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오스왈드에도 소식이 전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널리 기사가 잘 퍼져 있는지는 몰랐다.
"너, 너! 황족이었어! …요!"
황실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을 뿐인데 근처를 돌아다니던 글렌공작과 만났다.
만난 것도 모자라 삿대질을 하며 경악하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뒤늦은 반응에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아, 아니. 말을 안 해 줬는데 어떻게 알겠냐.”
"알겠습니까….”
렉시우스의 말에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고 말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렉시우스는 어리숙한 모습을 던지고 이제 제법 공작 태가 났다.
내 시선이 다쳤던 다리로 향했고, 렉시우스가 시선을 느끼고서 나를 따라 하듯 피식 웃었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후유증은 없나요?"
“가끔 좀 관절이 뻐근할 때가 있긴 한데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닙니다.”
렉시우스의 말처럼 확실히 걸음걸이에 큰 이상이 없어 보여 한시름 덜었다.
"근황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카롤리나랑은 언제 만날 생각입니까?”
“카롤리나요?"
“오스왈드에 온 뒤로 폐하를 제외하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꽤 서운해 하는 모양인지라….”
렉시우스는 자기 동생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퍽 어색한지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무도 안 만나려는 건 그냥 쉬고 싶어서였고…. 카롤리나가 왔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었을 텐데."
내 혼잣말에 렉시우스가 갑자기 나를 잡아당기더니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로 나를 끌고 갔다.
“쉿.”
그러고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목소리를 죽였다.
렉시우스와 함께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슬쩍 시선을 던지니 반갑지 않은 인물이 보였다.
“헤로니스 공작이네."
내 무덤덤한 반응에 렉시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프레이르 황녀님 사건과 관련해서 직접 사과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직접 황실에 찾아왔다 들었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쪽도…. 아니, 대공녀도 함께 만나 뵙기를 청한다 들었는데, 저자 때문에 모든 약속을 피하는 것이 맞습니까?"
그 말이 정답이라는 듯 조용히 웃자 렉시우스가 헤로니스 공작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 카롤리나도 방문하는데 눈치를 본 모양인 것 같군요."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러죠.”
짧은 대화를 마치고 더는 숨어 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우리는 나무 뒤에서 빠져나왔다.
“다프네….”
다만 나오자마자 이곳에 있어서 안 될 의외의 인물을 마주치고 말았으니.
‘깜짝이야.’
라그나르가 답지 않은 초췌한 낯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 *
“하루라도 일찍 도착하기 위해서 날아왔다고?”
"내가 안 오면 다른 사람이 네 파트너를 할 테니까. 아니, 누군가가 네게 파트너 신청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라그나르는 작은 목소리로 죽어도 그 꼴은 못 본다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렸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잘 들렸지만,
“피곤하겠다. 조금 더 쉬는 게 좋겠는걸.”
라그나르는 내 무릎에 고개를 묻고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피곤한지 목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갯짓만 하는 것에 나는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그런데 날아오는 게 가능한가?'
생각해 보면 드래곤이니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궁금하네.’
라그나르의 머리칼을 슬슬 쓸어 넘기고 있는데 톡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게 뭐야?"
엄지손톱 크기의 무언가는 돌처럼 딱딱했는데 신기하게도 은은한 검은색 빛이 흐르고 있었다.
매끈매끈한 느낌이 기분이 좋아 계속 만지작거리니 무엇인지 얼추알 것 같았다.
"비늘?"
"아.”
내 목소리에 라그나르가 슬쩍 눈을 뜨더니 비늘을 확인하고서는 수줍게 웃었다.
"맞아. 본체로 날아와서 그런가?
왜 떨어진 거지?"
라그나르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작게 웃자 나는 묘한 표정으로 비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익숙한 기분이 든다 했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냈다.
“장갑.”
“응?”
“네가 선물해 준 장갑이랑 비슷한 느낌이 나.”
내 말에 라그나르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더니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눈썰미 좋네. 괜히 상단주가 아닌가 봐.”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라그나르가 부끄러운 듯 말을 덧붙였다.
“사실 장갑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어.”
“비밀?”
숨겨진 것이 있다고 하기엔 지금껏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잘썼었는데.
“자신의 비늘로 만든 물건을 선물하는 게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거든.”
"아니라고?"
“쉽게 말하자면 구애 행동이지.”
깔끔한 설명에 나는 한 번, 두번 연이어서 눈을 깜빡이다가 깨달아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걸 선물해 줄 때 표정이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지.'
라그나르는 내가 모르게 정말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구나.
'그럼 뭐 해. 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덥석 받아 버렸는데.’
노력은 가상하나 구애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큰 소득이 없었기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라그나르의 손에 비늘을 쥐여 주었다.
“그럼 이제 의미를 알았으니까 제대로 만들어 와.”
“어?”
“이번에는 구애 행동인 것 알고서 받아 줄지 말지 결정할 거니까.”
내 말에 라그나르는 보기 드물게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 손에 올려진 비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문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바라며 나는 가볍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나 네 본래 모습이 너무 궁금해.”
"드래곤이니까 역시 엄청 크겠지? 보고 싶다.”
라그나르는 답이 없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는데 기분이 나쁜 것인가 싶다가도 붉게 물든 귓가가 보여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중에 보여 줄 거지?"
“기회가 된다면.”
결국, 라그나르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와 동시에 내 허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숙여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귀여운 행동에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꺄르르 웃었다.
어느 누가 드래곤이 이렇게 인간의 품에 안겨서 애교를 부릴 것이라 생각할까.
‘평범한 인간…..'
생각해 보니 나는 인간이고 라그나르는 드래곤이었기에 종족을 초월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라그나르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게 되는 걸까?'
나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라그나르의 이마를 살살 쓸어 주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이 끝나면 대부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처음에는 라그나르만 보낼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라그나로, 이번에 대부를 찾아 갈 때 나도 함께 가도 돼?"
"가는 건 상관없지만, 길이 험할 텐데.”
“적어도 네 대부시니까 한번 뵈어야 할 것 같아서."
아마도 라그나르의 대부는 드래곤의 반려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야.'
지금껏 나와 반려라는 단어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머릿속에서 지운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겸사겸사 어떤 분인지도 좀 보고’내가 모르는 라그나르에 대해서 알려 주지 않을까?
조금 기대가 되었다.
* *
“와, 화려하네.”
“그러게.”
라그나르의 드문 감탄에 나 또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왈드 수도에는 원래 항구가 있었다고 했으나 에버하르트 때 상업이 죽으며 폐쇄가 되었었다.
라몬트는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수도 근처의 솔틴 항을 다시 개방하였고, 그 기념으로 건국제의 축하연을 이곳에서 연다고 들었다.
마탑과 연금탑과의 협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오스왈드 제국은 여전히 강대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 개항된 항구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거대한 선박이 놓여 있었고, 배의 넓은 갑판에서 축하연이 열린다고 들었다.
나는 라그나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고, 어디선가 느꼈던 기시감을 다시금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외숙이 막 황제가 되었을 때가 생각나는걸.’
그때는 갑작스럽게 라몬트가 춤을 청해서 시선이 집중되었으나 이번에는 돌고 있는 소문이 있으니 시작부터 이런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았다.
간간이 보이는 익숙한 인물들은 오스왈드의 사람들일 테고, 낯선 자들은 아마도 타국에서 초청된 귀빈들일 것이다.
“귀찮은 것들 다 막아 줄게.”
라그나르의 말에 나는 고맙다며 살짝 웃고는 아무도 모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시몬이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하니 라그나르 또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
그러다 짜증을 담은 목소리로 내 앞을 막으려고 하여 슬쩍 그쪽을 바라보니 헤로니스 공작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대화라도 하려는 건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찰나 누군가가 공작을 잡아 세우는 것을 보았다.
“시몬?"
시몬은 평소와 같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헤로니스 공작을 붙잡고 있었다.
공작이 주춤하며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도 시몬의 입 모양이 잘 보였다.
'소란 피우지 말게.'
짧은 경고에 공작의 몸짓이 굳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짓하는 것이 아무래도 공작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할 겸 온 것 같았다.
“공작 때문에 시몬이랑 인사도 못 하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야.”
라그나르마저 헤로니스 공작을 향해 혀를 찼다.
시몬의 경고에 기가 죽은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주변 시선을 신경쓴 것인지 그쪽이 잠잠해졌다.
인사는 다음에 하기로 하며 아쉬움을 달래는 찰나 드디어 연회의 주인공이 들어섰다.
라몬트는 높은 곳에서 갑판에 모인 이들을 내려다보며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회에 자리해 주어서 다들 고맙네.”
짧은 말로 시작된 인사는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고, 인사말을 가볍게 흘리며 샴페인으로 마른 목을 축이니 어느새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있는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게 있다네.”
알리고 싶다는 것.
그 한마디에 주변 사람들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나와 관련된 이야기고 내 신분을 못 박아 줄 생각이겠지.
이 정도야 예상했기에 쏟아지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몬트를 올려다보았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똑바로 나를 찾는 것이 참 신기했다.
이것이 혈연의 유대감이라는 걸까.
시답잖은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짓는데 라몬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근엄한 표정을 지우고는 가볍게 웃었다.
다만 다음에 꺼낸 말은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 프레이르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해서 오스왈드황실 측은 그간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크게 통탄했다네.”
그저 내 소개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한 직설적인 말에 훈훈히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무엇보다 형벌을 내린 클레멘스황실에서조차 어떠한 연락도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지.”
주변이 얼어붙었다.
“그건 내 누이의 남편이었던 공작 또한 마찬가지일세. 오히려 누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바.”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보이는 짖은 노기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오스왈드는 프레이르와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확실한 책임을 묻도록 하겠네.”
라몬트의 시선이 시몬과 헤로니 스 공작에게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냉정한 시선과 함께 나온 말은 주변을 경악에 빠트리고 말았다.
“전쟁이 불가피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