어련히 잘할 것은 알고 있다만 내가 걱정되어서 말이야.”

“전하."

콘란드는 자신의 앞에서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저 젊은 황태자를 가만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지금이 기회라는 듯 이리저리 날뛰는 저 어린 황태자의 표정을 잔뜩 구겨 버리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 사건에 얽혀 있는 또 다른 존재를 언급하였다.

“정말로 프레이르에게 누명을 씌운 자가 저라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아니면 누구겠나.”

“공범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가령...”

“황실이라든가?"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표정이 구겨진 것은 시몬이 아닌 콘란드였다.

콘란드가 예상치 못한 답에 놀란 반응을 숨기지 못하니 시몬은 우습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공작.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게.”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하지요.”

콘란드는 다급한 표정으로 시몬을 재촉하였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우선 사과가 우선이지 않나? 그 대들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힘든 삶을 살아온 그 아이에게?"

“알고 계셨던 것인지 물었습니다!”

“공작. 감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거지?"

시몬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졌다.

“그대의 건방진 행실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일세."

“전하.”

콘란드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우선 수도에 아니 제국 전체에 퍼진 이 소문을 바로 잡아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손가락질당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공작이기 전에 한 집안의 가장이었기에 이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이 억울한 소문을 잠재우실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공작. 내가 살면서 그대와 같이 뻔뻔한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

시몬은 노골적으로 피곤하단 티를 내며 미간을 문질렀다.

“애초에 그 여자는 무언가 수상합니다. 눈은 황금색이라고 하나 전하께서는 보지 못하셨겠지만, 프레이르와 머리색이 다릅니다.

프레이르는 보라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시몬이 거칠게 책상을 내려쳤다.

어찌나 거세게 내리쳤는지 부딪힌 소리가 귓가에 남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다프네는 어릴 적 죽을 만큼 크게 다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가 새하얗게 바랬다. 일곱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말이야.”

“적어도 그대가 어린 그 아이를 거두었다면 그럴 일은 겪지 않았을 아이에게 뭐? 수상해?"

시몬은 마음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품위 없게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콘란드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내리꽂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몬은 숨을 천천히 고르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공작을 응시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시몬의 나지막한 충고에 콘란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충고를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모욕을 입은 표정을 짓는 것에 시몬은 짧게 혀를 찼다.

“이만 나가게.”

명백한 축객령에 콘란드는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 * *

콘란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공작저로 돌아왔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자 해도 밖은 이미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았고, 적어도 지금은 가족의 곁에 있고 싶었다.

“마리아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가족인 이상 팔은 안으로 굽게 되어 있는 법.

마리아가 울면서 콘란드와 유니 스의 행적이 창피하다 외쳤지만 결국에는 부모의 편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더 노력해야겠군.'

다음에는 황태자가 아닌 황제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

적어도 무언가 해결 방법은 주리라 생각하며 오늘은 이만 쉬자는 결론을 내려 저택으로 들어선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일까.

집사장이 무어라 떠든 것 같기는한데 복잡한 머릿속에는 아무런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콘란드는 그저 자신의 아내인 유니스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불안에 떠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 단순히 그랬을 뿐이었는데.

“진짜로 사랑할 리 없잖아, 그런 가짜 따위를.”

다프네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유니스는 더는 콘란드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험악하게 구겨진 미간과 징그러울 정도로 붉게 충혈된 눈.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느라 크게 벌어진 입과 분노로 달달 떨리고 있는 몸까지.

악을 쓰고 있는 초췌한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유니스가 아니었다.

'저 표독스러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지독한 환상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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