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딸로 태어났다-175화 (175/185)

제175화.

오스왈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클레멘스의 날씨 또한 어느새 겨울을 품고 있었다.

“다프네는 오늘도 보육원에 가는 거니?”

엄마의 물음에 수프를 떠먹던 스푼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아빠와 나 그리고 한쪽에서 찹찹 소리를 내며 야무지게 밥을 먹는 키키까지.

평화로운 아침 식사 시간에 던진 물음에 어제와 똑같은 답을 하니 아빠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한가해졌다고 너무 라그나르랑만 노는 것 아니야?"

섭섭하다고는 하지만 장난스러움이 섞인 목소리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두 사람도 저 빼고 놀잖아요."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며 데이트를 하면서.

내 말에 아빠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부끄러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신혼부부니까 봐줄 거지?"

“그럼요. 저도 부모님이 사이좋아서 너무 좋은걸요."

내 말에 엄마랑 아빠도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난 혹시 라그나르랑 특별한 관계가 되었나 싶어서 물어본 건데 말이지. 되레 역으로 공격당했네.

그렇지, 클로에?”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둘은 그저 친구 사이라니까.”

아빠의 목소리에는 얼핏 기대감이 서려 있었으나 엄마가 재빠르게 그 기대를 잘라내 버렸다.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두 사람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특별한 관계긴 하죠. 친구니까."

“그것 봐.”

엄마는 승리자가 된 것처럼 의기 양양한 미소를 지었고, 아빠는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친구지만….'

그리고 나는 당당히 거짓말을 하면서도 마음속 양심이 찔려 괜히 물을 들이켰다.

'밝히자니 무언가 부끄럽고.'

별것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쉽사리 솔직히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다시 깨가 넘치는 대화를 하는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고서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요. 저녁에 봬요."

마침 타이밍이 좋게 두 분이 연애를 즐기셔서 다행이다.

나는 밥을 다 먹고서 편히 누워 있는 키키를 품에 안고 식당에서 빠져나왔다.

“키키. 오래간만에 언니랑 외출할까?”

꺄앙-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밝은 울음소리에 코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 * *

사실 보육원에 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우선 라그나르와 자연스럽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두 번째는 조용한 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로니스 공작이 자꾸 나를 만나려고 귀찮게 쫓아다녀서이다.

내가 보육원에 드나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대공저와 상단에 찾아온다는 말에 만날 생각이 없다 전하라 하였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찾아와 슬슬 소식을 전해 듣는 것도 귀찮을 찰나.

헤로니스 공작이 드디어 내가 보육원에 드나든다는 소식을 접했나보다.

하필이면 라그나르도 자리를 비운 시간인지라 그를 막을 자가 없었다.

“안 돼요! 여긴 출입 금지란 말입니다!”

보육원 직원들이 나서서 공작을 막으려고 했으나 일개 평민인 그들이 공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감히 누구인 줄 알고!"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는지 오스왈드에서 보았을 때보다 꽤 마른 것이 눈에 띄었다.

덕분에 눈이 더욱 날카로이 빛나는지라 신분의 격차와 더불어 그의 기세에 압도된 직원들이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귀찮으니 슬슬 끝내야겠지.'

공작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즐거웠으나 그렇다고 질긴 악연을 계속해서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한가요?"

갑작스럽게 내 목소리가 들리자 공작이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나를 만나게 되어서 감동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공작님도 보는 눈이 많으니 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죠?

더는 다른 이들 괴롭히지 말고 들어오세요.”

“이들이 건방진 탓을 지금…."

공작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키키가 맞받아치듯 위협스럽게 울음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키키의 울음소리에 공작이 흠칫 놀라 말을 멈추었고, 기특한 짓을 한 키키의 등을 몇 번 쓰다듬어 주다가 키키가 익숙해하는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잠시 키키를 좀 부탁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 * *

우리의 앞에 따뜻한 차 두 잔이 놓였다.

공작은 당당히 찾아온 것이 무색하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불쾌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참이고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빙빙 돌고 돌아 개고생한 것을 봐주어 먼저 말할 기회는 주려고 했는데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찻잔에서만 모락모락 김이 올라올 뿐, 그가 먼저 행동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서 찾아오신 것 아닌가요?”

“불쾌하니 쳐다만 보지 말고 말을 하죠?"

결국, 참다못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니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말로 프레이르를 쏙 빼닮았구나. 얼굴도 그렇고, 난감할 때 표정을 굳히는 것까지 너무나도."

"나를 낳아 주신 분이니 닮는 게 당연하죠. 그 고생을 겪으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누구와는 다르게.”

내 말에 공작이 다시 입을 다문다.

이제는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대화를 하려고 찾아왔으면 용건을 말해요. 상인의 시간은 금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단다."

“무슨 말.”

“내가….”

공작은 마치 입에 담아서는 안될 말을 담으려고 하는 듯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미, 미….”

차마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 못하겠다는 듯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모양새가 거슬렸다.

“설마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시죠?”

"......."

내 말에 공작의 몸이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정말 눈에 훤히 보이는 반응에 기가 차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다만 정말로 그녀가 내 아이를 낳았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로 사과를 하다니.

원치 않은 사과에 기분을 나빠해야 할지, 결국은 공작이 자존심을 꺾을 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프레이르가 죽었을 때 직접 찾아와 시신을 확인했잖아요. 그때 날 쓰레기처럼 내쳤던 것 기억나 시나요?”

“그래. 기억한다. 그랬단 사실을 그 누구보다 후회하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공작은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자신의 가슴을 거세게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만약 그날 조금이라도 이 성이 있었더라면 그런 잔인한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다프네. 네 눈을 보거라. 그 눈은 내가 물려준 색이다. 그 찬란한 황금색이야말로 네가 내 딸이란 명백한 증거지 않으냐!"

공작은 너무 괴로워 미쳐 버릴 것 같다 중얼거리더니 홀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에 나는 일말의 변화도 없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을 이었다.

"내 눈을 보지도 않고 내쳤으니 그랬겠죠. 프레이르가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기 바빴으니까.”

*

“나는….”

"난 아직도 아주 어릴 적 기억들이 생생해. 첨탑에 갇힌 프레이르가 애절하게 당신을 찾던 것도, 원망하지 않고 당신이 구해 주러올 것이라 믿었던 것도."

프레이르의 이름이 나오자 공작은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죄책감이 스며 있다.

는 것이 우스웠다.

“마지막까지…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간절히 당신을 찾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지. 그럼 하나 물을까?"

“무엇을….”

“적어도 당신이 그녀를 배우자로 생각하고, 마지막 예의를 갖추었다면 장례는 제대로 치러 주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프레이르의 시신은 어디 있지?"

공작은 이번에야말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충 평민들이나 쓰는 묘지에 버리듯이 두었다고 들었을 테니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답은 할 수 없을 터이다.

이런, 아닌가 보다.

공작은 그 점은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어디에 버려둔 지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나 보구나.'

정말 기가 막힌 자였다.

“내가 프레이르의 시신을 찾아오마. 그러니까.….”

"어디서 찾아온다는 건지 모르겠네. 이미 오스왈드에 있는 유골을.”

“뭐, 뭐?"

내 태연한 목소리에 공작이 다시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당신이 버리듯이 두고 간 어머니의 유골은 이미 내가 거두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모셔갔다고요.”

또 오스왈드로 갈 용기는 없으신 것 같은데.

나는 빈정거리며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공작의 응대를 허락한 지도 벌써 50분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슬슬 내쫓으려는데 그가 내 의도를 읽었는지 다급히 불렀다.

"내가, 내가 그래도 네 아비잖느냐.”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들었다.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순간 이성을 놓아 버릴 뻔했다.

"내가 네 친아버지인데…. 이렇게 주변에 무시와 괄시를 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리라 믿는다.”

"…왜 믿는지 이해가 안 되네."

“하늘이 내려 준 천륜이란 그런 거야. 아무리 네 양부모가 잘해 주었다 한들 네가 이 세상에 태어 날 수 있던 이유는 내 덕이잖느냐!”

'내가 이런 자를 계속 대우해 줄 가치가 있나?'

적어도 공작이라는 지위에 맞춰서 이곳에서는 좋게 끝내 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마리아가 나랑 생일이 몇 개월차이가 나는지는 아시나?"

“......."

“공작님.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책임지지도 못했으면서 이제 와서버린 자식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정말로….”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꼴불견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네 부모고!"

내 말에 퍽 자존심이 상했는지 불쾌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이 자리에서 숙이고 들어가야 할 사람이 자신임을 알고 있어도 결국 그의 자존심은 더 이상의 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

“다시 말하지만 내 아버지는 체이너드 대공뿐입니다.”

"아니, 네 아버지는 나다!"

억지를 부린다고 되는 일도 아닌데 참 대단하다.

“내가 아플 때 옆에 있어 주던 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살펴 준것도."

악셀리우스, 그가 진정한 내 아빠였다.

“모두 체이너드 대공이 해 주었는데 어린 시절 나를 내치던 당신이 어떻게 내 아버지가 될 수 있겠어요.”

어느덧 시계는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오를 알리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한 시각이 됐네요. 이만 가주세요. 더는 할 이야기 없으니까요.”

공작은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쉽게 소파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막상 시간이 다 되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이 아비가 미안하다 하지 않아!"

“정말로 미안한 사람은 사과를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나는 친절히 문을 열어 주고는 한 가지 말을 덧붙였다.

“마리아는 그러던데."

자신의 어린 딸보다도 못한 사람이라는 뜻을 단숨에 파악했는지 그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달아올랐다.

결국, 공작이 자존심을 더 꺾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나가는 뒷모습에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 줄 생각 전혀 없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요. 불쾌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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