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전쟁을 감수하더라도 오스왈드황실의 체면을 살릴 것이며, 프레이르의 죽음을 잊지 않을 것이라는 라몬트의 말.
그 말에 갑판이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클레멘스 황실에도 헤로니스 공작가에도 오스왈드 측에서 끊임없이 압박하겠다는 소리였다.
비록 선대 황제인 에버하르트의 집권 아래 이루어졌던 일이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오스왈드가 침략 전쟁에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선박만 보아도 오스왈드가 마탑과 연금탑의 힘까지 빌릴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두 탑주가 내 형제니 클레멘스 황실이 그들을 회유하지도 못할 것이다.
'어른이 해결할 일이라 한 것이 이거였나.'
나는 오히려 복잡한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규모가 너무 커졌는데.”
“잘된 일이야. 이 정도로 선언해야 저쪽도 더 애가 탈 테니까.”
라그나르의 말은 정확했다.
헤로니스 공작의 경악 어린 표정은 멀리 있는 이곳에서도 아주 잘 보였으니까.
그와 함께 그의 옆에 서 있는 시몬의 얼굴 또한 아주 잘 보였다.
금방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갈무리했지만 우리의 눈에는 순간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이 읽혔다.
'망했네.’
금방이라도 욕을 뱉을 듯한 표정이었다.
라몬트는 모두가 충격에 벗어날 틈도 주지 않고 편히 연회를 즐기라며 자리를 벗어났다.
시몬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뒤를 따라갔고, 공작 또한 정신을 차리고서 시몬의 뒤를 쫓았다.
연회 또한 분위기가 주춤하는 듯 싶었으나 관련 인물들이 떠남과 동시에 준비된 오케스트라단의 연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떠들썩해졌다.
가십을 씹으며 즐기는 이들이 이렇게 재미난 일들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조금 전 일에 대해 떠들며 그들답게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소문은 점차 부풀려지고 또 새로운 소문을 만들겠지.
그러한 이들과 더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내게로 오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카롤리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힐끔 힐끔 관심을 던지다 카롤리나를 보고 발걸음을 돌린다.
“카롤리나.”
“왜 부르셔?”
짐짓 퉁명한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편히 말을 놓는 것 같다가도 올려 부르는 애매한 말투에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스왈드 반응은 어때?"
“물을 필요가 없죠. 괜히 폐하께서 저러한 결단을 내리셨겠어요?
다들 공분해서 헤로니스 공작을 원수 보듯 보는 게 뻔히 보이는 걸.”
“그렇구나.”
이것이 당연한 반응이다.
적어도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기분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탓일까.
긴장이 풀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친 숨이 토해졌다.
“후작 부인께서 애써 주셨죠. 기사를 보면서 제가 다 억울해 눈물흘릴 뻔했다니까요.”
아마도 디미트리 후작 부인을 말하는 것이겠지.
신문에 어떻게 실렸는지 살펴본다는 것이 쉬느라 보지도 못하고 나온 게 아쉬웠다.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후작 부인과 눈을 마주치자 그녀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녀 나름의 프레이르에 대한 속죄이리라.
그럼에도 고마운 것은 어쩔 수 없기에 나 또한 그녀에게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부디 이 일로 후작 부인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며.
*
오스왈드의 건국제는 일주일 동안 아주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나야 첫날만 참여했기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직접 보지 못하겠지만, 첫날보다 더 화려하면 화려했지 덜하지는 않다더라.
건국제가 끝나기 전에 클레멘스로 돌아가는 것은 아쉬웠으나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베르돌트를 붙잡기 위해서라도 그가 이러한 사건을 저지른 의도를 알아내야 했다.
그쪽이 잠잠한 틈을 타 이쪽도 잠시 휴식을 취했지만, 언제까지고 쉴 수도 없는 법.
축제가 끝나기도 전에 떠날 준비를 하니 라몬트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며 나를 붙잡았다.
“좀 더 쉬다 가지 않고."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공범이 남아서 그를 잡아야 하거든요.”
"아직도 위험한 일이 남았더냐.”
내 말에 라몬트가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그의 표정에 스민 걱정에 나는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의심되는 자는 있고?”
"네. 그런데 심증뿐인지라 증거를 잡기 위해 조금 더 바삐 움직이는 것뿐이에요. 도움 주실 분도 계시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믿을 만한 자더냐?”
라몬트는 걱정이 끊이질 않는지 자꾸만 속속히 떠오르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묻는 족족 내가 아는 대로 대답해 주다 이번에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그나르의 대부세요. 걱정할 만한 분도 아니고, 위험한 분도 아니에요.”
그 말에 라몬트의 눈빛이 변했다.
나를 향한 눈빛이 애정이 가득한 가족의 눈빛이었다면 이번에는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는 약탈자라도 보듯 라그나르를 흘겨보았다.
“그래? 난 저놈도 믿지 못하겠다만.”
목소리가 의미심장하다.
라몬트의 심상치 않은 기세와 다르게 라그나르는 퍽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 뵐 때 소개하지 않았습니까. 다프네의 약혼자라고.”
라몬트가 반란군일 때 만들었던 위장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연히 거짓인 줄 알았는데.”
“거짓이라니요. 약혼이라는 인생의 중대사에 대해 함부로 거짓을 고할 만큼 뻔뻔한 자는 아닌지라.”
'지금도 충분히 뻔뻔해 보이는데.”
라몬트는 여전히 라그나르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라그나르의 눈빛 또한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 가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것 같은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것은 내 착각이겠지.
'라그나르 정도면 괜찮아 보인다 했으면서.’
이번 건국제에서 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끝마치고 급히 달려왔다는 말에 라몬트는 라그나르가 내 짝으로 나쁘지 않다 말했었다.
라그나르도 황실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이들이 내게 극진히 대하는 것을 보며 라몬트가 신경을 많이 썼다며 꽤 괜찮은 외숙이라 칭찬하였었다.
정작 뒤에서는 서로를 칭찬해 놓고서는 앞에서 이리 신경전을 벌이다니.
"고자 이런 놈이 네 약혼자 행세를 하는 것을 다른 가족들이 알고 있기는 하느냐?”
라몬트의 말에 라그나르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주변 신경을 쓰지 않는다지만 아무래도 부모님이나 오빠들의 경우는 다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얼추 이번 일은 라몬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나도 아직은 가족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토해 낼 생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조금 더 머무르다 갈게요. 심술부리지 마세요.”
“심술은 무슨.”
라몬트는 기세등등하게 승리자의미소를 지었다.
“다프네가 남는다는 것은 저도 남는다는 것이니 남은 날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기 싫었는지 라그나르가 한마디 더 얹는다.
다시 라몬트의 눈이 세모꼴로 바뀌었다.
나는 나를 두고서 유치하게 구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흔들었다.
* * *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해.'
콘란드가 남기고 간 말에 유니스는 또 다른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혹시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하지?'
콘란드는 유니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콘란드의 눈빛은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애정이 담긴 눈빛이 아니었다.
유니스는 콘란드의 눈에 담긴 낯선 혐오의 감정에 몸서리치며 홀로 흐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어디서도 답을 구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조언이라도 해준다면 자존심을 다 굽히고 받아 들일 생각이 있음에도 자신을 도와주는 이 하나 없었다.
헤로니스 공작 부인이라는 위치에 하이에나처럼 눈을 빛내던 사교계의 사람들도 이제는 그녀를 못 본 체하기 바빴다.
아니 못 본 체할 뿐만 아니라 질나쁜 소문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비웃고 떠들었다.
그 누구도 유니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고, 그것은 그녀가 창조한 등장인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콘란드뿐만 아니라 유니스가 배아파 낳은 마리아와 카스토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니스는 자신을 못 본 척하는 둘에게 부디 힘이 되어 달라 애원하며 매달렸으나 그들은 난감한 표정을 하면서도 냉정히 부탁을 거절했다.
'제발 제가 더 이상 엄마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해 주세요.'
'어머니. 죄는 피한다고 해서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올바른 선택을 내려 주세요.'
마리아와 카스토르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나니 유니스는 더는 용솟음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앞에 쌓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던지고, 깨부수고.
씩씩거리며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나서야 번뜩 든 생각은 마치 이 방의 풍경이 자신과 다를 것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흐으윽.”
유니스는 마치 모든 것이 박살난 그날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트렸다.
듣기만 해도 서러움이 넘치는 울음소리에도 그 누구도 유니스를 위로해 주지 않았다.
'나를 위한 세상이잖아.'
자신의 손에 의해 탄생한 자들이라면 적어도 제 편이 되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유니스는 어째서 자신이 만든 세상이 자신을 버리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울고, 소리쳐도, 책에 잉크를 들이부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기에 돌아갈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유니스는 홀로 중얼거렸다.
"아직,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거야.”
어떤 기회는 찾아내서 반드시 잘못 써 내려가고 있는 이 이야기를 바꿔야만 했다.
그러한 유니스의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그러게 후회할 수도 있다 했잖아.”
유니스의 귓가에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무너져 가는 것이 재미있는지 조금은 흥미가 섞인 목소리.
유니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부정적인 감정으로 똘똘 뭉쳐진 사내가 등장했다.
'베르돌트.’
유니스는 창가에 앉은 채 저를 보는 베르돌트의 한심하다는 눈빛에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무 예상대로인지라 재미가 없네.”
아쉬운 듯 혀를 차는 목소리에 유니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베르돌트 시어볼드, 유니스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들 때 최악의 최악만 모아 만든 비열한 악당.
자신의 몸에 흐르는 반쪽짜리 인간의 피에 환멸을 느끼며 동생이자 남자 주인공인 라그나르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등장인물.
결국은 열등감을 이기지 못하고 라그나르를 암살자 집단에 버려 후에 복수심을 품은 동생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죽어 버리는 인물.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야 했으나 살아 있는 악역이었다.
그리고 그 악역은 주인공을 싫어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회다..'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유니스를 아직 버릴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니스는 베르돌트가 떠날까 봐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좌절하며 흐느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반짝이는 눈으로 베르돌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업자 제안 아직 유효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