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유니스의 말에 베르돌트는 언제 무감한 눈빛으로 봤냐는 듯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베르돌트는 유니스와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저런 눈빛을 하는 자들을 많이 보고 자라났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중요 치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인간들.
다른 사람들의 비명과 고통을 발판 삼아 목표를 향하는 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는 자들.
꼭 그런 자들은 이런 눈빛을 하고는 했었다.
베르돌트는 잠시 상념이라도 잠긴 것처럼 가만히 유니스를 바라보다 답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애써 감추어야 했다.
'나쁘지 않을지도.’
멍청하고 순진한 놈들보다는 목표를 향해 어떤 짓이듯 서슴없이 행하는 인간들이 다루기는 훨씬 더 쉽다.
“글쎄.”
하지만 쉽게 응해 줄 생각은 없었다.
베르돌트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너 때문에 내 동업자 한 명이 죽어서 말이야.”
“동업자라면 오벤 백작…?"
“잘 알고 있네. 덕분에 손이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너같이 쓸모없는 짐을 다는 것보단 부족한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공작 부인으로서 자존심을 가지.
고 있었던 유니스의 자존심을 무참히 깎아내리는 말이었다.
이곳이 사교계였다면 유니스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나서서 그녀를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그럼 그녀는 마지막에 웃으면서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된다고 가벼운 책망과 함께 자비로운 척을 했겠지.
하지만 이제 주변에는 유니스를 위해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콘란드도, 마리아도, 카스토르도 모두.
결국, 자신을 지키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유니스의 눈은 그동안 흘린 눈물 때문에 짓물러 있었지만, 형형히 빛나는 눈 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누군가가 본다면 부드럽고, 다정한 헤로니스 공작 부인이라 입에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낯선 표정이었다.
"내가 그보다 더 유능하단 것을 알고 이렇게 찾아온 것 아닌가?"
유니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최악의 상황에 떨어졌을 때의 감정은 이미 모두 겪어 보았다.
이보다 더 최악이 되지 않는 방법은 방해가 되는 이들을 모두 없애는 것.
그렇지 않고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유니스가 알던 흐름 따위 이미 멀리 벗어난 지 오래였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녀는 이것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창조주인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누구나 목표가 없을 적과 있을 적은 행동거지가 다른 법.
유니스는 마지막 희망에 매달려 목표를 이루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껏 금기라 여겼던 자신의 숨겨진 정체를 토해내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전에 네가 말했던 그 책. 그 책의 내용이 기억나?"
"그 재미없는 소설을 말하는 것이라면 기억나.”
"내가 다른 세계에서 갑자기 이곳으로 떨어졌을 때 나를 사랑하는 신께서 내가 당황하지 않도록 선물해 준 책이야.”
유니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신께서 정해 놓은 운명을 기록해 놓은 책이니까 예언서나 다름없었어. 정말 책에 적힌 그대로 세상이 흘러갔거든."
"운명? 운명이라고 하기엔 나는 죽지 않았고, 네 딸도…. 거기 적힌 것과 이야기가 전혀 다르던데."
베르돌트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했으나 유니스는 어느새 선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말에 신뢰를 더하기 시작했다.
“주어진 역할이 변한 거야. 역할을 대신 수행해 주는 자가 있으니 운명이 바뀐 거지. 죽었어야 할 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베르돌트가 자신의 죽음이 언급 되자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유니스는 여전히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위협받은 적 없어? 죽음은 너를 끝까지 쫓아왔을 텐데.”
유니스의 말에 베르돌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녀의 말은 이상했으나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껏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왔다고 하기엔 베르돌트의 인생에서 핍박과 위협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라그나르를 버리고 나서부터 자주 있었던 일이다.
베르돌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유니스는 더욱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은 정해진 죽음이 끝까지 쫓아 온다 했어.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네 죽음을 대신 가져가 준다면?"
유니스는 평소처럼 주저앉아 멍청하게 울고 있는 대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상황을 바꿔나가기로 했다.
한때 애정을 갖고 서술해 내려갔던 남자 주인공 라그나르의 목숨 또한 이제는 그녀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라그나르라면?"
그 말에 지금껏 표정을 구기며 조용히 반응하던 베르돌트가 눈에 띄게 동요하였다.
'내가 왜 널 모르겠어.'
동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자.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기에 자신이 저지르는 일에 한 치의 죄책감도 없는 자.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동생을 죽이고 싶은 자라는 것을 유니 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베르돌트가 이 말에 흔들릴 것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난 신께서 말씀해 주신 운명을 알고 있고, 라그나르의 약점 또한 알고 있지. 그러니 동업을 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면 좋지 않겠어?"
유니스의 예상대로 베르돌트는 꽤 혼란스러웠다.
첫 만남 때 보여 주었던 반응이 유독 신경이 쓰여서 혹시 도움이 되지 않을까 되지 않더라도 비웃어 주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 독기 어린 눈을 했냐는 듯 선한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저를 설득하는 말에 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고작 인간 따위가 드래곤의 피가 섞인 자신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설득하려는 것이 꽤 자존심이 상했다.
'이 여자의 진짜 정체가 궁금한데.’
애초에 자신과 라그나르의 관계에 대해 유니스가 안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고작 글자 몇 자 정도로 자신을 바로 알아보는 것도 수상했고, 이렇게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어울려 주는 것 정도야.'
어차피 베르돌트는 라그나르를 죽이고 나면 동업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그러니 잠깐 어울려 서로 원하는 것을 취득한 뒤 죽음으로 이 건방진 태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면 된다.
베르돌트는 모든 생각을 정리하고서 이곳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스산해 보였으나 그 나름대로 즐거워하고 있었기에 유니스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내 사랑스러운 동생 라그나르의 죽음이라면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악녀의 딸을 죽여 줘."
유니스의 입에서는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껏 평정을 유지한 것이 신기할 만큼 노골적인 분노였다.
‘라그나르의 옆에 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베르돌트는 이것 또한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그나르가 소중히 여기니 옆에 두었겠지. 그 여자가 망가져 가는 것을 보고 라그나르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볼만 할지도.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고, 어차피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그로서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베르돌트는 흔쾌히 대답하였다.
"좋아. 그 여자를 죽여 주지. 대신 한 번에 죽이고 싶은지라 라그나르의 약점도 알려 줘야겠어.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며 그 정도는 알 수 있겠지?”
베르돌트의 확답에 유니스의 눈에 환희가 차올랐다.
"드래곤들은 각성기에 몸이 가장 쇠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
"그 정도야 알고 있지만…. 라그나르는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동안은 각성 기미가 보이지 않을 텐데.”
“상위 드래곤의 기운으로 억지로 각성을 유도할 수가 있어."
유니스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이 근처에 있는 산맥 중 어딘가에 클레멘스의 건국 시기부터 살아온 고룡이 있고.”
이것은 오로지 유니스가 작가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드래곤의 손에 자라지 못한 베르돌트는 모를 수밖에 없는 사실.
“고룡을 죽여서 그의 기운으로 라그나르를 억지로 각성시키고, 가장 약해졌을 때 손쉽게 죽이면 돼."
유니스가 평온한 얼굴로 내뱉는 잔인한 말에 베르돌트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내린 저주도 있으니 각성시기에 다프네라는 여자가 있어 주면 더 완벽한 무대가 될 것 같았다.
베르돌트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좋아.”
이로써 두 사람의 계약은 성립이 된 것이다.
유니스는 베르돌트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것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점이 있어. 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거야?"
“운명을 모두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나에 대한 건 잘 모르나 보네.”
'그거야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멈줬어야 할 사건이니까.' 애초에 베르돌트가 빈민가 사건을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면 이런 수모를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유니스는 아니꼽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베르돌트의 목소리가 얼핏 비꼬는 것처럼 들렸기에 유니스가 인상을 쓰는 찰나.
그는 만족스러운 성과에 유해진 마음으로 답해 주었다.
“진짜 드래곤이 되기 위해서지."
얼마 남지 않기도 했고.
“그랬구나. 그래서였어.”
대충 알 것 같다는 목소리에 베르돌트는 이번에야말로 미련 없이 창문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유니스는 입가에 지어지는 비웃음을 뱉었다.
“멍청하긴.”
반쪽짜리 피가 어떻게 완벽한 드래곤의 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베르돌트는 라그나르를 죽이고 나면 유니스 자신도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인물이니까.
하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그것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것은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 * *
오스왈드의 건국제가 끝이 날 때까지 라몬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공작은 만나 주지 않고 가끔 시몬의 요청에 잠깐씩 얼굴을 비춰주었으나 그럴싸한 소득은 얻지 못했다.
물론 사건의 진범을 모두 붙잡을 생각이기는 했지만.
시몬은 돌아오는 내내 아픈 머리를 짚으며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내었다.
오스왈드에서 압박이 들어올 것 정도는 예상했으나 전쟁까지 갈것이라 생각지도 못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후우.”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를 열심히 걷던 중 시몬은 갑자기 멈춰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주머니에는 다프네가 빌려준 도장이 들어 있었다.
사실 비약적인 생각일지 모른다.
보육원에서 발견된 도장이 빈민가까지 연결된 것은 분명히 과한 걱정일 수 있다.
다만 황제를, 자신의 아버지를 의심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애초에 보육원과 관련된 일을 꼭꼭 숨겨 놓는다고 집무실 책상 아래 비밀 공간을 만든 것부터 수상했다.
정말로 숨겨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더는 미루지 않아야 했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바로잡는다면 더는 가해자가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시몬은 다만 제 생각과 다르게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몬은 굳은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집무실 앞에 도착한 시몬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와 다르게 기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설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집무실에 노크하자 안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오라며 허락의 말을 던졌다.
문이 열리고, 황제의 집무실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껏 시몬이 앉아 정무를 처리하던 곳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꽃과 같이 유약하나 성군이라 불릴 정도로 제국민들을 아끼는 황제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정무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바마마.”
“시몬. 네가 노력해 준 덕에 내가 걱정 없이 진료를 받고, 회복할 수 있었단다."
그럴 리가 없다.
시몬은 아버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주치의마저 일하는 것을 만류할 정도로 오래 앉아 있지 못할 몸이라 했었다.
분명 다행이라며 안도를 하기도 모자란데 어째서 의심이 피어나는 것일까.
“그동안 고생했다.”
시몬은 결국 황제의 집무실에 숨겨진 공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