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헤로니스 공작저에 방문한 이후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귀찮게도 자꾸 공작에게서 연락이 왔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만나는 것을 왜 제멋대로 정하려 한단 말인가.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공작은 끈질겼고, 계속 서신을 보내면 보낼수록 내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오죽하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공작에게서 온 편지를 벽난로에 넣어 불태우는 일일까.
“이젠 눈치도 안 보는 건가?”
자꾸만 공작 저에서 사람을 보내오는 통에 아빠가 버럭 소리를 질러 내쫓은 것은 또 이야깃거리가 되어 거리에 널리 퍼졌다.
창피한 줄 모르는 행동이라며 떠다니는 소문을 들으니 꽤나 유쾌했다.
하지만 나로 인해 가족들이 피곤해 하는 것을 더는 보고 싶지 않기에 슬슬 저택에서의 휴식을 끝내고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오스왈드는 조용하니 좋네요."
가면 축제 이후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푸념하듯 꺼내 놓으니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오스왈드로 왔던 거구나.”
나는 인자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라몬트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나섰다는 소식은 들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깬 것은 라몬트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땠어요?”
“말해 뭐 하나. 아주 훌륭했지."
내가 활짝 웃자니 라몬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위험했어. 직접 나서는 것도 좋지만 언제나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다정히 타이르다가도 어느새 따끔히 꾸중하는 외숙의 모습에 나는 착한 조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에서도 정식으로 클레멘스 황실에 서신을 넣었단다.”
"네. 시몬에게 들었어요."
돌아온 답변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공작이 직접 찾아올 모양이더구나.”
“그래요?”
라몬트는 공작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불쾌해 보였다.
“넌 신경 쓰지 말아라. 귀찮은 어른들의 일은 내가 하는 게 맞지."
“그럼 저는 뭐를 할까요?"
“푹 쉬다가 가야지.”
“그럼 그럴까요?"
오스왈드가 클레멘스 보다 추운 탓인지 오늘따라 더욱 맛있게 느껴지는 과일차를 한 모금 넘기며 슬며시 말을 던졌다.
“수도로 올라오는 길이 많이 변했더라고요.”
“그래?”
"네. 예전과 다르게 정말 살기 좋게 변했어요. 겨울이 다가오는데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하던걸요.”
건국제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몇 년 전에도 볼 수 없었던 기대감이 가득하였다.
"다 외숙부께서 신경 써 주신 덕이죠. 쉽지 않으셨을 텐데. 외숙부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다 네 덕인 것을."
내 칭찬에 라몬트는 기분 좋은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신기하다..'
따스한 온기가 머무는 방에서 라몬트와 함께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날이 올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그래서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한다고?”
“곧 건국제 기념 파티가 열리니, 까 그전까지 오빠들이나 보고 올까 싶어요. 외숙 말씀대로 친구들도 보고요.”
나는 말을 내뱉고서 아차 싶어 바로 철회했다.
"아니다. 오빠들은 매우 바쁘겠네요.”
“그렇지.”
“외숙도 바쁘시겠죠? 저 계속 여기 있어도 될까요?”
“심심한 외숙과 함께 식사라도 해 준다면 외숙은 참 고마워할 게다.”
라몬트는 자신을 3인칭으로 가리키며 마치 다른 사람을 칭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의 농담이 답지 않아 귀여워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당당하게 즐길 수 있는 평화였다.
* * *
화려한 황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울한 지하 감옥.
콘란드는 자신의 부관인 오벤 백작을 만나기 위해 홀로 지하 감옥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불쾌함이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본 간수들은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콘란드는 며칠째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다프네가 그렇게 떠난 후 공작부인의 침실에는 훌쩍이는 소리만 가득하였다.
유니스는 어쩔 줄 몰라하며 눈물만 흘려 대었고, 변명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조금 전 보았던 포악한 모습은 사라지고 콘란드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콘란드는 그의 눈을 가렸던 애정이 사라지자 유니스가 조금도 안쓰럽지 않았다.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해.'
그래서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콘란드는 재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뒤 유니스가 건너오지 못하도록 방에 연결된 문 또한 잠갔다.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고,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이가 주고 간 책을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프네가 건네주고 간 책을 전부 읽었을 때.
콘란드는 세상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책은 아녀자들이나 읽는다고 생각하던 연애 소설이었으나 등장인 물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콘란드 본인마저 이야기에 잘 녹아 있었으니까.
'만약 이 책에 쓰인 대로…. 그 아이가 말한 대로 모두 정해져 있었던 것이라면 ..….'
콘란드와 유니스의 사랑 또한 정말 정해진 것이었을까.
콘란드는 유니스를 사랑했고, 유니스는 콘란드를 사랑했다.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용솟음치듯 거칠게 휘몰아치는 감정이 정말 그걸 바라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젠장맞을.'
콘란드는 일이 풀리기는커녕 복잡하게 얽히고 있자 날뛰는 제 감정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황제를 만나지 못했다.
황태자는 시끄러운 이 상황을 해결할 방책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유니스는 도움이 안 돼.'
콘란드는 밀려오는 짜증에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외부에서 활동을 못 한다면 공작부인으로서 집안의 분위기라도 다 잡아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 그녀는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다프네라고 했었던가.'
콘란드는 자신과 프레이르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떠올리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든 상황을 격파해 나가고 싶었지만, 다프네는 콘란드를 만나 주지 않았다.
아니 무시한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외모는 프레이르를 닮았지만 당당한 성격은 나를 닮은 것 같군.'
제길! 공작 저에 왔을 때 붙잡았어야 했는데..
다시 떠오른 그날의 기억에 콘란 드는 지하 감옥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환상 속에서 깨어나 처참하게 현실로 내던져진 기분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일으켜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콘란드는 꼴사납게 묶여 있는 모제스를 보며 혀를 찼다.
"정도껏 했어야지.”
애초에 모제스가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추문에 휩싸일 일도 없었을 텐데, 콘란드는 그러한 아쉬움을 참고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공범이 누군가.”
"......"
“공범이 누구냐 물었어, 백작, 정말 직접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 이가 너인가? 아닐 텐데.”
적어도 공범이 누구인지 밝혀진다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콘란드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모제스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게 내가 그대의 죄를 묻어줬을 때 그만뒀어야지. 한동안 잠잠하더니.”
“…역시 알고 계셨군요.”
“부인이 피를 무서워하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닌지라.”
콘란드는 밖에서는 쉽게 할 수 없던 이야기를 술술 뱉으며 모제스를 노려보았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였지. 갓 공작 저에 들어온 녀석이 이만 물러가라 해도 끝까지 남아 일을 하는 모습이 신기하다 했어.”
"푸흐흐. 그러셨습니까."
모제스의 힘없는 웃음소리에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범을 밝히게. 그렇다면 황제폐하께 청해 적어도 사형은 면하게 해 줄 테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이것은 콘란드가 모제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그게 가능은 하답니까?"
“그분 또한 이 사건을 어느 정도 묵인해 주신 것에 책임을 물으면 그 정도는 가능할걸세.”
모제스는 콘란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뱀이 기어 다니는 것과 같이 서늘한 눈빛이 모제스를 훑었으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것보다 더 뱀 같은 사내도 만나 봤던 것을.'
모제스는 제 처지를 비관하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제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이 끝임을 짐작하고 있는 듯 체념 가득한 모습이었다.
“제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걸 묻는 것을 잊었군. 그래, 이러한 일을 벌인 이유가 뭐지?”
참으로 늦은 질문이었고, 마지못해 꺼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모제스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기에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도와주면 저를 정식으로 오벤 백작 자리에 앉혀 주겠다 약속했었습니다.”
"누가?”
“누구긴요. 공범이지.”
사생아로서 부모에게 인정받지도 못한 채 노예로 팔린 곳에서 구원을 만났었다.
모제스는 자신의 인생이 바뀐 그날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 배다른 형제들을 나 대신 모두 죽여 줬고, 아버지는 나를 데려가 후계자로 앉혔지요.”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바뀌게 해준 고마운 은인.
비록 살육에 미친 놈이라 할지라도 모제스는 베르돌트를 배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금기가 걸려 있어 그분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못하는 것을.'
모제스는 슬쩍 콘란드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콘란드는 모제스의 말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정말 그 아내에 그 남편이구나.
모제스는 이 순간마저 자신이 살아날 구멍을 찾아내려는 콘란드의 모습에 미소를 감추었다.
“그것 아십니까? 공작 부인 말입니다.”
“…그녀가 왜?"
“그분 또한 프레이르가 진범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콘란드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혹시 이 녀석도 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가?'
“프레이르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지하실을 꾸리는 것을 그녀가 보았거든요.”
“그분은 공작님의 상상만큼 순진 하고 자애로우신 분이 아닙니다."
콘란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 상태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모제스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다시 처음과 같이 입을 꾹다물었다.
더는 말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콘란드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옥에 들어설 때보다 나갈 때 더 불쾌함이 가득 차올랐다.
콘란드는 또다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유니스의 모습을 알게 되어 머리가 아팠다.
적어도 유니스는 프레이르가 진범이라 믿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서도 모른 척을 한 것이었다니.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 또한 꾸며진 것이었을까. 정말로 모든 것이 가짜였을까.'
콘란드는 복잡한 마음에 짜증을 섞어 바닥을 찼다.
아무리 날고 뛰어도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
'다프네라고 했던가. 그 아이를 만나 봐야겠어.'
콘란드는 흐릿한 기억을 뒤져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꼬마 아이를 기억해냈다.
‘적어도 내가 친아버지인 이상 끝까지 미워할 수는 없겠지.'
혈연이란 그런 것이니까.
콘란드는 가볍게 생각을 정리했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설마 다프네가 오스왈드로 훌쩍떠나 버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